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주여 저를 당신의 성령으로 묶으소서.( 렘 2:20-28 ) 본문
제 2 장 ( Chapter 2, Jeremiah )
대문 지붕위에 올려져 있는 갈대.
햇빛을 받아 아름답다.
푸른 하늘이 쏟아질 듯
그들의 뒤를 받치고 있다.
움직이지 못해도
묶여 있어도
초라해도
그들은
아름답다.
그 이유는
그곳에
주님의 어루만지심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멍에는
구속받는 듯 답답할 지라도
그것은
구원의 자유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는
아름답고 자유롭다.
20.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복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무슨 이유든
묶여 있고 제재 받음은 고통이다.
하지만 무조건 풀려남은 '사망'이다.
아버지 어머니의 가르침
스승의 가르침
윗분의 가르침.
그들의 말씀 안에 양육받고 보호받음은 우리의 안전을 위함이다.
무조건 반대하고 벗어나려 몸부림 침은 장래가 없음을 의미한다.
현세대.
세상의 극악이 끝없이 달린다.
그들의 끝없는 타락은 '가르침 못받음'이다.
가르침을 못받음은 그들에게 존경할 만한 대상이 없음이다.
그 대상없음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과도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더 이상
그들이 정보의 매체 속에서 얻는 정보이상의 능력을 가진
윗사람들이 없을 뿐 아니라
윗세대 들의 존경받을 만한 행위를 보이지 못함에도 있다.
세대간의 격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른 들은 어른 들끼리..
어른 들은 외로워지고
아이들은 위험해진다.
어른 들 중에도 성인아이 투성이다.
서로 배우질 아니하고 서로 가르칠 수가 없다.
아이들은 배우지 못하는 상태에서
인륜에 어긋나는 일까지 점차로 서슴치 아니하고 배우게 된다.
그들에게는 한계와 경계가 없어진다.
배움이 있어야 양심이란 자제력이 생기는 데 그것이 없어진 이상
제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진다.
제재는 귀찮고 벗어야 할
멍에와 짐으로 느껴지기만 할 뿐이다.
이제 세대 간의 차이는 갈등을 넘어서
'적의'로 변해가고 있다.
이제 세상은 점차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멍에'와 '결박'이야기를 먼저나와서
사단의 멍에와 결박 이야기 하시는 가 보다 했지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멍에와 결박으로 여긴다는 이야기다.
그 분의 가르침과 그 분의 보여주심이
멍에와 결박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벌써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라는 이름이 있어서
아버지라고는 부르지만
뜨악하고 심지어는 경멸하기까지 하는
세대의 타락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을 입으로는 부르지만
그 분의 말씀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은
주님을 멍에와 결박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왜 생기는 것인가?
순종하지 안함으로 그렇다.
'순종하지 아니함은 사술이다.'
순종하지 아니함은 사단의 술책일 뿐 아니라 사단 그 자체라고 나온다.
그로 인하여 변해가는 인성의 모습은
사울왕의 예를 들어서도 극명하게 나온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떻든가?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는?
사울왕은 불순종 전에는 키크고 잘생긴 청년이었을 뿐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으로 절절 끓던 자이었으나
그의 불순종의 말년에는 미쳐서 '박수무당'을 찾아가는 자고
불면증에 악신 들린 자로 변하고 말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초대 교회의 열렬한 성령충만 자로서
온 재산을 다 팔 정도의 강력한 신앙인이었으나
저주를 받고 죽고 말았지 않았던가?
아담과 이브는 에덴 동산의 그 평강의 시간 이후
불순종으로 두려움과 의심과 의혹과 번민과.................
모든 생각하기 싫은 것은 다 가지게 되었다.
이 순종하지 아니함은
영혼에 평강을 잃게 만든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의 조건은
순종이다.
그 순종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어미의 품에 안겨 소록소록 잠이 든 아이의 평화보다
더 큰 안식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이 삶.
눈을 뜨고 감고
또 눈을 뜨고 감고
.................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
기쁜 것도 잠시고
기뻐도 자신의 자아 만족 후에 오는 허탈함으로 더욱 거북 스러울 뿐이다.
들려오느니 속상한 소식이고
보이느니 걱정 할 일 뿐이다.
남아 있는 것은 '백발' 뿐이고
느껴지느니 '아픈 허리'와 편치않은 골반 뿐이다.
열심히 극복하려
사람을 만나서 대인관계를 확장시키고
산을 다니면서 좋은 공기와
막걸리 한잔을 마시어도
자리에 누울 때는 '회한'과 '번민'과
더 큰 고민거리만 가슴에 안긴다.
친구들을 만나 일시적 회포를 풀어도
비교로 가슴에는 무거운 짐만 늘어난다.
사랑했던 자식들은 바램보다 훨씬 부족해 보이고
잘나가는 듯해도 냉랭하기가 찬바람이다.
걱정없는 자에게도 '사고'의 위험은 상존한다.
걱정없어도 마취일 뿐이다.
가슴의 깎여 있는 빈 영혼은 공허로 가득차고
날이 갈 수록 외로움 만 깊어질 뿐이다.............................
휴일.
쉬려고 머리를 베게에 눕혀도 개운한 시간이 얼마나 오던가?
뒤통수는 당기는 것 같고 심장의 고동은 빨라지는 것 같지 않던가?
쉬려해도 능력없는 남편소리 들을 것만 같이
귀가 간질 거리는 것 같아 자던 자리 박차고 나와 버릴 때는 또 없던가?
정말 구속받지 않고 사는 삶이 자유가 맞던가?
아니다.
구속 없는 삶은 자유가 아니다.
인간은 빈깡통 같은 존재다.
사도 바울께서도 '이 장막 (tent)에 사는 나'라시면서
사람은 육신의 빈 장막 속에 사는 어떠한 존재임을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던가?
그 빈깡통 속의 나를 채우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가 없으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강아지다.
납치 당한 자들이 수년간 창고에서 살면서
개나 소처럼 바보가 되어 버린 경우를
요즈음 신문지상에서 , TV매체 속 '세상에나...^^;' 프로그램에서 나오지 않던가?
구속이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현 세상의 이러한 세대간의 격리 상태는
그 구속의 책임을 지고 있는 '윗 세대'의 비 도덕적이고 존경받지 못할 탓이 없지 않아 있다.
아니다.
결국은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 구속의 책임을 지려는 결과이다.
다시 말하면
온전하신 존재가 우리의 빈 육체와 영혼에
온전한 구속으로 가르치심을 주고
또한 사랑을 주어 왔다면
이 엉터리 같은
소돔과 고모라 같은
지옥도 같은
세상의 어지러움은 없지 않았을까?
이제라도 변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가르치고
자신의 영혼을 이끌어줄 올바르고 온전한
왜곡되지 않은 대상을 찾아야 한다.
그 대상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인간이시었던 '예수님'이시다.
그 분을 다시 영혼의 구세주와 구속자로 다시 받아 들여야 한다.
믿는다는 입으로의 소리 만이 아니다.
영혼이 전적으로 그 분을 구속자로 받아들여 기뻐해야 한다.
기뻐할 준비를 해야 한다.
실제로 그 분은 기쁨이시다.
평강이시다.
그 분안에서의 구속은 영혼의 구원이다.
구원 받는다라는 개념이
기독교인이지만 뚜렷지 않다.
구원 받는 것은 지옥에 가지 않는다라는 것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원받는 것은
그 분의 구속을 받을 결심을 하는 순간
그 분이 내 영혼의 빈자리에 쏟아져 들어오며
내 영혼이 그 분의 기쁨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고 나면 그 빈자리를 채우며
혼돈시키고 혼란시키던 '세상의 원리', 즉
사단으로 부터 자유로와 진다.
사단이야 말로 진짜로 '결박'이고 '멍에'이다.
자유를 가장한 방탕과 끝없는 나락으로의 끌려감으로 부터
영혼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묶어 끌고 가고 있던 지옥 행 인생의 결박이 끊어지는 것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구속하심은
묶임이 아닙니다.
풀려나는 것이고 자유입니다.
주님의 구속은
멍에가 아닙니다.
가벼움입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은 귀찮음이 아니고
보배로운 사랑의 언어입니다.
주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멍에와 결박으로 인식되었음은
모두가 나의 불순종의 탓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주여.
주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며 살아왔던
어리석은 '거짓 자유의 시간'을 후회합니다.
주여
저를 묶으소서.
당신의 성령으로 묶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묶으소서.
주여.
저는 이제 확실히 깨닫습니다.
주님
당신은 사랑이십니다.
주님
당신은 기쁨입니다.
주여.
당신은 자유이십니다.
절 묶으소서.
당신의 성령으로 절 똘똘 묶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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