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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임재 안에서 나 죽이기(요 3:22-36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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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임재 안에서 나 죽이기(요 3:22-36 )

주하인 2008. 11. 8. 08:44

제 3 장 ( Chapter 3, John )

 

이 아기는

엄마 신발 신고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걸

뚜렷이 손에 잡고

기뻐라 뛰어가는데...

난 ,

주님이 원하시면

날 버리고 기쁘게 뛰어갈

준비는 되어 있던가?

과연?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 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젊음을 바쳐서 최선을 다한 일을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주위 사람들이 와서

'사람이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는 말을 들었을 때

과연 나라면 어땠을까?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한은 한마디로 정리한다.

'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

 맞다.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주님이 답이시다.

주님이 아니면 이해할 수가 없다.

 주님이 흥하고  난 죽어야 한다.

일생 모두가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어야 한다.

그 분을 위하여 포기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가?

자기 부인,

나 죽이기.......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얼마나 많은 생각과 걱정, 염려, 허탈감, 외로움,자괴감 등.. 원치 않는 감정들이 달라 붙을 것인가?

 오직 '주님 십자가가 전제가 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만 가능한 이야기다.

 

 아침에 일어나

칫솔을 들고 세면실에 들어가서려니

문득 오늘이 토요일임이 생각나고

또 내일 일요일, 교회에가서 예배드리고 찬양한번 인도하고 나면

새로운 일주일이 시작이 되고

또..........

변화 없음의 단조로움이

무엇인가 해야할 조급함에 빠지게 하려 한다.

 무엇인가 또 하면 또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사람들 사이에 어울려서 많은 일을 벌이고

또 해치우면 또 행복할 것인가?

........

생각이 꼬리를 물려 한다.

 이제 습관처럼 되뇌이는 성경의 말씀을 '선택'하고

주님께 집중하였다.

 내가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다.

그 분을 위하는 것은 '약한 것들과 능욕과 ... 를 기뻐하는 것이다.'

기뻐하는 것은 '약해질 때 강해지는 것'이고

그 이율 배반적 논리가 '내 자아가 약해지면 주님이 내 영혼을 쉬이 움직이실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라는 사실을 내 영혼에 주지시키고

그외의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주님께 가벼운 기도하고 난 후에야

마음이 가라 앉음을 느꼈다.

 

 정리가 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루고 가는 과정이 아니다.

이루고 가거나 이루고 가지 못하거나

이름을 세상에 남기거나 남기지 못하거나

그것은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이나 의미가 없다.

사람 들 사이에서 많은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거나 안주거나

그게 의미가 없다.

어쨋든 죽으면 끝이니까.......

누구나 다 그랬다.

부처도, 마호메드도 열심히 영향을 남기고는 갔지만

결국은 이 땅에서는 먼지의 존재로 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나고 늙고 죽고 또 ........를 되풀이 하는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떻게 해야 의미가 생기는가?

 

 아침의 나에게는 쉽게 답이 달려져 온다.

' 매일의 삶을 주님의 뜻이라 생각되는 것을

  아주 조금씩이나마 삶속에서 적용하면서

 주님 뜻 안에서 남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다 가는 것'

그것이 의미다.

하지만,  본래 부정적이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품의 내가

이렇듯 관념적 생각을 쉽게 받아 들일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난 어떤 확신 같은 것을 기쁘게 내 영혼에 받아 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체험'이다.

주님의 말씀 앞에 서려는 노력은

나에게 수많은 매일의 영적 경건함과 평강의 기쁨을 체험토록 허락하셨고

기도와 예배후의 후련한 통쾌함 - 엊저녁 기도원 문을 나서면서도 그러한 통쾌함을 느꼈다.. 역시.. - 즉,

성령의 내 영혼의 운행함의 체험은

그러한 확신을 실제적 확신으로 가져오게 하였다.

 

 며칠 전 읽은 '예수님 처럼'에서 나온 '프랭크 로바크'라는 교사이자 선교사님 - 세계 문맹 퇴치에 최고의 영향을 미친 필리핀 선교사님으로 미국 우표에 등재되신 유일한 선교사님 !- 의 매 분, 매 시간 주님의 임재를 느끼기 위한 노력에 관한 글을 읽고 감동한 적 있다.

 어쩌면 그 분의 그 노력은 성령의 감동을 철저히 체험하고

그 감동을 놓치지 않기 위한

즉, 이 땅위에서 주님의 임재와 동행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에 지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인터넷을 뒤져 아래에 적어 놓았다.)

 

 큐티를 위해 묵상집을 들쳐 보았다.

세례 요한의 모습이 보인다.

인생의 최 절정 사역기가 주님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그 분은 이제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져야할 운명에 봉착해 버렸다.

사도의 제자들이 와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감을 보고한다.

 만일 , 이것이 나의 사역이라 생각하고 전신을 투자했을 일이라 상상을 하였더라면

많은 허탈감이 있고 당황스러움도 있을 시점..

우울증에 빠져도 확실히 빠질 ..

더 이상 인생의 소망이 사라질 것 만 같은 이 상황에서

세례요한은 오히려 기뻐한다.

그 기쁨의 이유가  놀랍다.

아침에 잠깐 생각했던 것을 답을 주시니 말이다.

 

 그 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된다..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일은 흥하여야 겠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 '라고 한다.

'성령'에 대한 말씀도 하신다.

 

 그의 인생 철학은 명료하다.

'주님이 주시는 대로 산다'

'주님을 위하여서 나는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 '

'성령님이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 다.

 

 그래.

머리 속으로는 주님의 뜻대로..라는 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 해왔다.

 하지만, 난 잘 되던가?

내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자,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밖자고.. 그리도 노력했지만 그게 되던가?

 오랫동안 주님 말씀 앞에 내려놓고자 노력했지만

 내 영혼에 상처라 이름 붙어 있던 부위의

화살 대는 빠진 듯하고 겉 살은 붙은 듯하지만

아직도 건드려 지면 여지 없이 '분'으로 터져나오는 깊은 아픔이 숨어 있고

잠깐 만 스쳐져도 깊은 '외로움'은 스물거리면서 기어나오려 하고

비슷한 상황이 연상 만 되어도 '좌절감'이 터져나오는 등

나의 나를 부인하기는 아직도 너무도 요원한 상태가 아니던가?

이러한 상태에서 어찌 요한 처럼 '네 것을 내려 놓으라'는 시기적 압력에

하나님의 뜻으로 나를 부인하고 기뻐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성령이 답이다.

예배하고 난후 느끼는 놀라운 평정감과 통쾌함은

진실과 비진실 사이에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가를 느끼게 해준다.

 세상의 삶 - 사단으로 예표되는 - 과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 가기 위한 과정을 보여 주시고자 하는 진실의 상태 - 성령이 임하시는 상태 - 사이에서 우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육적 물질 적인 것을 잡으려 노력할 때는 그렇게도 흔들리던 것이

주님의 안에서 예배 만 드려도 금방 평강으로 바뀐다.

 이, 진실이 아닌 세상의 거쳐가는 삶 속에서

주님의 임재하심을 늘 느끼고 살아가는

요한같은 삶이나 프랭크 바로크나 다른 영적 거장들의 삶을 통하여 들여다 본

성령이 늘 함께하시는 '진실의 삶'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아침의 불안해 하면서 맞은 '거짓 속의 일상'의 삶이 지속이 되면

그것은 수천 수만년을 되풀이 해오는 이 땅위의 다른 사람들과

또 하나도 차이가 없는 그러한 일생을 살다가

한점 먼지로 영원 속에 묻혀 버리지만

주님의 말씀 앞에 나를 다잡고

주님 성령님의 운행 하심 속에 일순간을 맡겨 버리면서

우리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자'로서 잡는다면

훨씬 진실에 가까운 삶을 살다가 가게 되는

똑바른 삶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정신을 차리기 힘이 들기는 한다.

또 진리가 아닌 세상의 허상의 삶에 밀려 밀려 살다가

겨우 자리 잡은 요한의 그것 과 같은

'주님은 내 속에 승하고 난 망하는 ' 즐거움을 놓칠까 겁이 나기는 한다.

 

 이제 토요일 오후.

다시금 또 한번의 쳇바퀴를 돌리기 보다는

주님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주님의 뜻 안에서

나를 부인하며 남을 위하여 기쁨 가운데 살 수 있는

일주일이 되기를 소원한다.

 

 

 

적용

1. 주님을 매시간 인식한다.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을 예수님의 모습으로 보려 한다.

  주님께 매분 물어 본다.

 

2. 자기 부인을 연습한다.

  내 것이 아닌 것은 욕심 부리지 않는다.

  말씀을 순종하려 애쓴다.

  아픈 마음이 있어 도 내려 놓는다.

 

3. 성령을 간구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지만 간구할 대상이기도 하다.

  주여.. 저에게도 성령을 충만히 주소서.

  늘 주님 성령님의 운행하심을 느끼려 노력한다.

 

4. 아픔, 상처.. 덜 아물었다면 그 마져 주님 성령님의 만져주심을 기도한다.

 

5. 성경 여섯 장 읽겠다.

 

6. 아들 들의 성령 충만을 기대한다.

  둘째 .. 시험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지혜의 성령께서 함께 하시라고..

 

 

 

 

기도

주님.

산다는게 왜 이리도 다양한 생각을 주는 지요...

욕심을 바탕으로 보면 한없이 난 부족하고 결핍덩어리이고

무엇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의 관념으로 보면

난 정말 더 열심히 코피 터지도록 몸부림치어야 하지만

주님,

주님의 뜻 안에서

그냥 내려 놓길 선택하고 있으면

그 또한 아무 것도 아닌 것임을 깨닫습니다.

주여.

주님의 성령으로 날 인도하시어서

주님 안에서 주님의 평강이 주시는 기쁨이 좋아서

주님.. 이웃에게 더 잘 할 수 있게 하시게 하시고

주님 이 허락하신 달란트가 이래서 그냥 날 즐기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

주님 부르시는 날이 되시면 그냥 주님의 날이 다되어서 그냥 갈 수 있게 하시고

이후의 삶이 궁핍이 올지 모르더라도

주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리 받아 들이는

그러한 내 인생의 후반이 되게 하소서.

주님.

하지만, 주님은 아시는

내 조그만 바램들은 있습니다.

아시지요?

더 이상의 아픔으로 아프지 않게 하시고

주님

받아 들일 수 있으면 받아 들이는 마음을 주시고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면 바꾸어주소서.

기도합니다.

주님.

들어 주세요..

성령님 강력하게 제 안에서 운행하셔서

주님의 뜻 안에서 내 것은 쉽게 기쁨으로 버릴 수 있는

요한 같은 자

로바크님 같은 자가 되게 하소서.

날마다 쉼쉬는 순간 마다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소서.

그래서 인생의 의미.. 찾기보다는

가만히 살다보니 찾아지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프랭크 로바크 ) -------------------------------

 
 "어떤 날의 어떤 시간이 완전하게 되고 안 되는 것은 단지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가 그 시간 전체를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시간 내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기다리

며,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과 똑같이 하려고 애쓴다면 그 시간은

완전하게 됩니다".

+++++++++++
  하나님 임재 체험하기

1. 창문을 열며, '올해는 내 생애 최대의 해'라고 외쳐라.
2. 복종이 첫째이며 마지막 의무!
재작년에는 15분마다 주님의 뜻을 물었으나, 올해는 발걸음마다 묻는다.
"하나님, 지금 뭘 바라시죠?
3.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느껴라..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에 예속되기를 원하라.
4. 매 순간마다... 발걸음마다, 복종하고, 응답하고, 항복하고 '그의 사랑'을 그리워하라

.
두 가지 불타는 갈망을 가져라. 예수를 닮기와 주님의 활에 응답하는 바이올린이 되는 것

이다..

+++++++++++
 이 세상의 운명은 우리들의 기도에 따라서 작정될 것이다.

+++++++++++

1분마다 하나님 생각하기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프랭크 로바흐(Frank Laubach)는 문맹 퇴치 운동기구를 설립한

사람이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

의 일기에는 그가 일생 동안 전혀 다른 목표를 위해 노력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의 임재를 끊임없이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로바흐의 하루 일과

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려고 노력하면서 시작했고, 다른 잡다

한 생각과 산만한 마음은 과감히 떨쳐버렸다.

"그것은 의지의 행동이다. ... 나의 관심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어떤 날은 그와 같은 정

신 상태에 도달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했다." 그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물살을 거꾸로 헤쳐 올라가기 위해 노를 젓는 사람 같았다. 나는 차분하게, 그러면

서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귀를 기울였고, 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사

람들의 옷이나 신체, 또는 마음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노를 잡고 있는 손의 힘을 빼면 그 순간 나는 표류하고 아래로 흘러내려갔다. '내버려두

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다'는 말은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맞는 말이 아니다

. 나는 '하나님을 굳게 잡으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의지에 바탕을 둔 행동이 있어야 한

다. 나는 그렇게 쉬지 않고 노를 저으면서 영적인 근육들이 발달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로부터 일 년 후 로바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처럼 단순한 연습은 오로지 차분한 의

지의 활동만을 요구한다. 일정한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런 행동들은

마치 습관이 몸에 배듯이 점점 쉬워진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삶은 천국으로 변한다."

로바흐는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몇 초에 한 번씩 하나님을 마음에 되새기는 것이었다. 그

렇게 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그의 의식 속에 '잔상'처럼 남아 있게 되었다. 로바흐는

그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일종의 '시간 게임'을 했다.


"15분이나 30분에 한 번씩 나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먼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순간, 내면의 소리에 의식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

했다. 끊임없이 '아버지, 뭐라구요? 제가 말하기를 원하세요? 제가 지금 이 일을 하기를

원하세요?"

로바흐는 일 분에 한 번씩 하나님을 마음에 떠올리는 데 성공했고, 그 간격은 점점 줄어

들었다. 그의 일기에는 매일 그가 하나님을 경험한 실제 백분율을 어림잡아 기록해놓았다

. "50% 하나님을 의식함. 약간 의지적인 거부감이 있었음." 어떤 때에는 75%, 그리고 간

간이 90%에 도달한 적도 있었다. 그는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심란한 마음이 하나님의 자

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의 연습이 자신의 영혼을 점점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를 만

날 때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상대방을 위해 기도했다. 전화를 받을 때 자신에게 속삭였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와 이야기하려 한다." 거리를 걸어가거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를 기다리며 서 있을 때,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소리없이 기도했다.

로바흐는 바쁜 현대 생활을 신비주의와 결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가 수도

원이나 수녀원에 들어가 은둔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교육대학 학장을 역임했고,

신학교 설립을 도왔으며, 아프리카의 부족들 속에서 사역했다. 가난한 이들을 섬겼으며,

문맹 퇴치를 위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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