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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

주하인(창 40:5-23)

주하인 2007. 6. 1. 09:13

제 40 장 ( Chapter 40, Genesis )


5.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몽조가 다르더라

 동상이몽

걱정이 많으면 꿈도 많다.

칼라 꿈을 계속 꾸면 우울증 가능성 있다던데.. (맞나? ^^;;;)

몽조는 꿈의 의미를 얘기한다.

 

 

 
 
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
 근심이야 요셉이 더 있어야지 왜 그들이 더 근심이 있는가?

15절을 보라.

아무렇지 않게 고백하는 그의 말 속에

그는 자신이 무죄인데 여기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한번도 자신의 신세를 탓하지 않은 그도 가슴 깊이 아픔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 아픔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오히려 근심을 표하는 이유는 몇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가진 자의 소유를 잃어버릴 두려움.

 

 둘째

감옥 생활 신참 자로서 익숙지 않은 환경의 두려움

 

 셋째

 무엇보다 불신 권력자로서

물질적 소유가 컸던 만큼 상실감은 훨씬 더 클 것이며

그 비어진 영혼의 공간에 들어찰 진리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본능적인 영혼의 피폐감을 맞닥드려야 하는

존재적 절망감.

 쉽게 말하면

불신자가 당연히 겪어야할 공포.

 

 이러한 그들의 공포와 대비되는 어린 요셉의 차분함.

 

 

 
 
7.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이 말 한마디를 보라.

" 당신들이 어째서 근심하는 빛이 있습니까?
 

 이 구절을 보며 연상되는 장면이 있다.

 

 차분한 어린 청년 앞에

불안에 떨고 있는 두 나이든 중년의 남자들.

어둡고 쾌쾌한

고대의 감옥의 어둠 속에서

차분하고 맑게 보이는 요셉의 얼굴.

그의 목소리는 어린 나이 답지 않게 차분하고 청아하다.

그는 서서 내려다 보고

두 사나이는 쪼그려 앉아서 불안에 떨고 있다.

 요셉이 하는 말은 참으로 차분하다.

그로 하여금

어린 나이지만 의지하게끔 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 묵상하는 짧은 시간이지만  내 가슴 한 구석이 차분해지고  따스한 기운이 올라온다. )

 그렇지 않고야

자신보다 훨씬 어린 그에게

그들이 그토록 불안해 하던 이야기를 그에게 털어놓고

해석을 받을까?

 

 이것을 무엇으로 이해할까?

불신자인 그들과 대비되는 그 무엇.

단지 경험이 오래된 고참 옥중 죄수라서일까?

 

아니다.

당연하게도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이기에 가능하다.

은혜가 넘치는 자이기에 가능하다.

 

 난...

가끔 

왜 이리 나도 모르게 글을 마구 적어가나 생각하며 놀라는 때가 있다 .

마치

어떤 때는 성경 속의 인물들의 생각이 그대로 느껴지고

어느 때는 그 장면에 흐르는 사람들의 감정들이 확 읽혀지며

감동할 때도 있다.

웬지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다소

感性이 뛰어난 본질적 성품에

삶 속에서 수도 없이 무너지는 실패의 경험과

그 때마다 시나리오 쓰기 좋아하는 내 머리 속의 예측을 깨뜨려 버리시고

수없이 날 은혜의 체험으로 집어 넣어주시던

강권적인 성령충만의 체험을 하게 시켜주신데 있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말씀은 하나같이 다 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요셉의 그것과는 强度면에서는 당연히도 차이가 있지만

같은 종류의 느낌을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난 오늘 요셉의 이 물음이 슬쩍 소름이 돋으려 한다.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코스피 지수가 1700점으로 사상 최대라 한다.

난 주식에서도 돈을 벌 능력조차 없는 자이다.

어제는 오랫만에 트레이닝 동기이자 4년 선배이신

성공하신 선생님이 전화오셨다.

자식이 서강대,

동업하시는 선배님의 자식은 서울대 들어가셨다한다.

난 그제 저녁에 둘째, 그 엉터리 같은 녀석 공부 못하면서도 놀기에 정신을 못차리는 고2짜리에게 혼을 내었다.

 비교하면 난 세상에 성공할 조건이 별로 남아 있지 않는 40대다.

그래도 가슴이 많이 뻐근하지는 않았다.

어제 묵상이

옥에 갇힌 요셉의 암담함과

이 불신자 관원들의 범죄의 절묘한 연관성을 보며

우리 아이의 옥에 갇힌 요셉같은 심사를 읽게 하시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니

그 아이 특유의 낙천성이 날 편안케 한다 .

신나게 노래하며 -찬양-

샤워하던 녀석이 소리질러서 나를 부르며

'아빠, 우리 예배드려요 ~!' 한다.

 순간, 나는 아침의 이 내용을 이 아이에게 전할까 하다가 생각을 멈추던 차다.

응답이다.

다시 소리질러 그 아이가 요청한다.

신나게 혼난게 어젠데 그 아이의 영감은 하나님의 말씀을 요구하고 있다.

나랑 비슷하게도..

둘은 무반주로 절묘한 찬양을 드린다.

그 아이는,

나도 마찬가지지만

둘이서 찬양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리고는 깊은 감성의 예배를 드렸다.

물론 어제 묵상 내용이다.

그 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 말을 듣는다.

 

 오늘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하는 요셉의 그 말은

위에 언급한 두 사건으로 인하여  

자칫 예전 같으면

그 두 불신 관원의 모습으로 나락에 빠져서 어둠 속에 앉아있을

이 부족한 주하인 앞에

예수님께서

불현듯 나타나서

위로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게 한다.

그 위로는

어제의 우리 두 부자의 예배의 기쁨을 통하여 미리 예비하신 느낌이다.

 

 

 

 

 


 
14.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그럼에도

이 구절은

나를 또 한번 감동시킨다.

 그 어린 요셉이

마치 예수님의 예표인양

위로자로서 굳게 서 있지만,

또한

아무렇지 않은 듯

전혀 자신의 속내를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 마음 깊숙한 곳에

누구라도 느낄 수 밖에 없고 ,

아니

주하인이라면

하루에도 억울하다고 땅을 치는 일이 수십번도 더 있고

용서하지 못할 자들의 명단을 나도 모르는 마음 깊은 곳에 적어 놓고

원망하는 시간을 보내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을지도 모를

그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내비치지 않았을 뿐

그대로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를 예수님과 너무도 닮은 사람이라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만 하는

거의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치부하고

그를 닮아 가려고 애를 쓰고 있지 않았던가?

마치 성경의 이긴 자들이나, 성인들이나 예표적 인물들이 다

감정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감정이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다.

예수님도 우시는 장면이 있다.

 

 

 한편으로  

이렇듯 아무 소리 않고 자신을 낮추고 참아 내는 자가

만일 내 곁에 있었다면 나는 그의 품격을 머리 속으로는 짐작했겠지만

알게 모르게 그를 무시했을 상황의 그런 아이가 바로 요셉이다.

그런 그가

팔려온 지 수년이 되어야

때를 깨닫고

속내를 들어낸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감동스럽다.

그런 그의 인내가

성공론이나 처세술에 능하여

이루어진 인간적 노력에 의함이 아니고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하여

자연스레이 이루어진 선한 결과이기에 그렇다.

 

 선한 인내 후

슬그머니 내어 놓는

그의 깊은 속내의 一段.

그게

읽으면서

코 끝을 찡하게 한다.

 

 

 

 

 
 
15.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이제 적극적으로 자신을 피력한다.

자신은 끌려온 것도 억울하게 되었고, 

옥에 갇힐 일도 하지 않았지만 여기 있는 것도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배울 일이다.

 

가능하면

말을 줄여야 한다.

 

최대한

기다려야 한다.

 

때가 되면

확실히 피력할 소신이 있어야 한다.

 

정확히 이야기할

지혜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한 양심으로

감동을 줄 수 있을 덕이 있어야 한다.

 

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또한

인간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갖지 않는 이해를 가져야 한다.

 요셉도

징조를 발견하고

그 속내를 들어내며

장래를 약속 받았으나

또 잊혀졌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실망을 하는 지름길이다.

그냥

이해하고 내려놓고

결과마져 주님의 손에 맡겨 버려야

큰 실망도

지나친 기대도 않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내적인 평화를 가지게되는 유일한 길이다.

 

 

 적용

 

1. 위로자가 된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이유로 만나게 된 것이다.

 

2. 말을 줄이겠다.

 

3. 내가 원하는 것을 확실히 하겠다.

 

4. 지혜를 원한다.

  주님이 하시면 가능하다.

 

5. 성경 읽겠다.    5장 이상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요셉의 마음을 읽게하시고

그를 통하여

위로의 마음을 같이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하시고

또한

그와 비슷하게

제 인생을 간섭하시는

주님의 세미한 흔적을 읽게 하셔서 또 감사합니다.

주여

늘 주님을 감사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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