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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재미가 있다.( 잠21: 15-31)

주하인 2007. 8. 11. 13:03

제 21 장 ( Chapter 21, Proverbs )

 

( 주님의 재미는 이것 보다 훨~~~~~~~~~~~~~~~~~~씬 더 큽니다.  )

 

 


15.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니라 
 어제 기도원에 올라갔다.

늦게.

일곱시 경부터 시작하는 데 여덟시에 올라갔다.

 

 나름대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이제는 어떤 것이 중요한 것임을 아는 마음이 생겼다.

금요일 예배

오랫만에 참여하기로 마음 먹고

가까운 곳 - 난 이리 가까운 곳에 기도원이 있도록 해주신 것도 하나님의 지극한 배려라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다.-에 있는 기도원에 올라가기로 마음 먹었지만

내 좋아하는 '프라이드 경기'가 유혹하려한다.

 굳게 마음 먹고 Tv를 틀지 않기로 했지만

순간의 유혹으로 버튼을 누르며

저녁을 먹는 순간, 30분의 시간이 지나가 버린다.

몸은 피곤으로 찌든 것 처럼 늘 그랬다.

그러나, 버튼을 눌러 TV를 끄고 나서도 

난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간을 잠이 들었다.

 나름대로

힘든 환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면서

나를 연단하심에 맡기는 체험으로 이겨나가는 중이라

기도원 가는 것이 선이라 생각했는데...

 얼른 잠에 깨어 일어나니 8시가 넘었다.

그래서 망설여지는 이 사단의 유혹을 뿌리치고

성경 한권을 들고

터덕터덕 올라간다.

가면서

마음이 뒤죽박죽하려던 게

성경의 말씀으로 정리되어 간다.

그리고

나름대로 묘한 기대감이 있다.

 

 내 행위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은혜.

그것에 대한 기대다.

내 행위는 게으름으로 이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만큼은

주님이 날 '의'롭게 보실 수도 있다는 기대.

그것은

날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또다른 '미끼(^^*)'시다.

 

 정확히는 의롭게 되기 위한 전제 조건.

예배 참가.

주님 말씀 순종.

주님과의 인격적인 감정공유에 의한 결단을 실행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 예수님을 믿어 의에 이른다는 개념의 시작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나는  행동은 옳지 못했을지 모르고

늦은 예배 참가는 옳은 행동은 아닐지라도

주님을 경외하여

주님의 은혜가 기뻐서

나도 모르게

늦게라도 추적추적 예배에 참가하러 가는 모습은

의로운 사람이 될 전제조건이고

그 여러 비슷한 경험이 쌓여서

어느새 주님이 의롭다하는 모습으로 굳어질 것 같은 자신이 든다.

 

 

 참가하니

금요 예배가 사라지기 시작한 이 땅의 교회를 한탄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기도원 성전을 그득 채우고 있다.

예배는 막바지로 다다르고 있다.

어디 구절인지도 몰랐다.

그냥 그래도 좋았다.

 내 의도와는 아무 상관없는

내 은혜 받으려고 노력하는 심적 노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깊은 은혜가 온몸을 전율케 한다 .

 

 몇년 전

'예배가 감동이다.

 절절한 전율이다.'라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졸리는 귓전으로 흘려 보내면서도

내 머리 속에는

' 흥

 그런게 어딨어

 그냥 예수님께서 하시라니까 하는 것이지..'하며

믿지 못할 뿐 아니라

예배에 집중하게 하려는

목사님의 간사한 술수 내지

과거 자신의 신앙적 열정이 가져온 주관적 환상을 모든 사람의 그것이라고 내 모는 무식한 자들의 특질이 다름이 아니라고 치부해버리며 교만한 쾌감으로 물들며 낮은 졸음 속으로 들어간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요새 내가 그렇다.

갈때마다 전율한다.

내가 전율하려고 몸부림 친 적도 없고

은혜가 충만해서 갈 때가 단 한번도 없다.

늘 그랬지만

나이든 산부인과 의사로서

인격적으로도 부족하고

모든 게 절망에 있을 환경의 자로서의 약간의 불안감 내지 답답함 - 실로 놀라운 것은 불안감은 많이 없어졌다.  아주 가끔이외는.. 이게 내가 바보가 되어가는 증거가 아닌가 혼자 놀랄 때가 있다.  잠시지만...ㅎㅎ - 을 가지고 갈 때가 대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첫사랑 때 그 강력한 은혜의 기쁨 - 떠 다니는 느낌- 때는

정신을 차리면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가능하면 그 기쁨에 머물러서 살려고 감정을 극대화 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지속적으로 온다.

두 손 들고 기도하다가

혹여 이것이 내 감정적 착각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 착각이었다면 내 십년간의 믿음의 인생은 헛것이며 나의 장래의 소망마져 물거품이 아닌가?   예수님이 안계시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옥이 아닌가? - 이 순간 밀려와 내 정신 상태를 들여다 보았으며 내 들려진 손에 가만히 신경을 집중해 본다.

 그러나, 그 잔잔한 전율의 기쁨은 전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슬픈 일이 없음에도 나오는 눈물은

신경을 집중해도 가라앉을 줄 모르고

그게 그리 슬프거나

내 신세를 한탄하려는 느낌도 아니다.

그리도 조이던 등줄기의 양어깨 근육이 나른하다.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선한 아이디어들의 폭죽 들이 멈출 줄 모른다.

 

객관적이고

진실이신 은혜의 주심.

 

살아계신 하나님

날 의롭게 만드시려고

은혜를 베푸신다.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바로 이 끈을 난 잡았다.

 

 

 

 
 

* 퇴근 길 고가를 내려가며 비개여가는 하늘과 아파트와 가로등이 어우러지는 멋진 광경에 감탄하면서..

 ( 과거 불신 시절의 구습이 이제 이렇게 걷어 가지며 곧 맑고 청명한 의로운 영혼으로 거듭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주는 듯... ) 
 
21.  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제가 가지고 다니는 묵상 집에는

'공의와 인자'라 나와 있던데...

 

 어찌 되었든

의와 인자.

너무나도 평범한 구절이고 지루한 잠언 이라서 그냥 수도 없이 지나쳤던 구절들이

요즈음 잠시 공의 의 끈을 잡았었던 터라인지

확하고 들어온다.

 이게 묵상하며 느끼는 가장 큰 '재미'다. 

 

 머리가 뻥뚤리는 것 같고

어떤 때 그 말씀을 잡고 일상에서 수도 없이 넘어지다가

한두번 성공할 때

주님의 은혜가 느껴짐이 너무 좋다.

그 은혜의 감동을 누리기 위하여

나도 모르게

정말로 게으름과 나태함과 무계획과 돌발과 당혹이 특기였던 내 리듬에도 불구하고

2년 가까이 이 묵상이란 것을 거의 잘 안빠지고 되풀이 하게 됨으로 느껴지는

나도 이해하지 못할 현상을 

지켜봄이 스스로 기이하고 기쁘다.

날마다 도전인 느낌이다.

그것은 또 다른 말로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감이

이 의심많던 월하랑의 영혼에 커져서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더

주하인 정체성에 가까운 모습으로 간다는 얘기가 된다.

 또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의로운'모습이 되어 간다는 가능성을 의미하며

실은 이런 것이

내 행동이나 나 자신의 어떠한 노력이 아니고

주님의 의도대로 이루어 진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고

이것은

성경에서 나온 그대로가

내 일생에서 펼쳐지는 것임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니

얼마나 난 기쁘겠는가?

 

 퇴근 후 시간이 여유가 생겨서

엔진 오일을 갈고

오랫동안 벼르던 메모판을 사들고

집에 오는 길을 한바퀴 돌아오게 되었다.

 

 날씨는 언제 비가 왔나하는 듯이

청명하다 못해 지나치게 덥다.

하늘은 그래도 아름다와서

길목 길목 서서

운전하다가 멈추는 때마다 셔터를 눌러댄다.

 계속 운전하다가

옆 라인에 선 버스가 도저히 안될 추월을 하려고

정지선 앞 쪽으로 슬금슬금 밀고 내 라인으로 들어온다.

 

내가 누군가?

성질 급하라면 둘째가고

논리에 합당치 않은 상황은

스스로는 유연하지만

남에게는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 철저한 남에 대한 '도덕 주의자 '아니었던가?
 이제 저런 씨추에이션에 놓이기만 하면

슬슬 가슴이 뛰기 시작하고

머리에서는 그를 제압하여 놀려주고

스스로 반성할 기회(^^;;)를 어찌하면

가장 극적으로 줄 것인가를 머리 속에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점검하고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난 방금 전 오일 갈면서 기다리는 동안 블로그에 묵상을 올린 사람이다.

거기에 보니 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라고 나오지 않는가?

 

 의란 무엇인가?

주님의 명령이기에 따라 행하려고 노력하는 자. - 성공하는 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시다.  - 그걸 기쁨으로 행하는 결과를 얻는 자가 아닌가?

 인자란 무엇인가?

도저히 내 논리에 맞지 않지만

맞지 않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기에 따르는 가치가 있어

그들에게 행하고

그럼으로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가슴 속에 비례적으로 남에 대하여 크게 나타나게 되어

결국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자가 아니던가?

 

 아예

브레이크를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파란 불이 켜진다.

호흡을 깊게 하고

뒤에서 움직이려고 부릉거리는 차들을 잠시 모르는 체 무시하며

버스가 내 앞에 들어와

고맙다는 깜빡이등을 킬 때까지 기다렸다.

진짜 깜박이 등을 킨다.

 

 별거 아니다.

그렇지만

주님 때문에 의를 행하였다 .

 난 이런 경험이 쌓이면 인자한 자가 될 것이다.

 

 가까운 자들에게

오랫동안 서운함을 가지고 있다.

머리로는 의로운 행동을 하려고 생각을 하지만

여러가지 논리로 행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서운함이 많다.

 더구나 회복 시키려는 노력을 막는 큰 논리적인 장애물이 있어서

그동안 가만히 격조하고 있던 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만 해결해야만 할 것 같다.

 

 주님은

그에대한 답을 주신다.

"의'롭게 행동해라.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가능하면 용서하라.

어렵다.

속도 상할 뿐더러

해결되지 않은 감정으로 다시 시도할 때 되풀이 될 속상함이 두렵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도저히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공의롭게 '행동해서 '인자'해질 노력을 하라시는 것 같다.

이것은 내 논리적 배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의롭게 행동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 생각없이 나가라.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라.

그렇다면 '인자'한 마음을 줄것이다.

그게  생명 을 얻는 길이고

그것이  공의로와지는 방법이며

그것이 영광을   얻는 지름 길이라신다.

 

 이해가 간다.

 

 내 일.

아무 일 없이 나갈 것이다.

인자해지기 위해서 .

의로워지는 한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서.

상처로 어려워진 내 인생의 삶이 새로운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차기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 가득하게 함으로

이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게 하고

죽는 것도 유익한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고민하고 분석할 필요도 없이

주님이 원하시면

인자한 해결을 통하여

그 분과 나 사이를 정리해 주실 것이다.

 

 해결되었다.

고민하지 않겠다.

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씀을 준행하는 게 복이다.

 

 

 
 
23.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한 걸음 더 나가

입을 다물라.

혀를 조심하라.

 

그게 중요하다.

 

 

적용

 

1. 내일 아무렇지 않겠다.

 

2. 성경 다섯 장 읽겠다.

 

3. 아들이 휴가 나왔다.

 사랑으로 대한다.

 아이도 의로 대하겠다.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의로움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로움을 온전히 추구하게 하소서.

주님과의 동행으로 인하여 이루게 하소서.

나 혼자의 나섬은 자제 하게 하소서.

주의 기쁨으로 인하여 하게 하소서.

그래서 내 인품이 '인자'롭게 하소서.

걸리는 상처의 부분을 녹이셔서

주님이 자연스레이 하게 하소서.

의와 생명과 영광을 구하는

그런 하루가 되게 하소서.

죽을 때까지 말씀 놓치 않는 삶을 이루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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