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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된 하나[창11:1 - 1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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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된 하나[창11:1 - 11:9]

주하인 2014. 1. 17. 08:58

바다와 하늘과

비행기가

하나처럼 보임

 

하늘 안에서

녹아들어

구름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

 

어디가 바다인지

어디가 하늘인지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알수는 있지만

 

구분하지 않아서

그 자체로

더 아름다운 것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된 자들의 

마땅히 누리고

나아갈 바가 아니던가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하나됨.

 

하나님 안에서 하나되면

그게 천국이 아닌가?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러기 위해서는

'견고한' 신앙은 필요하다.

하지만 견고한 '자아'는 녹아 나야 한다.

단단한 게 늘 튼튼한 것만은 아니다.

역청으로 발라 더욱 든든하면 좋을 것 같지만

그 역청의 단단함은 '자아'를 의미한다.

 하나님 안에서 견고한 신앙은

진흙의 역할 정도의 든든함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성령의 '물'의 도우심으로 지어져야 할 부분이다.

 

 아니다. 

실제로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아의 죽음'이다.

자아의 십자가에 못박음이다.

그것은 '견고한 신앙' 즉, 틀이 강한 신앙이 아니고

오히려 틀을 부수는,

오늘의 바벨탑 같은 '탑', 안전한 보장처같은

역청과 벽돌로 단단하게 막아둔 '틀'이 없는 신앙이다.

틀은 '자아의 강함'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부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가 된다.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어디나 '하나'를 주장한다.

통일과 융합을 주장한다.

그런데 ' 세상'과 '미성숙한 신앙' 일 수록

'자신'으로 남이 들어오는 '하나'를 주장한다.

즉, 흡수 통일이란 이야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 , 혹은 '내'가 쌓은

강력한 '틀'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적'으로 간주하고

강하게 차단한다.

 그것.

그래야 '안전감'을 느끼고 그들 만이 느끼는 '동질감' 속에서

잠시 서로의 닮은 느낌을 즐길 수는 있지만

곧 변질되고 무서운 집단으로 변한다.

 

그 대표적인 성향의 집단들이 있지 않은가?

'이단' 집단들,

일본의 극우주의 자들

독일 히틀러

북한 김씨 왕국...

...... 수없이 많은 세상의 자기들 만의 틀 안에서의 '하나'됨과

그로 인한 하나되지 못한 다 판단되는 자들에 대한 극도의 패악들...

아니, 멀리갈 필요가 있던가?

 

 오늘 아침에 'Daum' 검색 순위 1위에 오른 '이정희 대표 기자회견' .

그 분 .

인격적으로 공격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실제적으로.......망한 이데올로기에

정신을 완전히 잃어

그 틀에서 자기만의 강력한 '자아의 벽돌'로 바벨탑을 쌓고

역청으로 발라 외부의 공기가 나가지도 그들 안쪽의 사상의 탁한 ...

산소 부족한 오염된 공기만 마시고

하나된 구호를 외치는 자들.

 잘 모르는 자들이 보아도

그들의 섬뜩함은 '이슈'거리가 되기도 충분하다.

그것은 그들은 그들 '탑'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착각하고

외부에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길 수도 있을 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별종'들이고 '도태'될 자들이고

누가 보아도 옳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두려움' , 그들의 인생을 걸고 추구하던 이념이 틀린 것임을 인정하는 순간

지난 세월이 무너질 두려움을 막기 위한 '틀'일 뿐이다.

 

 그런, 하나는 틀리다.

 

 하나님이 원하심은

바벨탑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맑은 세상, 우주에 흐르는 하나님의 무한한 에너지를 호흡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 아픔'이 경험이 될 것이다.

그동안 가지고 왔던 수많은 '가치'와 ' 우주관' '세계관'이 깨지는 아픔이 있을 것이다.

살아왔던 시간들이 전혀 가치가 없을 것이란 허무함이 그 마음을 뒤 흔들것이다.

어쩌면 일부는 익숙한 삶의 터나 습관과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굉장히 두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알 껍질, 틀을 깨어야 한다.

그래야 큰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다 .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세상은 넓고 크고 광대하다.

훨씬 맑은 공기다.

 

 문제는 그런 바벨 탑이 무조건 나쁜가 하는 것이다.

 

 신앙은 무조건 옳고 무조건 틀린 것은 없다.

하나님 믿음도 마찬가지고 세상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는 제도 안에서 교육을 받는 다.

나름의 습관을 쌓도록 틀 가운데서 훈련을 한다.

점점 더 견고한 틀을 쌓도록 훈련을 받는 다.

빨리 튼튼한 자기만의 습관 ( 특별히 한국에서는 '공부 습관 ^^;;)을 쌓을 수록 좋다.

그리고는 대학을 들어가고 대학원 건너

혹은 의사의 경우..^^*..전문의 따고 나면

자유로와진다.

그때는 틀 안에서 제재를 받지 않고 살지만

훨씬 더 고급스러웁고 자유로 서로를 존중하며 살 자질을

세상에서 인정받는다.

그거다.

틀은 나이들어서까지 주장하면 그것은 ' 퇴행' 이고 '망상'이고 정신병이다.

즉, 성장에 따라 틀은 점점 소용이 줄어들고

자유에 의한 '조화의 하나' 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비단 그 '바벨탑'이 세상에만 있는가?

내 안에는 없는가?

 바벨탑이 무언가?

내가 안전하기 위하여, 안전감을 느끼기 위하여 둘레를 단단하게 치는 것.

비록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나만의 하나님으로 단단히 둘레를 세워

남을 들어오게 하지 못하게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도 않으려 하고

듣는 사람들만 자신의 틀안에 오게 하여

그 안에서 '우월감'을 공유하고 있는.. 그런 틀 !

 있다.

아니다.

많다.

그런성향이 너무나 많다.

인정한다.

그러기에 내 삶은 그 틀을 깨기 위한 '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한 과정이었다.

그래서 많은 깨달음을 이루어 냈고

그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느낌으로 내 삶은 훨씬 풍요로와졌다.

내 생각이다.

...

그런데 어느새 난 또 내가 아는 하나님의 '틀'로써

나의 성을 더 번쩍 거리고 크게 짓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이 귀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경시.

나와 달리 생각하는 자들을 단절............^^;;

그런데, 말씀에 의거하여 그렇게 하고 있다고 아직은 판단하기에

나름 '휴우~' 는 하고 있다.

오늘도 보라.

이렇듯 내 속을 들여다보고 투영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 않는가?

 

 그렇다면

틀을 깬자들의 유익은 무엇인가?

 

 우선 ,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하나님의 소리를 더 잘들을 수 있다.

공기 중에 스며들어 계시고

바라보는 꽃에 투영되어 계시고

머리들어 쳐다보는 하늘에 계시며

눈 감으면 내 속에 계시고

어려울 때 내 우편에 앉아서 날 휘감아 안으시는

그런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의 살아계심을

피부로 느낄 기회가 높아진다는 이야기다.

 이것.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자들은

누구나 '끄덕~' 거릴 수 있는

정말 중요한 '기쁨'의 체험들이 아니던가?

아니다.

단지 체험 뿐인가?

하나님이 그냥 감각적, 감정적 수준에서

우리의 시심을 자극하고 마실 분이시던가?

온갖 영육혼의 유익은 일러 무엇하던가?

그 분께서 '말씀'으로 약속하신 그 모든 것의 실제가 내 것이 된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기에 하나님을 더 가까이, 더 자유로이 느끼게되는 자들은

세상을 살되 하늘 나라를 사는 자들이다.

이 땅을 살되 천국을 사는 자들이다.

고민이나 걱정이 그를 사로 잡아도 오히려 자신도 모르는 감사로 세상을 살 수 있다.

 물질 문명을 그렇게나 누리면서 걱정없이 살 것 같은

현대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힐링'이나 '슬로우'나 '웰빙'이니 ' 템플스테이'등을 찾아 다니는 것..

그것은 그들 안에 '행복함'이 없기 때문이다.

  감사는 '행복한 자'들이 발하는 탄성이다.

'행복할 자'들이 해야 할 마땅한 '감정의 현상'이다.

즉,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 하나님과 쉽게 만나는 자들은 행복해진다.

 거기에 나타나는 현상들은

수용성의 증가다.

남을 이해함이 늘어나고

그들의 올바르지 못함은 받아들이지는 않는

지혜로움의 증가도 포함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알기에 '자유로와'짐이 늘어난다.

.......

이외 형용할 수 없이 많은 유익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탑'을 쌓지 말아야 한다.

얼른 '틀'을 걷어내야 한다.

우리는 어서 우리의 '틀'을 깨고 우리 안의 바벨탑을 무너뜨리는데 동참해야 한다.

 

습관과 자아의 기준을 걷어내는 '아픔'은 크다.

수십년을 붙들고 살아온 가치 기준을 내린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과 더불어 '상실감'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하나님은 절대로 혼자두지 않으신다.

타 道 .. ^^;; .. 에서는 극도의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하나님은 '기도'와 '순종'의 믿음만을 요구하신다.

그러고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

그 우주를 관통하는 '에너지'로 우리를 감동 , 감전시키신다.

그러면 된다.

그것은 '아픔'이지만 '기쁨'이고 행복이다.

 

 난.. 안다.

분명히 아는 자다.

잊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매일 이렇게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니

그게 은혜다.

 하지만, 아픔과 '저항'이 있다.

그것을 알기에 힘들지만 오늘도 더 힘을 낸다.

곧 보일 ,

더 큰 하늘과

더 맑은 바람과

더 청명한 세상을 기대하며.. ..

 

 

주님.

지난 밤을 잘 보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당직방에서

비록 하나님과 더 가까이 보내지는 못했지만

사고 없이 지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모든게 하나님의 은혜이십니다.

내 .. 살아계신 하나님 말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주여.

올초에 들어서

이제 근원적인 부분에 맞닦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을 통해서 그 부분과 맞닦드리지만

그것을 이전처럼 몸부림 치며 가리려 하지 않습니다.

내 틀을 더 쌓아서

그안에 역청으로 공기조차 통하지 못하게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깨려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

아픕니다.

때로는 살이 찢어질 듯 아픈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다시 하나님이 계시는

그 곳의 공기, 은혜로 저를 녹이십니다.

그래서 또 버팁니다.

주여.

점점 더 강해지는 십자가의 위력으로 저를 믿음으로 이끄소서.

완전히 하나님 안에서

내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혀

나는 없고 주님 만 내안에 사시는

그 체험이 제게도 일어나게 하소서.

내 자존심 상할 때도 기뻐할 수 있게 하시고

내 유익이 손해를 볼때도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제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되길 원합니다.

주님의 성령으로 매일 하나가 되길 원합니다.

 

특별히 간구할 것은

남의 이야기를 더 잘들을 수 잇는 능력을 주세요

듣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되

아닌 것은 아닐 것으로 아는 지혜와 담담함을 주소서.

주여.

오래된 습관들,

지나친 비판과 거기로 파생되는 입의 거침은 막으소서.

그 틀들,

그 안에서 아직도 움직거리는 '저항',

오래된 소리들을 제하여 주소서.

역청처럼 진득하게 달라붙어

내게 꼭 필요할 것처럼 혼돈 시키면서

영적 호흡을 차단하고 심리적 갈등을 유발하는

이제는 필요없는 과거의 흔적들,

사단의 갈퀴들을 제하시고 녹이소서.

그리고 말리소서.

그래서 주님의 말씀대로

조건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그들보다 낮게 여기게 하시되

제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호흡하는 것만으로

이 기쁨을 깨닫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 되게 하소서.

간절히 빕니다.

내 주여.

나를 위하여 내 주위를 위하여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도구가 되게 하소서.

내 주시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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