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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회초리 마져 사랑이시다(렘 34: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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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회초리 마져 사랑이시다(렘 34:1-7)

주하인 2010. 4. 24. 09:43

제 34 장 ( Chapter 34, Jeremiah )

 

주님

늦은 밤길 깊은 어둠

부딪쳐 오는 혼란에도 

내 운전대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 

계셔 주셔서

너무도 감사합니다

인도하여 주셔서

너무도 기쁩니다

 

 

 


1.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 모든 군대와 그 통치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에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시드기야님을 포함한 예루살렘 백성들이

힘들어 죽겠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셔서
 
2.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가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 
   시드기야왕에게

더 나쁜 결과를 예언하라신다.

 

 
4.  그러나 유다 왕 시드기야여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5.  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이 너보다 먼저 있은 네 열조 선왕에게 분향하던 일례로 네게 분향하며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럼에도 최악은 면케 하신다 하신다.

받아들이는 '시드기야'에게는

(어쩌면 주하인을 포함한 평범한 대부분의 신앙인이)

'병주고 약주시는 것' 같이 느끼지 않을까?


   
6.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 모든 말씀을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니라 
  그래도 '말씀'이 끝까지 주어지니 다행이지 않은가?

 

 

' 설상 가상'

'울고 싶은데 때린다' .. 는 표현이

시드기야의 입장에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국가적 위기에 있는데

위로는 못해 주실 망정 계속 나쁜 예언만 한다.

그러니 듣고 싶겠는가?

이게 인지 상정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그래도.. 너 죽기까지는 아니하겠고 .. .나중에 너 죽으면...'한다.

그게 위로라고 하시는가?

어쩌면 ' 병주고 약준다'는 비아냥 섞인 한탄이 나오기에는

하나님이 시드기야에게 하시는 일이

좀 버거운 느낌이다.

 요새 사람들 처럼 '트위터'를 만들어 아는 사람들 끼리

서로 서로 격려하고 좋은 댓글 달아주고

끼리 끼리 생각 비슷한 사람들끼리 '일촌' 맺어 위로 해주며

'종교 타협'을 주장하면서 서로 찾아가서

'수녀'와 '중'이 대화를 하고 절에 찾아가서 신부가 설교를 하고 주일에 중을 불러들여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를 사귀고 결혼한다해도 서로의 취향이니 어쩌니 하며

서로서로 좋은 소리만 하고 산다면 좋을 것을..........

 이거는 원 현대적 감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웬 잔소리에

웬 설교 !!

        -   이게 모든 것을 긍정하는 듯 가장하지만

            권위와 절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실은 가장 강한 부정인, 

            '포스트 모더니즘'  , 사단의 발톱이다.

      

 

 하지만

떡보다 매를 주는 게 사랑일 수 있고

진실로 미워하는 자에게는 '침묵'한다는 사실과

그나마 개전의 가능성이 있기에 잔소리가 들어간다는 사실과

잔소리보다는 마지막 권고에서 '방향 제시'일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시드기야'의 입장에서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시드기야는 누구인가?
타락한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던가?

그가 지금까지 오게된 이유가 무엇인가?

회개하지 않는 타락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그가 받는 징벌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고

그 당연한 징벌에 '더 이상의 회개'가 없으면

처음에 들었던 부정적 반응이 나올 것이고

그나마 회개의 가능성이 있는 자로 긍정적 시야를 가진 자 같으면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주님의 저런 '병주시고 약까지 주시는 듯한' 예언에

그것을 오히려 감사로 받지 못하는 게

이전의 잘못된 행태를 돌아보고 과감히 회개하지 못하는 이유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자신의 가진 것에 대한 '소유욕' 혹은 '자존심'이 그것일 수 있다.

시드기야는 왕이다.

아무리 망해가는 나라의 왕이라 해도

그는 포로 생활을 연명하며 목숨을 부지하기는

죽기보다 싫은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예레미야, 그 대단한 선지자의 말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줄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을 것이다.

사람 들은 어떤 '임계 상황' 즉 '한계상황'에 이르면

심리적 방어기제 중 하나인 '부정'을 사용하게 된다.

 가령 '암 환자'가 처음 선고 받고

'아냐... 아닐거야 .  의사의 오진일 거야'하며

이곳 저곳 병원을 방황하며 진찰 하는 현상을 통해 쉽게 볼 수 있다.

그 부정의 방법으로 그는

'예레미야가 잘못 알고 있을거야' 하는 방어기제로

강하게 귀를 닫아 버리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암환자'가 이 땅에서의 생명을 소유로 붙잡는 것 처럼

그는 '자신의 모든 왕으로서의 소유'를 포기하기 싫은 것이다.

또한 '왕'으로서의 명예, 자존심을 잃기도 싫고...

그러함으로 그는 예레미야님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부정하고

비아냥 거리는 '사단의 송사'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 방어기제'를 덜 쓰는 자다.

 부정 보다는 '인정'을

 밀쳐내기 보다는 받아들임을 잘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어제 '하기오스 찬양 팀' 에 서서 금요 성령 예배를 드렸다.

나이 비슷한 남자 집사님이 유통업을 하시는 데

정색을 하시며 말씀하신다.

'날씨가 완전히 틀을 잃었어요.

 이제 바다에도 멸치 하나 없어졌다네요.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이 폭등하고요.

 생각하시는 것 보다 유통업을 하는 나에게 느껴지는 것이 심각해요..'

그렇다.

이제 세상은 동시다발적으로 문제 투성이다.

기후,곡물, 전쟁의 위협, 화산, 금융, 지진, 홍수, ...........

'종말론적 징후'다.

계시록에 '일곱 나팔 재앙'이 시작되는 징후 중의 하나가

강이 쑥이 되고

바다에 ...  땅에는 1/3의 먹을 것이 사라지고... 등이 있다.

비슷해져 간다.

단지 , 귀를 막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아직도 배가 터지도록 먹을 것을 먹고

느즈막히.. 까지 잠을 자고

적당히 하나님 말씀을 읽는 둥 마는 둥하고

저녁이면 '수영'하다가

내 감각에 맞는 곳에 가서 '찬양'이라는 이름의 '노래 ' 나 하다가

애들이 내 감각에 맞는 행동을 하는 지 관심을 가지다가

자고  또 일어나

하루를 또 쳇바퀴 돌린다.

그래도 이제는 주님이 주신 적당한 물질이 있고

적당한 정도의 칭찬이 이곳 저곳에서 나오니 ... 부족한 것 없다.

거기에 '종말'.....'회개'... 

정말 '어휴다' .

 그러나, 귀 가린다고 소리가 없어지던가?

눈감는다고 눈  앞의 사실이 사라지던가?

마음이 답답해지려 한다.

버리려 하니 '내 소유',

지금껏 열렬히 투쟁하여 얻어놓은 내 평화가

안타깝다고 몸부림 치는 듯하다. ㅜ.ㅜ;;;

 

 찬양이 시작이되고

안식 년에 맞추어 세계에 뿌려 놓은 선교지를 답사여행하시러 떠나셨던

담임목사님께서 불현듯 금요 성령 집회에 인도자로 나타나셨다.

모두 놀랬다.

목사님은 그 특유의 달변과 유머로 '세계 선교 동향'에 대하여

알려 주시려 나오셨다고 말씀하시더니

정말 흥분된 어조로

'나이지리아'의 기독교의 대 부흥 ( 무슬림 국가에서 완전히 대 전환되었다한다 - 아프리카 선교의 전진기지화),

 인도네시아의 한참 시작되는 기독교 부흥(Time 지에 대서 특필 되었다 한다 .^^**)

 이란이 오일머니를 국민에게 뿌리면서 위성안테나가 동굴 집까지 달리게 되고

 덩달아 기독교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일,

 베트남이 본격적으로 기독교 인정함으로 불기 시작하는 부흥의 기미' 등에 대하여 강론하신다.

 

 마지막이 가까워 지면 급한 추수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 격변의 시간에

이 주님 재림이 가까워 지고 있는 듯한

성경의 이루어짐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는 시간에

난 어디쯤 서 있는가?

 

 아직도 난, 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지금껏 흔들리는 혼란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

가끔은 어리석게도 - 솔직히 이것 마져도 주님께서는  개인적 특별 상황을 이해하시며 사랑의 눈으로

감싸 주심을 믿고 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는 자유이긴 하다.  - 주님께 투정을 하고 있다 .

말은 못하고 표현 못하곤 있지만

변하지 않는 나의 부족한 부분에 대하여 시드기야의 비아냥 거림이 있지 않을까?

 만일 지금 나에게

'너 모든 것 내려 놓고 선교에 나서라' 라 하신다면

난 '주님 , 아니 왜 저는 제 왜 나만........' 하고 따질 지도 모른다.

그것은 왜이던가?

'소유'다.

이제 겨우 안정을 찾은 내 틀을 유지함을 빼앗긴 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박탈 당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 것이던가?

솔직한 심정이다.

 

 허나...

가끔 주위에서 주님의 뜻을 앞서서 과감히 모든것 던지고 나가서

후회하시는 분들을 보고 있다.

그 분들로 통해서 고생하는 가정을 보고 있다.

심지어는 그들의 어리석음 조차 주님의 역사에 이용되고 있음은 알지만

어떻게 어디까지 버려야 하는 것이

진실로 '소유를 버림'에 속할 수 있는 것이고

어디까지 붙들어야 미련한 소유에 속하는 것인가 구분이 잘 안갈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은 느낄 수는 있겠다.

 

말씀을 붙든다는 것.

묵상을 한다는 것.

'큐티'라는 표현을 쓰면

말씀을 깨닫는 방법론 중의 한 부분으로 제한 되어 버려 버리는 뉘앙스가 없지 않아 있지만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누구나 해야할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 묵상을 통해서 내 인생의 변화가 이루어져 왔다.

앞으로도 내 일생에서 버려야 할 정도와 때는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없지 않아 든다.

'내려놓음'

그' 내려 놓음의 시기'는 가능할 것 같다.

시대의 변화를 말씀을 통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그 와중에서 주님의 기뻐하심을 느끼며 나갈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너 내려 놓아라' 하면

내 속에서는 시드기야의 부대낌이 없지 않아 있을 것 만 같다.

 시드기야.

저 분은 나중에 '눈'빠지고 죽었다 하지 않던가?

 

 저 어리석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 주님의 모든 말씀'은 '선'이다'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때리시는 회초리 마져 '사랑'이시다.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때리지 않으시는 것이 무섭지 맞는 것은 오히려 기쁨 아니던가?

그리고

나 , 요새 며칠 흔들리지만 말씀 앞에 고착되어 있다.

흔들릴 때 내 부족함에 더욱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말씀 붙들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시드기야를 통하여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고 안심이 된다.

  또한,

'소유'를 내려놓는 결심이 뒤따라야 한다.

내 가지고 있는 조그만 소유들.

나에게 맡겨져 있는 내 자식들에 대한 세상적 기대.

칭찬 받고 싶고 위로 받고 관심받고 싶어하는 '자아'

적당한 정도의 경제적 편안함에 대한 기대.

...

어쩌면 '세상적으로 너무도 당연한 기대' 고 그것 마져 놓는다는 것은 이상히 보일 수 있지만

지금은 조금 특별한 징후들이 보이고

아직은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마음의 준비라는 의미에서

각오를 말하는 것이다.

 

아내와 난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다가

3년 후 - 3년 후면 펼쳐 놓은 일들이 대부분 정리 될 것 같다 ^^;- 부터는

무소유의 노력을 해야 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뭐...거창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우리는 덜 가지고 덜 욕심내는 연습은 되어 있지만

더 그러자는 것이지.. ㅎ

 

 묵상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드기야 왕의 입장에 들어가

그 분의 답답한 현실과 꽉막힌 두려움에서 임하는

하나님의 소리에 대하여 묵상을 하니

'두가지'로 구분이 될 수 있겠다는 느낌이 왔고

그 두가지 - 긍정적과 부정적- 는

모두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쉽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는 넓은 길인  '부정'의 선택은 '사망의 길'이고

조금은 버겁고 어렵지만 선택된 소수들이 해야 하는 '좁은 길' 은 '사랑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란 것이다.

 힘들겠지만

주님은 날 사랑하심을 다시한번 확신하고

내 소유를 내려 놓을 결심을 하고

말씀 앞에서 겸허히 서 있는

주말, 주일이 되어야 겠다.

 

적용

 

1. 주님은 무조건 선이시다.

 그분이 서운한 말씀 하셔도 받아 들인다.

 그것은 서운함이 아니다.

 슬픔이 아니다.

 고통이 아니다.

 고난이지만 사랑이시다.

 

2. 아버지 학교 가겠다.

 마지막 5주차다.

 주님의 영광위해 내 달란트 쓰이러 간다.

 

3. 소유를 내려 놓을 결심을 하자.

  하시려면 하시고  가져가려면 가져 가시라.

  내일일은 날 몰라요..다.

 

4. 성경 4장 읽겠다.

 너무 많이 읽으려다 보니 묵상하며 읽는 습관이 약해졌다.

 오늘 만 그리해보리라.

 다시 느낌 오면 늘린다.

 

5. 무조건 기뻐하겠다.

 주님이 날 회초리해도 사랑하심이다.

 난 그럼에도 말씀은 지금까진 붙들고 있다.

 

6. 절제한다 (서서히 연습하자)

 . 커피를 아침 일찍 마시는 것 금한다.

 . 식사량을 줄인다.

 . 야식을 안하겠다.

   -  종말에 대비한 무소유와 절제...................연습.

 

기도

 

  사랑하시는 주님

혼란 하기도 했습니다

귀하신 주님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이 계시기에

전 많이 행복합니다

이제 흔들리는 시드기야를 묵상하며

주님 붙들고

주님 말씀대로 따르기를 선택해봅니다.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 뜻대로 인도 받고

그 결과가 그리 만족치못할 것으로 예상이되어도

그냥 다 맡기기로 결심해 봅니다.

제 삶을 인도하소서.

주님 .

간절히 비옵기는

더욱 더 제 믿음을 견고히 해 주시고

주님 뜻이라면

어떠한 상황에도 웃을 수 있도록 해주소서.

주님

원하기는

절 붙드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특별한 상황인 제가

선교의 길에 서 있을 수 있는

담대함과 환경과 모든 것 허락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욱 바라기는

모든게 주님 인도하심에 의해 그리되길 원합니다.

영혼과 마음과 정성이

온전히 주님 뜻에 동화되어 그리되길 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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