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다섯 남편( 요 4:9-14 ) 본문
제 4 장 ( Chapter 4, John )
오랫만에 걸어 나오는 출근 길.
안양대교를 넘어서 버스를 타려 오려다가
문득 내려다 본 다리 아래 전깃줄.
비둘기와 앵무새가 나란히
다리 아래를 내려 다 보고 있다.
주여..
얘들처럼
주님 안에서 사이 좋게
성령이 늘
강물처럼 흐르게 하소서.
대교를 넘어서
건널목에서 돌려다 본 다리 난간에
비둘기가
십자가의 아래 밑을
장식하고 있다.
늘..
주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를
터벅거리며 물통을 이고 우물가에 나왔다.
어딘가 범상치 않은 남자가 우물가에 앉았다가 말을 건다.
움찔하다.
머리 속에 순간, 자동적으로 스쳐가는 생각들.
' 남자들은 모두....
경멸스러운 이스라엘 인...
난...'
속에서 방어막이 쳐지려 하기도
남자에 대한 갈증 같은 것이 묘한 욕정으로도 올라오려 한다.
그러면서 분노 같은 것이 올라오려 하며 의례 그러했듯이 말문을 닫고 눈을 피하고
내 일만 하려 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말을 건다.
아주 자연스레이.....
참 희한하게도 나도 모르게 응답했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 남자는 뜬금없는 소리를 자꾸한다.
내 방어기제가 들고 일어나 무엇인가 저항하고 싶지만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분위기에 말려 들어가며
하나 둘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생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어이 없다.
생수라니..
이 더운 지역에 고인 물 먹는 샘이 있다는 것 만도 감지 덕지 지....
하지만 그의 현학적인 듯하고 어딘지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듯한 말은
관심을 끈다.
생수라.....
생수.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난다니,
더구나 그가 준다니 희한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고 뿌리치고 싶지만
그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무리 많은 남자를 거쳐봐도,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도 ,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어서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채워지는 듯,
그리 오랫동안 괴롭혀 오던 어떤 무거움이
가슴에서 사라져 간 듯 뿌듯하고 차분해진다.
통쾌하다.
시원한 물로 씻고 난 후의 개운 함 같다.
그래.
이것이 생수의 시원함이라면
그 생수라는 뜻이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아직 개념이 뚜렷지는 않다.
당황스럽다.
혼란이 가라 앉기 전 그 분은 다시 말씀하신다.
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뜬 금없이 남편이라니..
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무엇이라 대꾸할 거리가 드디어 생겼다.
' 남편이 지금없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다시 말씀하신다.
맞다.
'네 남편이 ........네 말이 참되다.'
어지럽다.
하지만, 옳은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고백이 나온다.
' 주여.........당신이........'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이제
그 분이 말씀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지금이 바로 그때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주님은 영이시다......'
아멘..
여인의 눈으로 묵상을 진행해 보았다.
여인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혼란덩어리다.
그 혼란을 혼란이라 인정하지도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남편 다섯을 만난 것도 숙명이려니
자신의 화냥끼 탓이려니 하였지만
나날의 삶은 그녀를 멍을 들게 하고 있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사회의 틀안에서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고통 가운데 멍하니 지내 보내고 있던 차
예수님의 나타나심과 더불어
몇 마디 말로
그의 심사를 뒤 엎어 버렸다.
그것은 일상적인 대화가 아니고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대화였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은
다섯 남편으로 대표되는
그녀의 인생을 지탱해오는 어떤 가치를 건드렸고
그 가치가 건드려진 후에 '생수'의 놀라운 현상을 체험하며
급격히 마음이 열려 버렸다.
열려 버린 그 마음은
그토록 경멸하고 닫아 버리고 싶은
유대, 그것도 남자라는 존재를 받아 들이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그분은 '하나님'이셨다.
신령과 진정으로 맞닦드려야 하는 그 분을
그곳
우물가에서
예기치 않은 터에 만났다.
그리하여 죽어가는 그 영혼을 살리는
생수 (Living Water)의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나에게 무엇을 보이시려는가?
아침 부터 묵상에 집중하려 하지만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뻔한 스토리의 장면을 묵상을 하려니 쉽지는 않다.
그래도 걸러지는 부분이 있다.
'다섯 남편'이다.
'생수'다.
그리고 , '신령'과 '진정'의 예배다.
남편이란 어떤 의미인가?
여인으로서 삶을 온전히 의지하는 관계가 아닌가?
첫번째 남편은 나름대로 가슴뛰는 사랑의 대상이었을 것이고
다섯째까지 오면서 그 대상은 '성욕'과 '치욕'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나에게 부여되는 이토록 내 삶을 지탱해오게 하던
예수님 이외의 대상은 무엇이던가?
그리고 아직도 혹시 버려버리지 못하고 있는 질긴 끈은?
찬양, 재주...........육적인 능력이 될 수가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 아직도 뿌리 깊이 버리지 못하고 있는 '원망'일 수도 있으며
남에게 자랑 하고 존경받고 싶은 헛된 욕망일 수도 있다.
주님은 아직도 온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그러한 육적인 잔재들을 들추어 보길 바라시는 것은 아니실까?
그렇다면 생수는?
'성령'이실 것이다.
성령이 은혜라는 이름으로 잠시 느껴지다 마는
지금까지의 내 감각적 평온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生水' , 내 영혼을 살리는 드라마틱한 물길의 흐름 같은,
그러한 성령의 강력한 흐름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 성령님의 운행을 사모하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
언제 '진정'으로 기도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신령'이란 뜻은 또 무엇인가?
주님은 '영'이시란 것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영이신 하나님께 기도함은
사마리아 여인 같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주님
오늘
실패하고 있습니다.
주여.
용서하시고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하고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
이 다섯남편으로 대표되는 갈증을 해소 받을 수 있는
진실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길 원합니다.
주여.
남은 시간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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