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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과 계명 (마15:1-9 )

주하인 2010. 2. 11. 12:08

  제 15 장 ( Chapter 15, Matthew )

 

 

어두운 곳에

빛이 비취리라시던

그 하나님께서

이 부족하고

어지러운

내 영혼에

이리

놀라운 은혜와 기쁨을 주신다

 

할렐루야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나는 지금 기분이 좋다.

뭐..

특별한 축복을 받은 것도 아니고

막혔던 기도 제목이 뚫어진 것도 아니다.

아팠던 자리가 나아진 것도 아니고

월급이 올라 간 것도 아니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어제 퇴근하여 수영하고 늦어서 수요 예배 시간이 늦어져

집에 돌아와 옷갈아 입고 기도원 들렸다가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운동갔다가 그제야 온다.

 대화하던 중 '친구 '이야기를 한다.

친구 남편이 혹이 생겼다고 상담차 전화 왔다한다.

 내가 의사이니 그랬던 모양이다.

이야기 하던 중 남편 동반 식사 이야기 나왔던 모양이다.

아내가 친구에게 그랬다 한다.

" H야.. 네 친구 내 남편 만나는 것 은혜야..♪"

"내 남편 참 좋은 사람야.. "  하며

마음 속으로 ' 내 남편 만나는게 영광인줄 알아.  이것들아... ' 하고 마음 속으로

개그 유행어 흉내를 냈다네..ㅎㅎ

아내.

가장 가까운 사람.

내 단점을 속속들이 알아

얼마나 성질이 급하고 불안정 한지 ㅜ.ㅜ;; 다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진짜로 사랑스러운 말투의 자랑이 나왔다 하니

그게 하나님의 칭찬인 것으로 느껴져

마음이 짜안...하다.

정말 아직도 갈길이 멀기만 한데..

블로그에서 늘 고백하지만

며칠에 한번씩 마음 속에서 '불끈'하고 죄성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개중에는 몇번씩 져 울컥하는 경우도 많음을

너무도 잘아는데

그 아내가 나보고 저런 소리를 하니

그것이야 말로 나의 변화를 보고

그 긍정적인 추세를 칭찬하는 것 아니겠는가?

모든 것 다아는 사람이..ㅎㅎ

 

 진료를 하다가 얼마 전 퇴원하신 MK님이 들르셨다.

곧 구정이라서 구정음식과 과일과 .. 다양하게 싸셔서

가져오셨다.

 내 환우로 들르셨다가 블로그에 자주 오시면서

교감을 나누셨던 반가운분.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하나님 이야기와

내 블로그 이야기 ..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고

난 그분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기쁨으로 한 공통점을 가진 사람으로서

교분을 나누었다.

 난 그 분이 기뻐하시는 내 '시화' 중 하나를 꺼내어

'싸인'과 더불어 선물하였다.

좋아 하신다.

 그게 기쁘다.

 작금은 '리베이트'다 뭐다

많은 현금이나 이권이 왔다 갔다 해야

사업이 이루어지고 그것은 의료현장에도

큰 예외는 아니기도 한 경우가 가끔있다.

 돈.

그보다 훨씬 기쁘고 좋은 것이 이것이다.

'정성스러운 마음이 담긴 선물'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쁨으로

서로의 영혼 깊숙이 공감대가 이루어지며

주는 자의 사랑을 깊숙이 느낄 수 있는 선물.

작년에 수술한 엄마를 대신하여 준

2학년 여아 의 마음의 '초코릿 선물'과 더불어

할머니의 정성스레 포장한 '수박'선물,

그리고 이 선물...........

눈물이 찔금한 선물이다.

가슴을 멍~하게 하는 선물이다.

 

 갑자기 위의 '두 공통점없는 이야기' 인듯 싶은 이야기를

늘어 놓는 이유가 있다.

 

 나.

하나님을 믿고 정말 좋은 게 있다.

이것이다.

'감동'을 회복하고

'사랑'을 받음을 만끽할 수 있는 영혼의 펴짐을 느끼는 것.

 정말 적은 관심에 감동할 수 있다.

그 관심 속에 담긴 그들의 고마움이

하나님의 엉덩이 두드려 주심처럼

가슴이 두근 거리는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다가오는 때가 자주 있다.

 

 아들.

둘째가 의경으로 군대가서

몇번이나 날 당혹시켰다.

 처음에 훈련 받을 때 중대장이 전화왔던 일.

경찰 학교 후 자대배치 받고 나서 입원했던 일.

자대 복귀 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제발' 면회와 달라 사정했던 일.

 그 가슴 떨리는 긴장의 시간 후

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체험했다.

 친구와 형님과 아버지 학교 스텝 형제분들을 포함한

다섯 분이나 동시에 아들의 일에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고 나섰다.

잊으려고 하면 직접 전화해서 챙겨준다.

 작은 아들은 면회간 날

돌아서 나오려는 나를

두번이나 부둥켜 안았었다.

그 가슴이 얼마나 넓고 포근했던지

아들의 가슴이라기 보다

하나님이 날 기뻐하고 잘했다 위안하는 느낌의 포근함이었다.

난 지금 이 글 쓰면서도

눈물이 찡~하려 한다.

 

 삶이 감동의 연속이다.

이전에 늘 긴장하고 살았던 불안 속의 삶이

마치 보상이라도 받듯

눈 녹듯이 녹아 들어 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늘 고백하지만

내 감성의 개발로 나오고

내 의학기법의 개선으로

현실과 다양한 분야에서의 개발로 나오게 될 뿐 아니라

내 실적과

이제는 이곳 저곳 사람들의 도움과 사랑의 눈으로 펼쳐지고 있다.

 

 한마디로 다시 말한다.

하나님은 '감동'이다.

하나님은 기쁨이시다.

그분은 기적도 당신의 뜻대로 보이시지만

대부분은 깨어 있어 당신의 흔적을 느끼지 않으면

허락지 않는 크지만 너무도 세밀하고 세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배려시다.

 

 나의 이러한 주님을 기뻐할 수 있는

진실한 기쁨은

그냥 온게 아니다.

그 분의 말씀

그분의 계명을 따르려는 '의도'

즉 순종하려는 의도의 시간이 지나가며

서서히 커진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계명을 따르려는 의지를 가진 것에 의한 결과이다.

주님을 늘 의식하려는 노력.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이시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순종한 행위와

말씀 그대로 순종해서 이루어내게 된 행동의 결과 탓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순종의  행위.

반드시 따라야 한다.

하지만, 누구나 다

언제나 다

항상 따를 수 있을까?

 나.

상당히 오랫동안 순종의 행위에 대하여서는 어림도 내지 못했다.

급하고 생각이 많은 성격과 '하지마라, 하라'라는 이야기에 대하여

거부감이 많았던 탓에

주님의 말씀을 행위에 옮기기에는 내적 부대낌이 많았었다.

그러면서도 순종하면 오는 그 평안을 알기에

그렇게 온전히 하지 못하는 내 행위에 대하여

난 스스로 죄책감도. 자괴감도,  안타까움도........

내 터부와 더불어 더욱 무거운 짐으로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첫사랑과 더불어 나에게 다가오신

성령의 체험은 날마다 수도 없이 지고

죄를 수없이 져도 어쩔 수 없이 또 주님 앞으로 다가갈 수 밖에 없었다.

 만일, 이 때

이 순종의 행위에 집중하고

나를 더욱 쳐서 내 행위 자체를 처절한 인내로 이루어 냈다면

상급은 커졌을 것이고 더욱 빨리 성장했을 것이다.

지금쯤 어쩌면 '성인'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 그 행위에 집중이 되어 버리고

내 성공한 행위의 실적에 내 관심이 쌓여가고

그 관심이 하나의 기록으로 남아가고

시간이 지나갔더라면

난 어쩌면 '딱딱히 굳은' 율법적 성향의 사람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을 내 주위나 내 가족,

혹 '선교'라는 위대한 사명으로 포장을 하고

내가 체험한 이 행동의 경험 책자를

전하려 애를 썼더라면

나는 유대인들의 '유전'과 유사한

또 다른 '사람의 계명'을 만들어 내서 전하는

그럴 듯한 '신앙인'으로 자리 잡고 있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과정에서 교회에서도 적당한 직분 정도는

차지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ㅜ.ㅜ;;;

 

 말하는 차이는 이것이다.

나.

실패하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에 매달리게 되고

부족한 나의 실패와 좌절을 통해

더욱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지난 수년간 얻었다는 이야기다.

말씀의 본질은 무엇이던가?

'하나님을 목숨바쳐 사랑'하고

'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두개가 아니던가?

행위?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과로 나와야 한다.

행위가 우선이 되면 본질에 가까이 갈 수 없다.

 

오늘.

주님이 그 말씀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

 ' 사람의 계명'

차이는 그런 것이다.

사람의 계명도 하나님의 10계명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본질이 약해졌다.

본질 보다는 행위가 앞섰다.

거기에는 '기쁨'이나 '감동' 등의 영적이고 감수성 민감한 단어가 들어설 틈이 없다.

정죄와 판단과 차거움, 효율....등의 단어가 우선할 뿐이다.

 

 나.

부족한 품성의 신앙인이다.

겸손이 아니다.

나같이 급하고 불안정하고 부정확하고

매사에 책임감 없는 자도 없다.

자식을 잘 기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들을 정말 깊이 사랑함은 없었던 자다.

부모에게도 아내에게도

전 사회를 위해서도 그렇다.

늘 가슴 속에는 비판과 정죄와 도덕만 있었지만

사랑과 이해와 긍휼과 용서와 인내..등의 열매는 존재하질 않았던 자 맞다.

진짜다.

 그것이 예수님 믿어가며

말씀 앞에 서려 노력하고

그 분의 그 평강을 체험하며 점차로

내 속에는 '성령의 열매'가 커지고 있다.

이제 ..이런 스스로의 소리를 당당히 할 수 있잖은가?

늘 '나 같은 것이.. ' 가 내 내부의 소리 였었는데...

 

 나.

앞으로 더 살아가면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큰 꿈은 없다.

그냥 주어진 여명을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빨리 천국을 가고 싶은 소망 뿐이 없다.

그냥 남은 바램이 있다면

마지막 얼마 남지 않은 이 내부의 터부를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빨리 녹여내고

남들에게 내가 가진 이 놀라운 평강의 비밀.

주님을 믿으면 어떻게 인생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영혼 깊숙이 각인 시키고

가능하시다면

'무디 '같은 대 설교자나

대단한 영성가를 하나 길러냈으면 하는 바램이다.

 55세 정도 넘어서

매년 한달씩의 단기 선교를 할 수 있는 여건과

변함없는 열정을 주어진다면 좋겠다.

내 자식들.

내 기쁨을 온전히 물려 받고

나보다 더욱 큰 꽃을 피워

그들이 사는 이 .. 주님없으시면 

지옥과도 하등 다름없는 아귀 같은 세상에서

한점 등불이 되는 자 되어

하나님을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전파하고 오는 자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ㅎㅎ

너무 바램이 큰가?

 

 

 

적용

1. 하나님의 계명을 명심하자.

  믿음이다.

  사랑이다.

 그것을 반하는 어떤 그럴 듯한 명분도 사양한다.

 

2. 주님의 기쁨을 묵상하자.

 주님은 자유다.

 적은 자극에도 흘릴 수 있는 눈물을 주시는 기쁨이다.

  전율이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한다.

 

3. 성질 덜 부리자.

 

4. 성경 여덟장 읽겠다.

 율법이 되지는 않는다.

 기쁨을 배가 시키기 위한 나와의 약속이다.

 

5. 한마디 전도하자. 

 그들의 기쁨이 될 수 있다.

 

6. 내 자식들을 위해

 그들이 내가 아는 이 주님의 평강을

 더욱 깊이 알아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 힘이 있어지기를...

  하루 바삐.. 그러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계명을 우선하고

인간의 계명은 그 후에 위치하게 하소서.

서로 무시하지는 않되

주님 안에서 느끼는 그 자유를 위하여

가벼운 세상의 것은 무시하게 하소서.

 유혹과 욕심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놀라운 평안임을 기뻐하게 하소서.

예수님.

모두 주님 안에서 평화 누리게 하소서.

특별히 내 자식들 지키소서.

내 식구

내 친구

내 형제

내 이웃.....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7년 양문교회 호산나 성가대 시절..)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세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 주 복음 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 길 다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 지라도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 주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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