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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뻐해서(왕상9:1-9)

주하인 2006. 5. 3. 09:06

 (열왕기상9:1-9:9) 


  
  아침에 출근하며 이차선으로 가다가 일차선으로 끼어 들어가려하자 택시 운전하시는 분께서 끝끝까지 밀어 붙여 양보를 안하시려 하는 것을 좁아진 이차선 도로를 끝까지 밀어서 한차 더 앞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오는 '쾌감'은 승리감과 더불어 복수감이 교차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짙게 밀려오는 생각

' 아이구~ 믿는 내가...'

한편으로 죄책감이 밀려오려고 했다.

 

 예전에 주님 영접하기 전에 본성이 좀 사나운 난 저럴 때 굉장히 쾌감 쪽이 강해서 승리감에 도취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잊어먹어 버리고는 했다.

그러다가 예수님 영접하고 점차로 '죄책감'이 커갔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도 덩달아 복수심 비슷한 감정이 덩달아 커지면서 예수님 믿고서는 두가지 마음의 충돌로 생기는 고통이 조금씩 커졌었다.

 

 이제는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 격한 승부심이나 일차적 쾌감에 영혼을 맡기는(^^;;) 어리석은 빈도는 줄었고 운전하다가 경쟁해도 비교적 예전보다는 점잖게(;;;) 하지만 아직도 가끔은 오늘 아침 같은 어리석은 일을 벌이고 있다.

 

 그럼에도 예전보다는 훨씬 가벼운 마음이다.

그래서 왜그런가..하고 속을 들여다 보며 발길을 옮겼다.

 

첫째로 강도가 줄었다.

둘째로 죄책감이 줄었다.

 

문제는 죄책감이 줄은 것에 대한 것이다.

 

 내 마음의 움직임은 이런 것이었다.

" 이 정도면....'

 

그런데 이게 자기 합리화냐 아니면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은 느낌으로 드는 후련함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회개없는 자기 합리화는 굉장히 큰 문제이지만...

후자 같으면 내가 주님의 사랑을 좀더 깊이 느끼고 있는 발전적인 현상이라서 다행이다.

 

두가지 차이점을 생각해 보았다.

 

전자는 마비이고 후자는 녹아지는 융해의 현상이다.

전자는 죄이고 후자는 축복이다.

전자는 무거움이고 후자는 후련함이다.

전자는 멍하지만 후자는 기쁘다.

전자는 점점 더 큰 죄악에 빠져들게 되지만 후자는 점점 죄의 욕구가 줄어드는 현상이다.

 

앞으로의 대처에 있어서도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전자는 울부짖고 회개는 할 수 있지만 '~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한 자기 의가 들어날 위험성이 다분하지만 후자는 주님의 기쁨을 놓치기 싫어서 자기의 선택으로 시행하게 되는 진실한 회개가 있을 수 있다.

 전자는 비슷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손가락질 할 개연성이 있지만 (투사)  후자는 이해할 수 있는 포용과 관용성이 있을 수 있다.

 전자는 한동안은 죄책감에 눌려 자제는 가능하지만 언젠가 다시 더 큰 행동의 죄를 범할 위험성이 있지만 후자는 주님의 기쁨을 놓칠까봐 줄어들고 자제하게 된다.

 전자는 어느정도 몽학선생의 원리로 주님께서 반드시 허락하는 과정이고 후자는 그 후에 더 성장하고 성화되기 위해 더 많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야 하는 원리일듯 싶다.

 

 

 

 

1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오늘 솔로몬의 성전 완공을 마치고 기뻐 기뻐 제사를 열정적으로 마치고 난 후의 일을 보고 있다.

 그런데 '무릇'이란 표현으로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라 고 하신다.

 

어딘가 모르게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기쁨이 아닌가..하고 악성(?)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구절이 아닌가?

 

어쨋든 그 일을 마쳤다고 한다.

바로 그 시점에 주님이 나타나셨다.

 

 

 

 

2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첫 믿음 시작 때 풍성하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께서 절정의 기쁨의 순간에 나타나셨다.

 

 최근에 난 뭔가 주님의 축복에 대하여 느끼고 있다.

그래서 기도만 하면 자주 이루어지는 체험을 하고 있다.

얼마전 분만 100건 사건에 대한 일례처럼...

 지난 주는 3명의 환자를 교회로 가게 했다.

  ......

 전혀 비교할 강도는 다르겠지만 솔로몬의 기쁨을 아주 아주 약간은 동질감을 느끼며 바라보고 있던 차.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

   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이제는 때가 된 듯하다.

마음의 바탕이 '죄책감'이든,

성격적 강직함이든

아버지의 교육 탓이든

겉으로 나타난 주님에 대한 '열정'은 인정하고 귀히 여긴다. (간구함은 들었다. )

 앞으로도 간구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간구하면 언제든지 눈과 이름과 마음을 부르짖는 그 자리에 같이 하실 것이다.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그런데 어딘가 찝찝한 느낌이 드는 말씀을 하신다.

 

예민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ㅎㅎ

 

그런데....

만일......

네 아비 같이.....

 

 솔로몬은 아비 다윗의 불륜의 대상인 '밧세바'의 몸에서 막내로 태어났고

왕이 되기 위해 풍파를 딛고 일어났고

여호와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다윗의 아들 왕까지만 축복하신다는 한계적 예언을 가지고 태어난 어딘가 모르게 '다윗'과는 많이 다른 자격의 왕이다.

 

 이걸 보면서

난 순간 머리 속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자'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성경을 통해서

결국 솔로몬의 우상 섬김과 과도한 색욕으로 무너지는 결과를 알고 있기에 인가?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하나가

'상처입고 자란 너 이기에

 어린 시절 그 상처를 광야에서 연단받는 중

 오직 하나님 만 바라보고

 철저히 연단받고

 극복해간 '다윗'의 경우와는

 근원적으로 다른 솔로몬.

 

 진심으로 하나님을 영혼으로 기뻐하는 믿음을 얻을 수 없었던 상처 있는 자.

교육과 옆에서 아비 다윗의 하나님을 지켜 보는 자로서

자기의 의를 조절할 수 없는 자가 누리는

축복이란 환경을 어떻게 조절할 수 가 있는가?

 

오늘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어느 정도의 시간 유예 속에

자기 의와 의무감에 의한 믿음의 성장은 필요하다.

그러나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을 기뻐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할 수 밖에 없다.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8 이 전이 높을찌라도

9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이 축복의 장소에

축복의 시간에

현신하신 주님에 대한 솔로몬과 우리의 기대와는 너무도 다른

무시무시한 경고의 말씀아닌가?

 

 

 

 

 아침에 택시와의 시비를 통하여 들어난 내 죄.

그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 눈물로 회개하고 금식하는 길이 능사인가?

주님이 다 해결해 주실거야..하며 믿음을 가장하며 방치해버리는 억압이 옳은 것인가?

 

아무리 해도

믿음은 어렵다.

 

그러나

 

십자가의 그 자유로움을 체험케 하시고

성령을 주시고

말씀의 단 꿀의 체험을 허락하시고

은혜의 눈물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세상의 상처 입고 자란 우리 모두에게 권유하신다.

 

이래도 '주님 예수님 믿는 기쁨'과 ' 자유'를 모르겠는가?

예수님 믿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그 자유로움이 너무 좋아서

그 기쁨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 기쁨의 강도가 더 커지기 위해서

주님 예수님과 동행하는 안전감이 훨씬 커지기 위해서

기도하고 회개할 수 밖에 없는 자연스러움을?

 

 

 

적용

 

1. 회개 기도한다.

 

2. 손님 들에게 회개의 보속으로 웃는다.

   방긋

    절대로 짜증내지 않겠다.

 

3. 내일 새벽기도 가겠다.

 

4. 내 일상을 기도한다.

   

 

 

기도

 

회개합니다.

주님

 

아침에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에 반하여

아직도 제 육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당신의 피조물의 마음을 혹여 상하게 하였을 줄 모릅니다.

 

주님 제 기도로 기뻐하실 줄 압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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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을 더 원하는가


 당신과 하나님이 해결하지 못하는 그러한 인생의 국면은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시련이 닥치든 그것을 견뎌 낼 힘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거창한 것에 대해서는 완전한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 정작 주님이 해주신 매일의 간단한 약속에 대해서는 별로 믿음이 없다.
가령 땅과 하늘을 창조하셨고, 약 300만 명의 이스라엘 피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홍해를 가르셨다는 사실을 믿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물 위를 걸으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며,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이셨다는 사실도 곧잘 믿는다.

이처럼 거창한 것을 믿는 데는 전혀 애로가 없다.

 

 하지만 사소한 것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가령 이런 식으로 불평하는 것이다.

“주님, 저는 자동차 할부금을 내야 하는데 그 만기일이 다음 주 목요일입니다.

그 돈은 200달러쯤 됩니다.

주님, 솔직하게 드리는 말씀이지만, 바다도 두 쪽으로 가르시는 분이 단 한 번도 제 금융 문제에 조치를 취해 주신 적은 없으십니다.”


 소위 신자라는 사람들이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께서 부부 사이의 갈등 따위는 얼마든지 해결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 「어느 크리스천의 행복한 고백」/ 지그 지글러

 

 

 

 

 

 

 

 


 
  99.9퍼센트 순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결코 순종이 아니다.

- 존 비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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