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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닮아가려다가 왔습니다 ( 행 21:27-36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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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닮아가려다가 왔습니다 ( 행 21:27-36 )

주하인 2007. 11. 1. 13:00

제 21 장 ( Chapter 21, Acts )

우리 주님

오늘

날 

부르시면

아무 회한 없이

달려갈 수 있기를..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어제의 회합이 성대히 끝난 후

일주일.(이레= 7일)

 

미리 성령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다 아는 바울께서

1주일 간을 보내시는 시간 들은 어떠 했을까?

 예수께서도 십자가 매달리시기 전에

피땀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두려움을 주님께 바친 후에

담대히 오르셨다.

 

 바울님의 그 일주일도

아마도 그런 일주일 이셨을 것이다.

 

 엊저녁

일찍 퇴근하는 날인 수요일이지만

수술이 늦게 있어

퇴근하여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이려 마음 먹고 있는 사이

병원에서 이사장님 호출이 오셨다.

 11월 9일 있을 진료 협력센터 건으로 오라신다.

거의 없을 호출에

늘 부정적인 생각 먼저 하는 나는

아니나 다를까

속에서 나쁜 결론 부터 치 달으려 한다.

급히 오라는 호출에

시간은 없어서

얼른 옷을 다시 주어 입고

머리 속으로 기도를 하며 갔다.

 두려울 때

내 속은 언제나 헝클어져 뒤죽 박죽이다가

막상 일을 처리해야 할 상황에는

'에라~'하고 일을 해치우는게

예전 부터 습관화 되어 왔던

어떤 행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면 일은 자주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꼬여가고...

 자꾸만 나쁜 생각으로 꼬여가려는 머리를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놓았다.

'주님 아시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안정되고

정말 현실적인 문제에 대하여 생각이 난다.

 

 최근 자주 경험하기 시작하는

기도의 위력

 

 마음이 평정이 되고

명경지수처럼 맑아진다.

이사장님 방에 들어서서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있다.

늦은 시간임에도...

역시,

필요없는 걱정은 사단의 영역이고

주님은 그 걱정을 기도하는 데 쓰도록 하시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더 좋은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감사하신 그 분.

 

 바울님께서도

어느 정도의 불안함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께서

그 모든 것을 다 알면서

일주일이란 시간을 채운 후에

회당에 나타난 것은..

그의 마음에 평안과 평정이 자리 잡은 상태를 의미한다.

 성경 구절의 표현이

아래에서 곧 나오다 시피

필요하면

아주 정밀하게 묘사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주의 깊게 묵상하여야 튀어나오는 게 있다.

오늘, 보이는 모습이 그렇다.

 

 어제 묵상에

멋지게 차려입은 사도바울 -ㅎㅎ -처럼

오늘은

아마도 흰색 도포라도 바람에 날리며

회당 한쪽에

그림처럼 서서

이제 곧 있을

어리석은 자들의

각본 하의 움직임 -각본에 속해 있는 줄도 모르는 게 어리석은 인간들이다.   세상에 눈이 고정되어 있으면 자신이 다 한줄 착각할 뿐이다.    그냥 주님의 스토리에 한 부품이나, 엑스트라 역이면서도.. - 을 오히려 흥미로운 기대의 눈으로 , 안타까움으로 쳐다보게 되었을 줄 모른다.

 

 그는,

벌써

그의 고통을 통하여

마지막으로

전세계를 향하여 퍼져나갈

복음 전파의 끝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 오르시고 나서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것처럼...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29.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이것 보라.

각본대로 움직이는

꼭둑각시들의

헛된 움직임들을...

 헛된 성질을 부리고

헛된 몸놀림을 하고

헛된 교만함과

헛된 자기 도취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며

헛된 망상도

그들의 영혼 속에 마구 들끓고들 있을 것이다.

 

 영의 눈으로 보면

그들

깡통같은 육체에 고정된 삶을 사는 불신자들의 영혼 속을

마구 뛰어노는

자가당착의 마귀들이 보이는 듯하다.

 

선하다.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그 ..

사도 바울에게는

끌려나가고

문이 닫히는 현상은

하등 의미가 없는 현상일 지 모르지만,

묵상을 진행하고 있는

이 어리석은 주하인의 앞에

갑자기

커다란 성문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끌려 나가며

잠시 나도 모르게 뒤를 바라보는 순간,

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훨씬 안전할 듯한 그 문이..

'철~커~~덕'하며

닫히는 게 보이는 듯도 하다 .

 

순간,

얼마나 많은 회한과

다시 돌아가고픈 간절한 바램이

머리 속을 스치는지..

제발,

제발

다시 한번 열려서

이들의 손에서 벗어나 저 곳으로 뛰어 들어갈 수만 있다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처럼 상상이 된다.

 만일 저게

내 죽어

주님 앞에 갈 수 밖에 없어

육신과 연결되어 있어

이 육신 장막으로 다시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끈이 잘린 현상이라면,

죽음이라면...

 

 

 

 

31.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이제

천부장으로 표현된

백보좌 심판대 앞의

그 예수님이

 

32.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천군천사 호위하고

내 앞에 나타나신 다면..

 

 바울님께서는

아마도

멱살이 잡혀서

질질 끌려 가는 듯 해도

힘없는 어린 양같이

그냥 가만히 있었을 것만 같다.

 이 바울님은

주님 앞에 처절히 서 있는 삶을 살았기에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을 것이고

그를 도울 천부장 같은

심판관 예수님이 나타나셔도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요동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빙긋이 웃지는 않지 않았을까?

 

 이러한

주하인과

바울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심판이 시작이 될떼

심판관 예수께서

' 주하인

 넌 누구며

 과연

 무슨일을 하다가 왔느냐?' 물으신다면

과연 난 무엇이라 얘기할 것인가?

 

 

 난 누구인가?

 

난 아들이다.

난 아버지다.

난 남편이다.

난 의사다

난 직장인이다.

난 형제다

난 친구다.

난 기독교인이다.

난................................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하였는가?

 

 아들로 ..

잘한 것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어긋나지 않았다.

공부도 최대한 잘했고,

효자노릇 하려고 고추 널어드리고, 방앗간에 다녀오고

애들 놀러가는 데 따라가지 않고 ....

 

 아버지로 애들 잘 가르치려고 아침 부터 뼈 빠지게 일했다...

그 아이들 빗나가지 않도록 혼내서라도 잘못된 것 막았다.

................

 

의사로 잘하려고

열심히 세미나도 나갔고

최대한 친절하게 하려고 애도 썼다.

 

 형제로서......

 ....

 

 사회인으로서

남들에게 손해 안끼치려...

.........

 

 기독교 인으로서

전도 몇 ..명했고

단기선교 쫓아갔다와보고

철야 예배 열심히도 해보고

남들 앞에서 찬양도..

남들 눈치 안채이게 불쌍한 사람 도와도 줘보고...

.......................

 이렇게 했다.

 

 무슨일을 했냐고 또 한번 물어보시면

부끄러운 일이 너무도 많다.

 아들로서 불효했고

아버지로서 다정하고 다감하지 못했고

의사로서 실력이 있지 못해서 알게 모르게 간접적 손해를 입히기도 했고

기독교인이라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행실로서 유익을 보이지 못해

구원받는 자 한명이면

나로 인해 2명은 더 실족했을 수도 있지 않겠나...

   .........................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무리 가운데

어떤이는

자신의 논지를 충분히 하며

그 사도 바울의 잘못된 점을

냉철하게 얘기 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그의 불의함에 대하여

그 사람 특유의

단순 명쾌한 호남아적 성품으로

소리 질러 의견표출을 했을 수도 있다.

어떤 이는....

 

 다 옳다.

그러나, 다 Noise다 .

다 소동이다.

 

 이 소동을 이루는 소리들을

천부장은 어떻게 받아 들였는가?

하나도

의미있게

신중하게

들어주려 하던가?

그냥 소동으로 받아 들였다.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라는 표현대로

모두 옳은 말 인듯 하지만

그냥 버려버려지는 말들로 취급했다.

하나도 의미를 두지 않았다.

 

 왜 그런가?

그것은 생명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늘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도 쓸모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면 누구여야 하는가?

 

주님 안에서 아버지고,

주님 안에서 아들이고 ,

주님 안에서 ........이어야 한다.

 

그게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주께서 옳다고 들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내가 지금껏 해왔던 옳은 일들이 옳지 않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토록 못해왔다고 자괴감 가지고 있던 일이

그리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이 땅에서의 실적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의미인가?

이 땅에서의 실패는 아무런 의미가 정말 없다는 말인가?

 

 오랫동안

내 속에서 들 끓는 생각과 소리들이 많았다.

'난 이렇게 해야 한다. '

' 난 이렇지 못해서..'

' 난 앞으로...'

' 난 이렇기에.. '

' 난 이럴거야'

 

 한마디로 소동이다.

어떠한 분의 말씀대로

분주함은 사단의 소동이 아니고

분주함 자체가 사단이라는 말씀처럼..

단순성을 훈련하는게

주님 앞으로 더 가는 지름길이라는 어느 분의 말씀처럼..

 

위의 질문은

소동을 멈추고

단순하게 생각해 보라는 의미로 보인다.

 

' 난 누군가?'

 주님 십자가로 인하여 값없이 구원을 받은 자

 주님의 백성.

' 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주님을 닮아 가야 한다.

 

 어떻게 닮아 가는가?

세상의 소욕은 버리고

주님의 말씀이라면

가능하면 준행하려는 자.

그게,

선교자로서의 원하심이면 선교자로

가르치는 자로서의 모습이시라면 또 ..

현재의 모습에서 개인적인 정화가 목적이시라면 또 그렇게............

문제는

이 과정에서 조차도

'실적'이나 '성과'에 대한 바램이

주님 뜻의 온전한 이해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주님을 닮아간다는 것.

그것은

하루하루

주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려다가 하나하나 성공해나가는 것에 감사하고

실패하는 것에 대하여 회개하고 기도하고

그 성과는

주님의 뜻에 따라 허락된 결과물임을

그저 가볍게 인식하고 살아

인생이 가벼워지고

인생의 풍파에 상관없이

주님의 평강으로 기쁘게 되어가는 현상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느 눈이 보이지 않으시면서도

성공한  분의 간증을 예전에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어떻게

안보이시는 눈으로 그런 자가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그냥 손잡고 인도하는 대로

조금씩 노력하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는...

 

그렇다.

내가

현재

어떤 모습이든.. 

매일 매일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준행할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인가 닮아져있는 주님의 모습을

내 안에 발견하는 것.

그것이 주님이 나에게 오늘 물으시는

'너는 누구냐?

 넌 무엇하다 왔는가?'라는 답이 될 것이다.

 즉,

현재의 내 위치

내 모습

내 달란트

.........

그 모든 것은

주님이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이란

한편의 연극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 도구, 소품을 이용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엮어가는 것이

내가 해야할 역할인 것이다.

무협지나 활극은 겉 모습의 요란함이 재미를 주지만

주님은 나의 삶 속에서 '인간극장' 같은

매일의 삶의 향기를 보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적용

 

1. 성경 다섯 장 읽겠다.

 

2. 난 주님 앞에 서 있는 자이다.

 

3. 내 실적과 부족함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겠다.

 

4. 지나친 장래의 목표는 주님께 맡긴다.

 필요하시면 주님이 인도하실 것임을 믿는다.

 

5.  Vision은 주님의 뜻대로 에 둔다.

 

6. 백보좌 심판대에 웃고 갈 수 있는 바울과 같은 자가 되기를 소원한다.

   바울은 선교사로서의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래서 , 그는 주님 뜻대로 정화되었다.

   난, 지금의 모습에서 매일 최선을 다해 살다가 가는 자가 되기를 소원한다.

 

 

   

   

 

 

기도

 

 주님.

오늘 사도 바울의 모습에

절 가져다가 대입하니

두려움이 엄습하려합니다.

그 분과 같은 담대함이 있을 수가 있을까

죄송하기도 합니다.

두려울 상황이 엄습하여도

과연

문이 닫힘을

초연히 쳐다볼 지혜는 남아 있을 수 있는 자가 될 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주여

주님이 오셔서

제 앞에 좌정하시어

너는 누구냐 물을 때

확실히

저는 주님 앞에 늘 서있던 자 올시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을 늘 인식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면

어떤 자리라도

주님 뜻 안에서 잘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소서.

주여.

아시지요?

제 속을요?

제가 어떤 면에서 힘들어 하고

어떤 면에서 분주해하고

어떤 면에서 당황해 하는지도요?

주님

주 앞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과 닮은 삶이 되게 하여 주세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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