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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주님 ! (창42:18-38)

주하인 2007. 6. 6. 15:38

(창42:18-38)

 

 

19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주님 믿는 자들도 두려움과 고통은 따른다.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

    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

    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그 고통은 과거의 잘못을 떠올리게 하다.

 그 죄악은 '핏값'이라는 절묘한 단어로 더불어 '후회'를 하게 만든다.

주님 안에서 고통은 생명을 살리는 '회개'를 위한 초석이다.

 

 

23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 그래도 주님 함께 계시네요 ! )

 

 

 

 통역이 있으므로 자신들의 말을 들을 줄 모른다.

그러나 ,요셉은 그대로 듣고 있다 .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

형제들이 고통이 오자

자신들의 죄를 갑자기 회개할 기미를 보인다.

그는 결코 잊혀진 것이 아니다.

 

 형제들은 그렇다.

요셉이 듣는 줄 모른다.

그럼에도

상황과 상관없는 '핏값'을 들먹이게 된다.

 

 주의 원리다.

주의 원리의 시작은 '회개'와 더불어 된다.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

    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요셉은 못들은 척 했지만

울고 돌아 왔다 .

주님은

우리의 인지에 잡히지 않으시지만

우리를 쳐다보고

우리의 회개를 통하여

너무 기뻐하신다.

 

 그러나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

    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계속된다 .

회개한다고 금방 모든게 풀릴까?

 

( 그래도 주님.   듣고 계시지요 ???)

 

 

  내가 요새 영 육간의 경계에서 마구 헤메이는 듯한 상황이다.

예전같은 행태와

영적 갈등 사이에서 안절 부절 못하는 느낌이다.

 

 갑자기

인터넷 다운 영화에 탐닉하고

아들에게 호된 질타를 하고

아침 기도가 혼자하는 부담으로 자꾸만 멍해지고

찬양인도 조차 시들해지고

마음 속에서는 급한 성격이 나오려 하고

그럼에도

주님에 대한 부담은 자꾸만 커져서

기도에 대한 생각과 갈급함이 커지고

................

 

 엊 저녁은

오늘이 휴일이라는 여유로움에 늘 피곤함을 느끼는 육신을 쉬려고 

집에 서둘러 오다가

오는 길이면 금새 갈 수 있는 기도원에 들렀다.

 지척이 만리라는 옛말처럼

또 요새처럼 육신의 성향이 승리하는 기간은 전혀 생각지 않고 있다가

그 길이 가까와지자

나도 모르게 갈등이 생겼다.

갈급할 때까지 멍하니 그냥 있다가는

또 한동안 혼란을 겪을 것을 미리 걱정하는 것이다.

 

오른 쪽으로 돌기만 하면 되는 기도원이다.

달려 오던 길 그냥 고가도로 위로 조금만 도착하는 집과 기도원

두군데를 두고 갑자기 갈등하다가

오른 쪽으로 훽하고 틀어 영적인 휴식을 택했다.

 올라가는 길 내내 가서 쉬어야 하는데,

애 혼내고 이 무슨 은혜를 바라는 이기적 생각야,

예배 드리며 졸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냥 발이 가는 대로 행했다.

 요새 기도하려면 멍하고 집중이 안된다.

그래도 훈련된 경험이 있어서

내 느낌과 다른 주님의 운행을 기대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 것이다.

 누가 복음

향유 옥합깨는 장면.

목사님의 설교가 어찌 그리 가슴을 치는 지

'예배를 우습게 보지 말라...

 이 곳에서 여러분은 재미를 바라는 지 모르지만

 어떤 분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고

 어떤 분은 영혼이 회복되었다.

  예배는 감동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보는 시몬 같은 자인가 ?

 아니면 구주로 보는 자인가?

  진심으로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뿌리고 머리털로 닦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등등

 어찌 보면 당연한 듯한 설교들이 왜 그리도 내 가슴을 치는지..

 나 요 며칠

 신나게 새벽 3시까지 비디오 보고

 아들 소리치고

 슬슬 다시 장래 걱정하는 옛버릇이 사로 잡으면서

 설교 들으면 나도 모르게 요새 잠이 쏟아지는 상태인 그리 은혜 받을 조건이 아닌 자이다.

 그럼에도 그 사단의 느낌을 뚫고 

이상하게 주님은 눈물이 주르륵 흐르게 하신다.

온 몸이 졸리고 무기력하며 얼굴이 굳어있는 요 며칠의 옛사람 흔적을 뚫고

많은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갑자기...

어 ..

이상하다.

기도원 뒤 쪽에서 유리창을 앞에 맞 두고 단위에 서신 목사님을 바라보는 위치라서

아무도 뒤에서나 옆에서 날 보는 자가 없다는 안도감이 순간 스친다.

그때 , 내 뒤에서 50대 후반의 고상한 아주머니께서도 훌쩍이신다.

전혀 은혜가 넘치는 격정적인 설교가 아닌데도..

그 목사님, 기도원 담임 목사님이신데

주로 찌르는 말씀이다.

그러한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난 울었다.

그 분도 우신다.

목사님

마무리 즈음에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은혜와 예배의 감격과 깊은 목소리와 더불어

기쁨에 대하여 격정적으로 말씀하신다.

그런 분이 아니신데.

하나이신 하나님.

한 영감으로 묶어 가시는 분.

나에게는 개인적인 격려와 위로를 하신다.

 

 집에 와서

아이를 위로하고

나도 모르게 또 인터넷에 매달려 새벽 3시.

 

요새 내가 이렇다.

나도 모르게.........

 

은혜와 상관없이

영과 육의 삶을

마치

살얼음 밟듯이 걷는다.

 

그래도 아침에 9시 못되어 일어났다.

휴일이라서 오래 자려 했는데 ..

일어나

묵상 하려 아주 잠시 틈을 내어 창세기 읽었다.

오늘 구절

눈에 튀어들어 오듯이 들어오는 단어가

'핏값'이다.

고난이 오니 그들은 불현듯 동생을 죽이려 했던 그 죄가 생각이 난다.

그리고는

요셉이 듣는 줄 생각도 못하고

이스라엘 말로 당황하여 설왕설래한다.

그러자 요셉이 자기 방에 울고 들어와 시험하는 말을 한다.

 

 느껴지는 것이 요점이 이것이다.

 

'핏값'

깊은 죄

 

지켜보시는 예수님

'성령'

회개하는 걸 울면서 까지 좋아하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분이 늘 상존하시는 걸 느끼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모습.

 

회개해도 무엇이 달라질까 번민해도, 의심해도

실제로 달라지지 않을 듯한 현실의 모습들.

 

그럼에도

회개하면 달라지는 궁극적 모습

 

아니...

회개한 후

인식하지 못해도

식량은 구해지지 않았던가?

동생의 생명의 위협이라는 두려움으로 인식하지 못해도 삶은 해결되었지 않던가?

 

 

순간적으로 많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내 영적 흐트러짐의 상태로 인하여

깊이 인식을 하지 못하고

성경을 닫고 짧게 주님께 여쭙는 형식으로 마무리 한 후 식사를 했다.

 

가족과의 시간을 보낸 후

친구를 만나기 위해

가벼운 차림으로 걸음을 나섰다.

 

가는 길목은

밑에 두 동서가 사는 아파트를 한 동씩 지나서

전철을 타야 한다.

 동서 둘이 다 그리 녹녹치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리 깊은 우정을 나누지 못하고 있다.

난 지나가면서

속에서 '욱'하는 서운한 감정이 올라오려 했다.

당황스럽다.

 많은 부분 자연스럽게 되었다 생각하면

이 어리석은 자아는 ...

갑자기 핏값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용서 못하는 마음이 '핏값'이다...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니

일과성의 느낌으로 지나간다.

주님은

내 어리석은 영혼에 느껴지지는 않아도

지금 기뻐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이 스치며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집에 돌아 왔다.

아무도 없다.

아들은 공부하러 갔고

아내는 동생들과 쇼핑갔다

 

 주님 앞에 핏값을 내려 놓으려 다시 한번 침대 머리 맡에 잠시 앉았다.

깊은 느낌이 온다.

 

주님이 강권적으로 느끼게 하시는 순간임을 알겠다.

 

주님은 

내가 그리 선하지 않은 성품의 소유자 인 줄 아시지만

그럼에도

그 분 예수님을 인식하고

그 분의 말씀에 맞추어 회개하려는 행위 자체 만 가지고도 기뻐하시는 듯하다.

아주 적은 충성.

일상에서의 성화.

방법론은 주하인, 제대로 깨닫고 있는 듯하다.

주님은 증거로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용서의 감정과 눈물을 허락하신다.

아직도

세상에 나가

또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을 자신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전보다

좀 덜 강하고

좀 덜 길고

좀 덜 지배받을

그런 모습이 될 것 같다 .

 

 삶은

어떤 모습을 취하던

똑같다.

 

 살다가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한다.

 

왕후도

장상도

재벌도

장군도

대통령도

위인도

위대한 철학가도

성공한 문필가도

...........

시간이 지나면 흩어져가는 바람 속의 먼지가 될 뿐이다.

 

김정일도

노무현도

부시도

푸틴도

부토도...

영원 앞에는 대통령도 총리도 의미가 없을 뿐이다.

 

실패한 삶이라고 늘 괴로워 했던 자들도

실제로 망한 사업가도

망할 듯한 곤란한 자들도

....

다 똑같다.

 

시간 앞에는

그 누구도

똑같다.

 

단지

차이가 있을 방법이 하나 있다.

영원까지 살아야 한다.

 

그게

예수님이다.

이름 만 기독교인이 아니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기독교인이어야 한다.

예배를 감격으로 대하는 경험이 있는 자이어야 하고

예배를 감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 몸부림 칠 의향이 있는 자이어야 한다.

 

지금은 죄인이어도

늘 회개로 깎여 나가고

그 죄가 얇아져

결국

주님으로 인하여 '성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 이어야 한다 .

 

주님 이름 부르고

내가 성인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자가 아니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인하여

속이 녹아나가고

인격이 다져져야 하는 자가 되어 야 한다.

 

 유한한 이 땅의 삶이

썩어져갈 육신 속의

영혼 안에

주님을 받아 들이고

그 분을 구주로 인정하고

그 분이 공급하시는

은혜로 인하여

이 땅의 삶의 조건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오직

주님의 명령에 합당하게 살지 못함이 죄송하여

주님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영적인 행위가 되풀이 되어

결국은

심령 안에

주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하나로 합치가 되는

그런 삶,

심령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권리이자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궁극적 삶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적용

 

1. 회개한다.

  내 핏값이 눈치 채여진다.

  원망하는 마음

  분노의 마음을 내려 놓겠다.

  특히 가까운 자들에게 더욱 마음을 넓히겠다.

 

2. 주님 성령님을 인정하고 느끼도록 노력한다.

   나머지는 다 주님이 결정하신다.

   은혜와 응답.

 

3. 성경 5장 읽겠다.

 

4. 둘째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2년이 되겠다.

   그 아이가 열매가 될 것인지 기도해 본다.

   세속적인 것이 아닌..

   끝까지 믿는 다.

   온유한 아빠가 되겠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엉터리 같은 자의 심령을

끝까지 말씀과 상황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여

어찌 할지 길을 인도하소서.

같이 기도하는 자를 보내주시고

회개할 마음을 주시고

올바로 잡았던 삶의 방향과 결정들이 흐려졌던 것을 바로 잡아 주시고

늘 주님을 기뻐할 마음을 허락하소서.

예수님 도우실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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