발칙한 QT
서운함을 넘어 흐르다[창48:8-22] 본문
아직은
가끔 가끔
내 속의 서운한 자갈 들이
저처럼
흐름을 방해 하는 듯 보이지만
조금 더 있어
내 안에
주님 성령의 은혜가
폭포수 처럼 쏟아져 흘러
내 영혼이
큰 강같이 되기만 한다면
어찌
내 안의 그러함으로 인하여
흔적이나 남게 될까
그날이
어서 속히 올수 있도록
가을 빛보다 훨 아름답고 밝은
주님의 임재하심을 간구하는
기도의 분량을
더 늘여야 하리라
8.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야곱에 '고센'에 도착했을 때
왜인지 아들들은 데리고 나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후 17년 간도.....
이상하다.
왜지?
그제야 손자들을 보고
'이들은 누구냐' 는 말에
어이가 없다.
10.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그가 눈이 어두워서
봐도 몰라 모았었을까?
그럼에도 그 사이에 그들 조손(祖孫)간에 해우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그날 처음 만났을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이 '간극'
실제와
당연히 그래야할 것 (조손간은 미리 만났어야 하고 서로 교류하며 친했어야 한다는... 당연하다 생각하는 상식)이
꼭 그렇지 않을 때 나오는 현상.
왜 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렇게 죽기 전에야 마주했다 .
왜 그랬을까?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친 조손 간에
12지파의 하나로 그들을 마주 하게 되며
축복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서운함.
그리고
도저히 우리 , 아니 '내' 심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반드시 그리하여
12지파를 채우는 (형제와 조카 들 합쳐서 12지파.)
하나님의 역사는
그리 일어났다 .^^;
15.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
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그런 지 왜 모르지만
이스라엘로 갑자기 더 불리던 그 ,야곱이
영적 감동이 충만하여
이리 고백한다.
"내 조부 , 내 아버지.. 가 섬기던 하나님( 나.. 윗대 분들이 버겁던 불신자들이시라서 감흥이.. ^^;;;;)"
"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아...........
나의 영적으로 거듭난 후 부터 지금까지 확실히
난.. 그런 감동으로 이어진다.
그 이전,
내 조부.....의 사실이 아니기에 감흥이 그리 크진 않지만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시란 부분은
가슴이 흔~들하는 감흥으로 다가온다.
이거......
어쩌면
내 이해되고
내 받아 들일 수 있는 부분 만
받아 들이는 것으로 보아
오늘 말씀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서운함' 말이다.
우리 부모의 날 그리 살갑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하여 기도하며 키우시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서운함과 아쉬움........말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태로 부터
나의 낳기 전부터
나의 형질이 만들어 지기 전 부터
나를 알고 생명책에 기록했다시던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에 오고 나면
이전의 저러함들은
어느새인가 흐려지고
말씀이 강하게 자리 잡아 가며
내 마음 마져 움직이게 되어감을
자주 체험하고 있지 않던가?
각설하고
20.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야곱은
또 므낫에게 '서운함'을 줄 수 있는
(마치 형 에서의 서운함과 아들들의 요셉에 대한 서운함을 대물림 하듯이........)
그러한 팔을 엇갈린 '축복'을 한다 .
축복이면서 축복아닌듯
주는 것도 빼앗는 것도 아닌듯하고
편애 하는 듯한.........
어쩌면 므낫에게는 '할아버지 야곱'을 보는 기대나 즐거움 보다
그 성령 충만한 할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기대 보다
'서운함의 충격'이 크지 않았을까?
그것.
그리 생각하는 것.
내 잘못인가?
나만 국한 된 어이없는 감성인가?
다 다른가?..................
솔직히
서운함.
누구나 있지 않을까?
보편적........인 감성 아닐까?
그러나, 그럼에도
성경에 그런 공감하여 주지 못하는 듯한 부분들이
자주 나옴을 본다.
유다가 더 많이 축복 받은 것도 ,
어쩌면 형제들에게는 '예수님'이 특별대접 받는 것은 또 안그랬을까?
........
왜 그러실까?
왜 유독 오늘 그 서운함에 대하여
묵상토록 하였을까?
내게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서운함'
아니 , 솔직히
주님 안에서 '서운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한 것이
더 본질 아니실까?
그것.
선택은
어차피 '주님의 주권' 이심이 아니신가?
주님이 무조건 세상의 관습,
장자이니...
아들이니 무조건 공평히.........
이것이야 말로
천국에 들어가서 사는 자들에게
해당되지 않으실까?
아니.. 심지어는 천국에도 3층천까지의 구분이 나오지 않으시던가?
사도 바울에게 하신 말씀 통해 알수 있듯.. .
그 이상은 우리가 비밀을 알수는 없지만... 어찌되었든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시고
이 땅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어찌 감당해야 하는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 없이
무조건 아버지에게 뗑강부리는 아들의 마음처럼 하는 것은
물론 서운함 전에
내가 먼저드려야할 부분,
더 열심히 하나님께 다가가야 할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말씀 묵상하며 말이다.
그러나, 그런 조건 적 사랑이라면
인간의 사랑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음을 생각할때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연히 남은 '서운한 감정'은
그것을 왜 그리 허락하셨을까?
거기에 속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내게 어찌 해당될 것인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므낫세'나 '요셉이외의 형제' 같은 입장일 지언정
마치 저들이
당연히 그렇게 받아 들여
결국 자신들의 그런 서운함에 의한 죄를 해결해 내고
이제는 '요셉'총리 동생 앞에 자연스레이
아버지의 사랑을 당연히 받아 내게 되기까지
성장한 것 처럼
성장하는 것.
그것에
서운함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아.
그렇다.
그 축복.
결국 이땅에서 유한한 축복에 국한 된 그러함에
내 마음이 흔들리고 질투하고................
아니 설령 그러함을 하나님의 관심을 더 받는 다고
세상의 가짐을 더 가지게 된다고
그게
영원함 안에서
과연 무엇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게 드는 생각이다
주님이 주신 깨달음이겠지...
그렇다면
주님이 허락하신 '서운함'이라는 감정조차
주님이 주님의 뜻 가운데서 주셨음을
그냥 인정하고 받아 들임으로
내 자아가 깨지고
결국 십자가 앞에 내려 놓고
허락되어진 깨달음으로
그러함에 조차 자유로와 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샬롬' , 마음의 평강과 평화가 흐름이 아닐 것인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모든 더럽고 어둡고 추악한 것들이
흘려 내어 내 마음 속에서 떠나가고
결국
한점 어두움이 없는 '고요한 평강'의 기쁨이
폭포수 처럼 흘러 나오는 것.
하나님의 보좌로 부터 흘러 내려오는
그 영생의 에너지가
끝없이 사통팔달
서운함 같은 어이없는 자갈들이
도저히 내 영혼에서 보일 수 없을 만큼
크고 깊고 넓은 '강'같은 마음의 물결이
은파처럼 흘러가는 상황.
그게........
주님이
서운함 대신
우리에게 바라시는
마지막 삶의 얼마를 남겨 놓지 않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허락되어주신
깊은 뜻이 아니실까 싶다
깨달아짐이 감사하다.
예.. 주여
부딪치는 의문들.
그들 입장에 서게 되니 답답해지려는 가슴
서운함에 대한 속상함..........
이러한 자갈 밭 같은 내 내면이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
진정한 사랑의 원류이신 하나님이
비록 우리의 '죄' 때문이긴 하지만
허락하신 그 서운한 아픔,
그 가슴 시리고 아픈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가
결국 그를 통하여
더 큰 사랑과 내려 놓음과 받아 들임으로
성령의 폭포수 같이 흐르심이
내 안에서 강같이 크고 넓어져
이 모난 자갈보다 아프던 서운함의 존재들이
흔적도 없이 감싸 안아져 소멸되는
그러함을 깨닫게 하시는
원리임을 알아냈습니다.
주여.
어서 그리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모든 것
진정 나의 선을 위하여 허락되어진 것임을 깨달아
괜히 그 서운의 자갈로 인하여 긁히 아픔으로
주변에 알아달라 호소하던
그 어이없음을 내려 놓을 수 있길 원합니다.
내 주여.
주님 도우시면 가능합니다.
주여.
성령으로 강하게 붙드소서.
제 서운함을 성령의 불로 태우시고
강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로 채우소서.
제 내면을 요.
감사합니다.
내 주시여.
거룩하고 귀하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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