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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지금도 기다리신다( 스10:1-8 )

주하인 2009. 11. 27. 14:01

제 10 장 ( Chapter 10, Ezra )

 

 

주님

기다리신다

 

늦은 밤

그 곳

하나님의 전에서

지금도

날 

기다리고 계신다

 

이제라도

눈물 쏟으며

내 죄

자복하기를

주님은

기다리신다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죄가 그리 없으셔 보이는

 에스라께서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한다'하신다.

자신의 죄도 물론 있겠지만 그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리더로서 '대신' 자복하는 의미가 더 크다 하겠다.

그러자 진짜로 죄지은 자들의 회개가 일어난다.

 이것을 보며 1909년 산정현 교회- 맞나? ㅜ.ㅜ;; - 대 회개각성의 부흥이 생각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나를 대입해 보면 '최근엔' 난 저리 눈물 흘릴 큰 죄는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어찌 보면

'난 리더가 아니고 난 내것 만 가지고도 버거운 자'라는

개념이 강한 탓일 수도 있다.

 가만히 내가 리더인 자리를 돌아본다.

소극적인 성격 탓과 의사라는 특별한 직종 탓에

난 내 진료파트 만 책임지고 있다.

교회에서도 특별한 중책을 맞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가족을 돌아다 보았다.

가족 중.. 아들들....

그 아이들은 아직 흡족하지 못하다.

아니 조금은 해이한 믿음과 더불어

믿음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열렬한 체험은 하지 못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언저리'와 어쩌면 비슷한 아이들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 난 그 아이들의 죄에 대하여

저리 통회 자복한 적은 있던가?

그리하여 아이들이 내 회개를 보고 같이 몰려와

우리 가정의 대 부흥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그 아이들의 죄일 수 있을 태만함에 대하여

크게 가슴아파 하지도 않았다.

단지 , 그냥 내가 안되니 기도한다는 입장으로 지켜보고 있다.

괜히 야단해 보았자 갈등 만 더 커진다는 생각으로..

그렇다면 내가 에스라님처럼 최소한 가정에서 만이라도

회개하고 이끌어가는 영적 리더로서의 노력을 한다면..

지금 부터 금식 3일하고 저처럼 처절히

회개를 한다면..

아이들은 반응이 있을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것 만 같다.

무엇이 문제이던가?

난, 에스라처럼 존경 받는 리더가 아니었다.

존경받는 가장이라기 보다 힘든 아빠였었다.

그렇다면 오늘 묵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 가정이나 내 삶 주위의 대 변혁을 일으키는 '리더'로서의 위치보다는

' 그들을 위한 중보의 회개' 

' 그들의 죄에 대하여 가슴아파함 ' 을 회복하는 것이

오늘의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신 듯 싶다.

 나..

진심으로 아들의 죄에 대하여 가슴아파 해보았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그 살아계심에 대하여 무지해져가는 모습에 대하여

진심으로 안타까워 해 본 적이 있는가?
솔직히 '모르겠다'다.

난 내 아는 이 기쁨을 분명코 아이들에게 물려 주고 싶다.

둘째는 어느 정도 내려주는 가르침을 했고 같이 성경도 읽고 했다.

그런데 큰 아이에게는 그러할 시기도 , 기회도 없었다.

이제 다 큰 성인에게 기회를 가지기는 더 어렵다는 생각으로

막연한 중보만 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나에게 그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함을 회개하라시는 것이다.

그 아이의 죄에 가까이 서 있음 - 세속적인 재미 -에 대하여

가슴치는 중보와

아빠로서 제대로 인도하지 못함을 가슴치며 회개하라는 말씀이시다.

그 나의 멍한 영혼을

'울며 기도하여 자복하라'는 말씀이시다.

그것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라 회개하는

그 결과를 기대하지 말고 그러라는 말씀이다.

그렇게라도 먼저 회복의 기도를 하면

주님은 '선'하신 분이니 인도하실 것이다.

 


 
2.  엘람 자손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보라.

아무리 죄를 지어간다고 해도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다'고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하여

이리 위로를 하지 않던가?

 '내 아이들에게도 오히려 소망이 있다.'

 

 
4.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6.  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저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근심하여 떡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힘써 행하라.'

 당직 실에서 일어나

무엇인가를 먹으려 하다가 멈추었다.

최소한 말씀에 나온대로 3일 금식은 자신이 없어도

아침 한끼 만이라도 금식 해 보려는 마음이 들었다.

그 금식은 그냥 한끼 굶는 것이 아니다.

아들을 위한다.

그 아들의 죄를 울며 기도하여 자복하는 마음으로 그런다.

현실의 암담함,

어리석어 보이는 저들의 변화없을 것 같은 것,

그럼에도 주님은 '선'이심을 알고는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라'는 말씀은

그러하신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고 회개하고 기도하면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던가?

 


  

 수영을 한 지 이제 두세달 들어선다.

십 몇년 전에 배웠던 수영을 다시 시행하려니

온몸의 뼈 마디가 욱신 거리고 숨이 차서 한바퀴 돌고나서는

얼굴이 빨개져서 '헉헉'대더니

이제 '자유수영'이지만 적응이 되어서 인지

조금은 오래한다.

5바퀴 (250미터) 정도는 한다.

그러나, 옆레인에 누가 쫓아오는 게 흘끗이라도 눈에 띄면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서

빨리가려고 하다보면 또 금방 지쳐간다.

왜 이렇게도 내 속에서는 이렇게 '호승지심'이 죽지를 않는가?

누구에게 비교당하는 게 싫고

어떻게라도 이겨서 으쓱대고 싶은

이 유치지심이 날 그렇게 만드는 듯 싶다.

이 마음은 비단 수영 뿐이 아니다.

골프도 그렇다.

 무의촌 시절, 의사들은 골프에 접하기 쉬운 직업이었다.

지금이야 투명해져서 거의 없지만

십몇년 전까지만해도 접대를 받는 위치가 '의사 '였었기에

골프 연습장에서 연습 만 해놓으면 필드에 나갈 기회는

비교적 많았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나갔다.

연습장에서 잘 맞던 공이

나가기만 하면 '슬라이스'가 나서 바나나 라인처럼

구부러지기 일수이다.

결국, 남보다 더 많이 보내고 싶은 장타의 욕구에 져서다.

폼도 좋고 골프의 원리도 쉽게 깨달았다.

그러나, 나가기만 하면 그렇다.

그래서 골프는 포기했다. ㅜ.ㅜ;;

 어제는 수영하다 말고 갑자기 드는 생각이 이거다.

'내 나이 오십.

 아무리 악을 써도 젊은 아이들과 이길 수는 없다. 

 그들을 위해 욕심을 내려 놓고

 낮아짐으로 그들의 기쁨이 되어보자.'

마구 물길을 잡아가던 손의 힘을 뺏다.

그리고는 천~천~히 수영하려 애를 썼다.

힘이 안든다.

이구........

남들은 그리도 쉬운 이 '유치한 호승지심'이 왜 이리도

나에게는 버리기 어려운지.

 아마도 주님 말씀으로 깨닫지 못했다면 - 약한 것을 예수님을 위해 기뻐하라 ! - 죽을 때까지

온몸을 긴장시키며 살았을 것이다.

 

 리더라는 것.

사람들의 위치가 어떻든

그 들의 성품이 어떻든

나이가 들어가며

크던 작던 공동체의 리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게

인지 상정인 바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낮추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받들어 주는 마음의 자세가 없이는

그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는 공동체는 유지가 되기 쉽지 않다.

 에스라님이 보이는 

저 강렬한 회개.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저리 울며 진정하게 회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자아에 대한 아낌을 내려놓고

자신을 부인하는 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진정한 리더로서의 사랑이다.

주님을 올바로 믿는 나이든 자들의 마땅히 가져야할 심성이다.

 리더로서 대우 받고 싶어하고

어떻게든 자신보다 싹수가 나아보이는 조직원들을 비교하고

그들의 젊은 패기에 기죽어하며

그들을 호승지심으로 눌러가며

강제로 자신의 마음대로 이끌어 가려는 것은

아무리 훌륭한 하나님의 명분을 대어도

벌써 실패의 이유가 될 것이다.

 리더는 '힘을 빼야 한다'

뒤에서 앞서나가는 그들을 기도해주고

힘빼는 모습을 후진들에게 보여줌으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힘이 안든다.

그래야 오래 수영할 수 있다.

그래야 더 빨라지고 지치지 않는다.

그래야 골프에 슬라이스가 나지 않고 비거리도 더 난다.

그럴 때를 '자아의 부인'이라 하고

자아의 부인이 되어야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을 가까이 뵐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더 힘을 내야 한다.

비단 내 자식 뿐 아니라

만나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염려하고 중보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적용

1. 금요일

 아이들의 죄를 위해 울며 기도하여 자복하리라.

 주여.

 그런 마음 주소서.

 

2.  비교를 버린다.

 난, 오십이다.

 더 이상 달콤해야할 자아가 있을 이유가 없다.

 칭찬받고 앞서 나가봐야 쪼글거리는 육체일 뿐이다.

 잠시다.

 

3. 힘을 빼자.

 긴장도 ..

 비교도..

 욕심도..

 다 내려 놓자.

 

4. 성령께 간구하자.

 흐름은 성령의 원리시다.

 그 흐름에 나를 맡긴다.

 십자가 앞에 예수께 가자.

 기도원 간다.

 

5. 성경 일곱장 읽는다.

 

 

기도

 

주님.

저도 에스라의 마음을 주세요

그 분의 자신을 위한 회개 같은 사랑의 중보를 허락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게 하소서.

특별히 제 아들의 답답한 마음을 느끼게 하시고

그들의 주님에 대하여 멀어짐을 울게 하소서.

대신 자복하게 하소서.

주님.

성령으로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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