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돌항아리 주하인 ( 요2:1-12 ) 본문
제 2 장 ( Chapter 2, John )
내 삶에
주님 ~
늘 함께 하셔서
저로 평안하게 하소서.
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모든 인생의 일에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주님 예수님도 계시다.
주님은 어디에도 계시다.
주님을 적극적으로 내 삶에 초대해야 한다.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포도주가 모자라면 포도주도 달라해야 한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기도하고 말씀드리고는 받을 줄 믿어야 한다.
단, 그게 '정욕' 즉, 사사로운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돌항아리 같은 내 마음.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그 항아리에도 물을 채우고 - 내가 해야 한다 - 나서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기대해야 한다.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물이 포도주로 변할 것을...
돌항아리 같은 내 마음에도 기도하면 포도주 같은 놀라운 기적이 담길 수 있다.
어디에 가도 점차로 썰렁해진다.
교회 들은 수요예배를 안하는 교회가 늘어나고
금요 예배는 접은 지 오래된 교회가 많다.
한참의 시절에 성공자의 뒷담에는
꼭 새벽을 기도하던 어머니의 일화가 많았는데
새벽 예배 조차도 안드리는 교회도 많다.
기도원에 올라갔다.
작년 이 맘때 까지는 ' 입시를 위한 예배'에라도 사람이 꽉꽉 찼었는데
올 따라 썰렁하다.
매스컴에서 기독교를 맹공격 한 탓도 있고
금융이다, 석유파동이다... 전 세계적으로 뒤끓는 이슈가 사람들의 삶을 각박하게 만들어서 일수도 있다.
하지만,
삶과 신앙의 분리가 가장 근원적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거룩한 것은 좋은 것이고
일상의 삶은 따로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이원론 아닌가?
그러다 보니 선데이 크리스찬이 나오고
신앙의식 따로 삶의 태도 따로
전혀 변화가 없는 탓이 아닌가?
힘없는 믿음은 열정이 쉬 사라짐을 의미한다.
각종 눈 앞에 보이는 이익과 걱정 등으로
주님에 대한 열정이 쉽게 식어 버릴 수 있다.
오늘
신혼 잔치에 예수님을 초대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
그 분에게 포도주를 달라는 은근한 마리아 님의 압력성 믿음의 간구를 보고 있다.
주님을 내 일상에 초대하여서
삶이 주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고
삶의 과정에서 주님의 명령이신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을 통하여
그 분의 말씀을 내 영혼에 받아 들이려고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 아닌가?
꼭 선교현장에 나가야 대단한 믿음이고
꼭 교회에 앉아서 기도해야만 기도이고
금식을 하고 철야를 해야만 그게 주님이 좋아하시는 신앙일 것이라 착각하고
꼭 돈을 헌금하고 헌물을 하고 봉사를 해야만 올바른 신앙인이라 생각하는 것은
별로 탐탁치 않은 생각인 듯 싶다.
그러다 보면 , 일상의 삶에서는 자신이 기독교 인인 것을 내세우는 것 조차 창피해 하고
전혀 주님을 의식하지 않는 이러한 분리된 신앙의 태도가
자꾸만 약해지는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을 불러오는
기초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주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주님을 요청하는 곳은 어디나 계신다.
그 곳에서
돌항아리 처럼 굳어가
아무런 의욕과 의미를 못 느끼는 존재로 느끼는 자신에게
주님의 말씀 가운데 '물'이 부어지게 하고
주님의 말씀이기에 따르고 기다리는 가운데
자신에게 부어지는 물이 물에 지나지 않고
결국은 '포도주'로 변하여 지는 놀라운 기적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올바른 믿음이 아니지 않는가?
돌항아리가 주는 의미가 나의 가슴을 찌른다.
어찌도 이리 질기게
내 가슴을 찌르는 상념들이 날 사로잡는가?
주님을 조금이라도 덜 생각하는 게으름이 생기면
여지없이 날 파고드는 상념들..............
마치 그럴 때의 난 , 내가 돌 항아리 같다.
딱딱하고
가끔 떡을 칠때처럼 강한 부딪침 이외에는 별로 쓸모도 필요도 없는 듯,
쓸모없는 자 같은 ........
하지만 주님은 돌 항아리 같은 그 마음에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묵상하기를 권유하시고
기도하길 권면하시고
말씀대로 단 한차례라도 살기를 권유하셔서
마치, 하인들이 물 채우듯
억지로라도 물을 채우고 나면
어느 순간에 내 영혼에는 '포도주'의 놀라운 향기와 빛깔이 들어참을
느끼게 되는 경험을 한다.
주님의 그 놀라운 변화로
자주 난, 내 돌항아리의 영혼이
포도주를 담고 있는 든든한 용기로 느낄 때가 있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다.
삶이 별거인가?
살다가 죽고
또 살다가 죽고
그 뒤를 이어 또 살다가 죽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 한없이 되풀이 되는 삶과 죽음의 쳇바퀴 속에
허무하게 빠져 살다가 또 어리석은 수많은 사람들 처럼
또 그리 허무하게 스러져 버리고 말 것인가?
삶은 그리 버려 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것 같다.
하지만, 진리를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어이없는 돌 항아리 같은
스스로의 존재를 몸부림 치다가 스러져 가고
또,
또
또...........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명멸하여 갔다.
하지만, 답이 있다.
우리에게는...
명확한 답이 있다.
주님이 답이시다.
우리 기독교인, 선택 받고 구원 받은 자들은
갈길이 뚜렸하다.
갈 목표가 분명하다.
천국이 있다.
천국이 기다리고 있고 이 땅의 삶은 잠시 거쳐가는
단지
연단의 장소일 뿐이다.
주님의 뜻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냥 최선을 다하여 만들어진 항아리의 모습대로 최선을 다하여
그 절대자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가는 존재.
그러기에
우리 선택받은 자들은 일상을 최선을 다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몸부림 치다가 가야 한다.
일상이 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모습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개념은
그냥 머리 속에 지어진 '관념'이나 막연한 의지의 대상이 아니다.
그 분은 그 분을 의식하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 위하여
나 자신,
이 돌항아리를 주님께써 쓰시도록 내어드리기로 결심하고
내 속에 물을 붓는 순간,
그 분은 나를
'포도주 담고 있는 돌항아리'로 바꾸어 주신다.
인생은 허탈하고 힘든 과정 만은 아니다.
인생은 '포도주'를 담아가는 과정이다.
부딪는 모든 곳이 주님의 연단 장소이다.
쳐다보는 모든 것이 주님의 또다른 배려의 장소이다.
들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소리를 구분해내야 할 소리들이다.
오늘도
주님의 성령 포도주로 내 돌 항아리 같은 빈 영혼을 채워
향기를 뿜어내야 한다.
적용
1. 난 돌 항아리가 맞다.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챙피해 할 일도 , 피할 일도 없다.
2.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기도다.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지내는 하루다.
3. 내 영혼은 변함없을 지 모르지만 주님의 성령이 담기면
난 포도주 담는 그릇이다.
4. 어디에나 계신 주님.
그 주님을 믿는다.
그 주님은 초청하면 오신다.
5. 마리아님 처럼, 기도하고 믿는다.
주님은 간절한 청원은 들으신다.
6. 성경 여섯 장 읽겠다.
7. 수요 전인치유를 최선을 다하겠다.
주님 만나는 장소다.
내 가진 달란트를 내려 놓는 장소다.
기도
주님.
돌항아리 .
볼 상 사나운 모습의 딱딱한 존재 , 돌항아리 같은 내 영혼에 오셔서
절 포도주로 채우실 주님.
저로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게 하소서.
일상의 삶에서 매일 주님의 말씀 따라 물을 붓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으로 절 채우게 하시고
말씀을 준행하려는 노력으로 절 채우게 하소서.
그리하여
채워진 제 돌항아리 영혼을 향기 그윽한
포도주로 바꾸소서.
그리 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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