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여인의 진실(요 4:25-38 ) 본문
제 4 장 ( Chapter 4, John )
숨어 있는
외로운 흰새처럼
부끄럽기만 하던
나의 영혼.
주님은
흐르는 물처럼
내 곁에 다가 오셨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주님 내게 오셔서
'내가 그로라'라 하시면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는 아마도
이 여인처럼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리고
많이 흥분할 것 만 같다.
이 사람 저사람 붙들고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이것봐라.
내가 만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너희도 나와봐.
어찌 그 분을 못뵙는 불행을 겪으려고.......
소리소리 지를 것이다.
그 만큼 그 분은 '전율'이자 '환희'다.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바라기는
내 소리를 듣고
내 감격의 열기를 듣고
사람들이 내가 만난 그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
진심으로...
몇 마디 말을 건네지 않았음에도
여인의 영혼은 뒤집혀 버렸다.
그의 숨통을 옥죄오던 고리같던 영혼의 막힘은
주님을 만남으로 대 변혁이 일어났다.
그 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내가 그로라'하지 않아도
영혼의 깊은 떨림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
그 분이 말씀으로 이랑을 일구는 밭갈이처럼
그녀의 영혼을 뒤 엎더니
드디어
하나님이신 그 분이
마지막으로 갈라진 바위틈으로
정을 박아넣듯이
'내가 그로라'하시자 마자
여인의 영혼은 벼락을 맞은 듯이
놀라운 감동과 전율로 그 영혼이 폭팔하고 말았다.
실로
몇마디의 말과 몇 분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여인은 수십년의 고뇌와 갈등과 갈증이
한순간에 '환희'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물동이로 대표되는
그의 삶의 도구,
그녀의 고뇌의 상징을 버려두고서,
- 아니,실은 잊은 것이다.- 달음질 치듯이 마을로 내려갔다.
가서는
그 감격을 잊기 전에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 자신의 감격을 체험토록 한다.
말로 전한다.
아니, 아마도 노래처럼 음율이 섞여 들어갔을 지도 모른다.
그의 소리는 어딘지 모르는
강한 호소력이 느껴지고
그러한 호소력은 평소 그녀에게서 볼 수 없었던
거의 기적적인 일로
그러한 그녀의 행동을 보고
사람들은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하여, 주님 예수님에게로 몰려간다.
그 분,
예수님은
선인장 같던 내 마음 밭에
이리
환희의 꽃망울을
터뜨리고야 마셨다.
나,
예수님 믿고 10년.
순간 불면증이 사라지는 등, 놀라운 체험과 더불어
그 보다 더 놀라운 뿌듯한 기쁨이 시작되고
말씀을 사모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로 커져가는 영혼의 샬롬이 실체적으로 다가오게되고
그러한 현상이
글이 써지고
운율처럼 시가 내 속에서 나오게 되고 - 지금은 아니다. 억지로 쓰려도 안된다...이상하게.ㅎㅎ-
시간이 지나면서 생전 배워보지도 않던 '사진'이 이쁘게 찍혀지고
찬양을 인도하게 되는 자리에 밀려 서게되며
기타를 치게 되고.............
참으로
저 사마리아 여인의 감동이
나의 그것과 다름 없음을 '공감'하게 된다.
그동안, 어찌보면 바보처럼
세상의 것들을 조금은 도외시 하면서 살면서
한편으로 손해도 많이 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어려운 삶을
정도로 걷게 하면서
삶을 그럭저럭 유지하게 된 것은
물항아리를 잃어버린 이유가
결단을 넘어서는
감동에 의한 '잠시의 잊음'이기에 그런 것 인 듯하다.
그래
여인도 게제의 모든 항아리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사도처럼 행동했으면
더욱 영적 성장이 빨랐을 수도 있겠지만
어디에도 그런 소리는 없다.
그녀의 물항아리- 세상적인 삶-는
그녀에 의하여 잊혀졌지만 곧 다시 찾으러 오게 될 것이다.
얼마 뒤에 다시 물은 여인에 의하여 길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물을 길으러 오는 여인의 모습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 분명하다.
휘파람을 불 줄 알지 모르지만
휘파람을 불고 싶어 입을 삐죽이지는 않았을까?
괜히 알지 모르는 곡조의 찬양이 흥얼거려 졌을 것이다.
오늘 주시는 말씀의 레마는 이런 것 같다.
자꾸만 말라져 가는 것 같은
주님의 기쁨을 회복하라....
그것은 열심을 다하는 것도 있지만
그 보다 주님의 말씀 앞에 조금은 더 겸허하게 서야 하고
주님의 말씀이 가장 우선되어서 아침을 열어야 함에도
어리석은 주모는 , 바쁨을 빌미로 한가해질 때에야
주님의 말씀을 습관적으로 들추고
끄적거리는 것 같이
블로그에 들어와 말씀을 적고 나가곤 하였다.
그것은 감동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내 글에서
'시'가 사라진 것이 어쩌면
내 영감의 소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감동스럽다.
잠시
여인의 마음을 추정하여
묵상을 진행하는 동안,
그녀의 감동어린 망각증세를 고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어찌 몇 분 만에 집으로 뛰쳐 돌아가게 되었는지?
그녀가 왜 까맣게 물동이를 잊었는가?
그녀가 집으로 뛰어 돌아가는 동안 , 어떠한 생각들이 머리 속에 춤을 추었을 지........
가슴에 느껴진다.
주님은
그 감동을 회복하시길 바라시는 것 같다.
현실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실체적으로 만나길 원하시는 듯하다.
기도해야 한다.
말씀을 더욱 가까이 해야 한다.
찬양을 통해 내가 가진 기쁨을 전해야 한다.
사진은 내 자랑이 되면 안된다.
주님을 기뻐하며 맑아진 눈으로 세상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블로그는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사람들을 긍휼히 볼 눈을 가져야 한다.
사마리아의 다섯번 결혼한 여인도 주님을 만남으로
성경에 등재되었다.
누구도 핍박할 자격이 나에겐 없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그 분
사마리아 여인의 전율어린 흥분을 보고 있습니다.
물동아리로 대표되는
세상 것과
그를 잊어버릴 강력한 진실을 느낍니다.
전 압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행운아 입니다.
그래서
미약하나마
내가 가진 달란트를 통하여
조금이라도 세상에 내 놓고 싶어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저 올시다.
약간의 찬양과
글과 그림으로
내 위치로 주님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주님의 기쁨을
여인처럼 되뇌이고 소리치고 싶습니다.
지금도
제 영혼 깊숙이서
주님을 향하여 소리내고 싶은 뜨거운 열정이 스물거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주여.
막히지 않게 하소서.
그동안 선하게 습관 들여온
나의 영적 행동이
비틀어짐이 없도록 하소서.
주여.
그리고 절 막아온 여러 장애들을 없이 하소서.
주여
이 후의 삶에도
내 기쁨,
여인의 열정 같은 주님에 대한 내 사랑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우소서.
추수를 할 때
추수를 할 수 있도록 하소서.
물동이 놓은 여인의 감격어린 얼굴과
그녀의 운율 섞인 감탄의 외침 같은
뜨거운 기쁨의 찬양이
제 입에서 나오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을 뵌 기쁨을 토해내기 위해서
주님을 만난 내 영혼의 격정을 토해내게 하소서.
제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를 통해서
죽도록 주님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잃어버린 물동이는 찾을 수 있으면 찾게 하시고
더 좋은 것으로 주시려면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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