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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무조건 선이심을 믿는다(마14:22-29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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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무조건 선이심을 믿는다(마14:22-29 )

주하인 2010. 2. 10. 15:13

제 14 장 ( Chapter 14, Matthew )

 

그래

비야 오너라

 

그래

바람아 불거라

 

그래

어디에 있어도

 

그래

어떤 모습이 되었다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 영혼에

주님의 빛만

비추어 주신다면

난 이리

굳건히 설 수 있을 것이다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타고 먼저 가시도록 하셨다.

재촉하셨다고 나오는 바 약간 서두르신 듯한 뉘앙스시다.

 왜 그러셨을까?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당연히도 '기도'를 해야할 분량 때문이시기도 했지만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제자들이 바람에 거슬려 물결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것을

아시고 그리하시지는 않았을까?

 의도적 고난.

고난이 있어야 연단이 이루어짐이 당연하기에..

 어제 선교사님의 혼란에 대하여 묵상한 바 있다.

삶의 고난. 굴곡. ..

누구나 없었을까 마는

나도 그못지 않다.

아내를 안마하며 '여보 , 죽을 때 손잡고 같이 가자'

나먼저 죽으면 당신 누가 안마 해주냐? ' 했더니 고맙다 한다.

늘 약한 아내.

그 아내가 있었기에 고난을 잘견디어 나오고

이제 세상의 물욕이나 온갖 정욕 - 성욕이 아니다 ^^;;- 을 한걸음 떨어져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그리 세상을 오래살 욕구가 없는 게 문제다.

이제 주님 앞에서 자꾸만 기쁨이 커지는 훈련이외는

아내와 나를 이세상에 잡아둘 아무런 의미가 없다.

때가 되어 내 주님에 대한 기쁨을

세상에 , 자식들에게 적당히 알려 주고

내 소임을 다했다 생각되면

아내와 손잡고 소천하는 것이,

그래서 천국의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이

이제 우리 부부가 남겨놓은 바램이다.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밤 사경.

얼마나 제자들이 고난을 겪었을 까?

 주님은 바닷 물결을 밟으시고 제자들에게 향하셨다.

무슨 느낌이셨을까?

바다를 밟는 느낌.

벨벳?

고무?

우레탄?

흔들거리는 점핑그물을 타고 있는 것 같으셨을까?

아니면 주님 밟으시는 부분의 물 만 조용하고

주위의 파도는 잠잠하여서 주님 얼굴을 한방울도 튀지 않았을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제자들이 불쌍하셨을까?

아니면 잠잠하셨을까?

아무런 생각도 안하셨을까?

빨리 가서 고생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초조하셨을까?

 아마도 결론을 알고 계시기에

담담하고 차분한 마음이 아니실 까 싶다.

주님의 은혜가 충만할 때

외적인 환경은 바람이 몰아치듯 흔들려도

마음 한구석이 든든하고 알지 모를 눈물이 맺힌 듯한

감격으로 늘 그 분의 영혼이 채워지지는 않았을까?

 어두운 밤바다는 그 분의 눈에 장애가 되어있었을까?

아니면 천사가 후랫쉬라도 들고 앞길을 밝히셨을까?
그분 발바닥을 통하여 무릎 관절에

체중이 얹히면서 먼길 바다위를 걸어오시느라 피곤하지는 않으셨을까?

 야식이라도 한점 -라면 ㅎㅎ - 먹었으면 할 시장은 없으셨을까?

재밌다.

주님의 입장에서 상상을 하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그 분의 모습이나 생각과는 달리

고난을 겪고 있는 제자들은 거의 '공황상태'였음이 분명하다.

죽을 지경의 환난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는데  
힐끗 쳐다본 어둠 저편 물결 사이에

무슨 물체인가 보인다.

사람의 형태다.

아마도 어두운 바닷길을 밝히는 천사의 후랫쉬 때문에

더욱 뚜렷이 고난과 공포에 시달리는 제자들의 뇌리에

각인이 되었을 지 모른다.

그러기에 한명만 힐끗 본게 아니고

제자 '들' 다수가 동시에 보게 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게 진짜로 공포의 상황이던가?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고난이 고난으로 인식이 되면

그것은 인식의 오류를 가져오고

스스로 낙망하게 된다.

 하지만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면

그것은 예수님이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깨어 있어야 한다.

모든 환경은 모두 '선'이다.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고난은 유익이다.

기다리고 물에 빠지지 않게 열심을 다하면서

주님을 간구하면 된다.

결국은 구원 받는다.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베드로가 대단한 사람이다.

두려움이 덜하다.

'물 위로 걷길 원한다. '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우리의 바램과

주님의 응답이 있으면

물 위라도 걸을 수 있다.

 나에게 부족한 것이 정말 이것이다.

용기와 믿음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그러던 그가 갑자기 무서워 한다.

주님을 보고

주님의 기적을 볼 때는 물 위를 걷더니

물이 눈에 튀고

바람이 휘몰아쳐

예수님의 모습이 흐려지니

즉시 두려워 한다.

그러면서 물에 빠져 간다.

'믿음'이 중요하다.

믿음은 물 위를 걷게 한다.

난...

아직도 의심이 투성이다.

 믿음.

어찌하면 늘어날 수 있는 가?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그래.

그래도 주님은 건지신다.

바람을 멈추시게 하신다.

주님의 때다.

사경이나 지난 시점에 그러신다.

주님이 나타나셔서 그런다.

 

 나.

믿음 부족하다.

정말이다.

의심이 많다.

도마?
도마 보다 더 많다.

아픔이 많았던 탓에 '사람'에 대한 믿음도 부족했다.

세상에 믿을 자 하나도 없었다.

선한 의도로 다가오는 자도 의심했다. 

가족 간에도 진정한 사랑으로 대하지 못했다.

예수님 믿으면서 믿음이 깊지 못함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지도 몰랐다.

 그것은 다시 생각하면 '나 자신'을 믿지 못함인지도 몰랐다.

'나같은 자가 그럴 자격이 있던가?'

 베드로 .

물위를 걷는 단순함은 있고 

예수님을 믿는 마음은 충실했지만

어쩌면 그는 자신을 의심했을지 모른다.

아니..

'물위를 걷는다는 데 이게 나 맞아?

 내가 그럴 자격있는 거야? '

마침 그 때 바람이 불며 물결이 잠시 그와 예수님 사이를 가로막아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실루엣이 사라지자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을 것이다.

순간이지만 그에게는 '다양한 의혹'의 경험들이 스치고 지났을 것이고

결론적으로 '그럼 그렇지' 했을 것이며

그것은 그로 하여금 물로 빠지는 의심의 덩어리로 만들었을 것이다.

 

 갑자기 아침에 생각난 것이다.

사람은 물질의 존재다.

하지만 '파동'이기도 하다.

양자역학의 이야기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믿음'이란다.

강력한 믿음.

만일 주님의 성령으로 내 믿음이

주님 예수님께서 기뻐할 강력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면

난 '영' '육'이 합일 된 어떤 '신령체'가 되고

그것은 '계시록'에서 나오는 '천년왕국'에 사는 자의

온전한 영체가 되는 것이며

파동의 존재가 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질이 아닌 소리나 빛같은 파동의 존재라면

그것은 무게가 없는 것이고

세상의 이치 - 관성의 법칙, 중력의 법칙, 아보가드로 법칙.......물질계의 법칙'-을 벗어나는

신비한 존재가 되는..

이러한 것은 '과학적 논거'에 의거한 상상이다.

그것은 주님이 말하시는 천국의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러한 과정을 당기는 것의 중심은

바로 '믿음'이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보시고

권하시고

기다리시고

기대하시고

부드러운 벨벳처럼 평화 가운데 지켜보시고

모든 해결 방편을 가지시고

심지어는 물위를 걷게 할 만한 의도도 가지시고 계시며

실은 그 고난을 통하여

더욱 큰 영광을 보시길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풍파 속에 휘말린 제자들처럼

고난을 고통으로 만 보고

피할 대상으로 만 인식하고

눈 앞에 보이는 현상 만을 모든 것의 전부로 본다면

그것은 언제까지나 고통일 수 밖에 없고

오히려 나중에는

주님 예수님을 '귀신'으로 바라본

그런 '우'를 범하지 말라고

누가 과연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고난은 '유익'이다.

비록 월요일 '임파선 전이'의 갑상선 암을 기쁨으로 간증하던

아버지 학교 스텝 형제님의 그 귀한 믿음 만큼은

도저히 이를 자격은 없을 것 같지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고난마져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주님은 무조건 선이심을 믿는

확고 부동한 믿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병을 낫고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고

기적이 마구 일어나는 것 보다 훨씬 귀한 은혜가 아닐까?
 베드로는 아주 잠시지만

번뜩이는 영감으로

그 위기의 상황

극도의 임계상황에서 '물위'를 걸어내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

그것은 단지 축복 받고 기적을 이루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는 미련한 사람이다.

무식한 사람이다.

하지만 '믿음'하나로 그는 모든 논리 -지금까지 열거해놓은 .. -를 넘어서는

물위를 걸어내는 기적을 만들어 낸 것 아니던가?

그는 물질 세계에서 살되

파동으로서의 베드로

육체이되 신령체로서의 베드로를

아주 잠시 이루어 낸 것이다.

믿음 만이 답이다.

 

 

 

 

적용

1.  고난은 고난일 뿐

   주님을 의지하면 오히려 희망이다.

 - 늘 주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자.

 

2. 성경 여덟장 읽겠다.

 

3. 회개한다.

 어제 진료가 끝나고 운동하러 갈 때까지 시간이 남아

 두 손들고 서서 잠시 기도를 하던 중

 병원 전체가 흔들리는 감각을 느끼면서

 겁이 덜컥 났다.

 마치 지하철 공사 하느라 지하에서 폭파를 시킨 듯

 흔들 흔들 거리는 것이 '지진'이 틀림없었다.

  기도하다가 순간 생각이 오간다.

 '이러다 죽으면... 아내는... 내 가정은?

 병원이 무너지면 내 먹고 사는 것은? '

 그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던 중이라선지

 천국이 생각나며 잠시 안정이 되는 듯하더만

 몇 초 지속되니 나도 모르게 눈이 떠진다.

 손을 내리고 구석으로 가 섰다.

 ' 그날을 감해 주시리라는 약속은 있으셨으니

 덜아프게 죽어야지. ㅜ.ㅜ;'  라는 얄팍한 심사였다.

  오늘 '믿음'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

 이유가 있는 듯하다.

 이렇듯 아직도 죽는 것, 살아가는 방편에 대하여

 묶인 것이 많다.

 주님께 어떻게 하면 좀더 의지하고 살 수 있을까?

  주여 용서 하소서.

 

4. 언제든지 놓고 갈 마음의 준비를 한다.

 

5. 내 기쁨을 알려주고 갈 수 있으면....

 기도 제목이다.

 내 터부... 풀어주시길 기도한다

 

6. 믿음 만이 살길이다.

 주님은 선이다.

 주님은 무조건 선이시다.

 

 

기도

 주님

베드로와 같은 단순하고 우직한 믿음은 거리가 먼것 같습니다.

어제의 '지진' 사건에 대하여 걱정이 밀려오던 것으로 보아

만일 바다위에서 풍랑이라도 만났더면

저들과 다른 행동을 보일 것이란 장담은 전혀 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주님이 계심에도

나 홀로 깊은 바닷속에서 가라앉아 방치될 지 모를

그 추운 외로움에 두려워 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주님

이 어이없는 자의 어이없는 믿음을 보시고

주여

저로 하여금 깨닫게 하소서.

주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고난과 환란은

기필코 빠져나가야할 괴로움이 아니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의 선을 들어내고

그것을 통하여 믿음이 깊어질 기회임을 깨달아

오히려 고난을 기뻐하길 선택하길 원합니다.

주님.

사랑하시는 주님.

주님의 뜻을 알고

환난과 연단 중에서도

주님의 그 살폿한 발걸음을 묵상하게 하소서.

주님의 그 뜻을 이해하게 하소서.

주님의 그 기도를 기억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께 간절히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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