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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은혜(롬7:1-13)

주하인 2010. 7. 13. 12:29

제 7 장 ( Chapter 7, Romans )

 

이 꽃은

바위 틈에 외로이 피어나도

눈을 잡아 끕니다

 

그 색의 하얌이 그렇습니다

그 두르고 있는 색의 생명력이 그렇습니다

그 꽃의 유지하고 있는 자태가 그렇습니다

 

그는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피워내야할 결실이

그 자리에서의

최선인 것임을

기쁨으로 알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최선을 다해내는

순종이 그것임을요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아침에 걸어 나오다가 아파트 아래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거의 다 건너오는 순간에

끝쪽에 자라있는 내 키 정도 크기의 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는 아마도 외래종일 듯 수년간 걸어다니면서도

쓸만한 열매하나 맺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열심히도 열매 비슷한 것을 맺고는

오늘 보니 나무의 상부에 있는 잎사귀들이 하나 둘씩 마치 단풍 들듯이

잎사귀 안쪽으로 반씩 물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참 별일이다.

 가을도 아니고

 더더구나 쓸모없는 나무가 '가을' 분위기를 내고 있네..'

혼자 중얼거리며 피식 웃으려다가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그 나무는 아무 필요도 없다고 누가 생각하든 말든

그 자리에서 열심히 자기만의 세월을 익혀가고 있구나..

그래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있다.'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누가 그것을 비웃을 수 있는가?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는 열심히 자연의 순리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럼으로 내가 늘 지나다니며 보고 느끼고 있는 익숙한 '풍경'의 하나가 되어 있지 않은가?

 

 어제 기도하면서 불현듯 깨달은 게 있었다.

''자식', '아내'..서운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내 잘못이 크다.

 그 어떤 이유로도 난 가장으로서 식구들에게 부담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 나름의 유약한 부분을 안타까워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들을 보듬어 주고 그들 입장에서 같이 불쌍히 여겨주어야 할 것을

 자르고 비평하고 잘하라고 야단하니

 그들은 안되는 자신을 어찌 감당하란 말인가? '

 

 기도한 탓이 맞다.

마음이 훨씬 더 여유롭고 폭이 넓어졌다.

최소한 한번 급한 흐름에 날 싣고 나면 좀처럼 남의 입장을 배려할 수 없었던게

내 오랜 성격의 추세다.

하지만 조금은 더 여유가 생긴게 맞다.

어쨋든 마음 뿐 , 아직도 내 속에는 아버지로서 위신을 지키고 싶고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하여 그 각본 속에 날 넣고

식구들을 그 안에 들어오길 강력히 바라는

'율법'적 기대가 강하게 남아 있기에

그 사이에서 난 갈등이 되었다.

왔다 갔다...

그러면서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아버지 학교 스텝 기도회에 다녀왔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통해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조금이나마 이끌어갈

은혜를 베푸심을 또 한번 경험하였다.

기도하고 팀별로 모여서 기도제목을 나누고

대화를 진행한 후 또 서로 중보기도 강력하게 오는 순이다.

대화 중 비슷한 사정의 동년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 한구석이 풀어지는 느낌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들어가기 전, 기도를 짧게 강하게 하고 들어갔다.

큰 아들이 머쓱한 표정으로 서 있다.

나름대로는 무언가 각오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난 아이를 불러 앉히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내가 잘못이다.

가장으로서.. ..

내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을 들어볼래?

난 중년이다.....   ......   ..

그러나 넌 우리 집의 큰 아들이다.

난 너에게 바램이 이렇다.

그런데 넌 부족하게 느껴지는 면이 나에게 있다.

이러 이러한 면이 .. 그렇다.  

하지만..  잘해보자'

 아이와는 잘 화해가 되었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다시 정리가 되었다.

일단 내 속이 정리가 되니 외부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난 이런 일을 통하여 느끼는게 있다.

예전에는 그랬다.

' 누구는,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해야 된다.

 그게 남자로 당연히 해야 하고

 ... 로 그렇게 해야한다.

 .. 하면 안된다. '

 이게 내 속에 강하게 자리 잡은 나름의 원칙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이다.

내 속에 내재 되어 있는 이러한 율법은 나로 큰 실수는 하지 않게 했지만

삶을 크게 위축시키었다.

 나무를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열매맺지 못하는 희한한 나무는 여름에 단풍색깔 들면 안된다.'는 것은 율법이다.

율법은 '어느정도 까지 사회를 지켜주는 역할을 하지만

도를 지나치면 죄의 원인이 된다.

특별히 그 잣대의 고착화가 내면을 향하면 자신을 비하하는 '열등감'이나 '자책감'의 원인이 되고

타인을 향하면 냉랭한 비판의 눈이 된다.

자신을 향하건 타인을 향하건

율법이 강해지는 곳에는 분란이 있게 마련이다.

 그 나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베어버릴 것인가?

 

내 자식들.

율법적 잣대로 보면 그래 조금은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실은 그 아이들을 사랑의 눈으로 , 시간의 개념으로 그 후를 보면

누가 알겠는가?

실은 지금 세태의 평균적 아이들보다는 훨씬 선한 영혼을 가진 자들이 아니던가?

문제는 그 아이들에게 너무 잣대를 들이대어

가을에만 단풍들게하는 나무로 강요를 하다보면

그 아이들은 그 자연스러움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자식 뿐 아니다.

나에 대하여서도 스스로 마찬가지다.

 권고는 필요하다.

기준을 세워줄 제재와 교육과 인도는 필요하다.

그리고 그 후는 '사랑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 사랑의 기다림은 내가 배우고 세상에서 배운 사랑으로는 결국 한계가 있다.

오류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베풀어 줌이 필요하다.

어제의 묵상이후,

죄의 종보다는 '주의 종'으로서의 나를 선택한 후

아침이 놀랍도록 풍성하다.

은혜가 나를 그득채움을 느낀다.

괜한 불안은 사라졌다.

며칠간 날 비영적으로 메마르게 만들던 감상은 사라진데없다.

내가 크게 변한게 없다.

그럼에도 그렇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다.

하나님의 그 사랑하시는 권고하심으로

날 다시 권고하시는 것이다.

깨닫게 하신다.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이 필요하되

율법이 되지 않는 권고가 필요하다.'

 

감사하다.

 

 

 

적용

 

1. 성경 세장 읽겠다.

 . 성경은 날 세우는 권고의 기준이자

  사랑이 흐르는 흐름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숨결이다.

 

2. 둘째가 외박나왔다.

 사랑의 눈으로 아들을 보되

 원리에 대하여 권고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

 

3.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자.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율법적인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이 세워주신 가치로 지혜롭게 보되

그게 저로 하여금 남을 비판하는 잣대가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은혜로 받은 말씀을 통하여

나를 보되

그게 자책하는 무게가 아니고

순종하니 넘쳐지는 은혜의 통로로 느껴지게 하시고

가슴 떨리는 본향의 그리움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지혜롭되 은혜롭고

은혜롭되 결단력있고

이 세상의 모범이 없는 현상에

나 만이라도 다른 자되는 기회가 되게 하소서.

주님 기뻐하시는 자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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