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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함의 실체( 출 32:1-14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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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함의 실체( 출 32:1-14 )

주하인 2009. 6. 12. 12:13

 제 32 장 ( Chapter 32, Exodus )

 

 

주하인아.

해가 지는 것 같으니 조급한가?

뉘역하니 외로워지는가?

다 끝날 것 만 같은가?

정말인가?

 

속좁고 조급한 상황 판단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주님의 뜻은 이어지고 말 것이다.

쭈~~욱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더딤을 보고' 

아론에게 이르러서 일어나라 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하여 신을 만들어 내라 했다.

모세 보고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해낸 사람'이라 했다.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그러자, 아론이 멋지게 '금 붙이'를 가져오라 한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그리고는 만들어 냈다. 

금송아지 형상의 '신'을 ...

그러면서 멋지게 선언했다.

'애굽 땅에서... 너희 신..이다'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또 그리고는 단을 쌓고 여호와의 절일을 선포했다.

멋드러 보여지게...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또한 번제도 드리고 화목제도 드렸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그리고나서는

앉아서 먹고

일어나서 뛰놀았다.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찌 저럴 수가?

 모세가 올라간지 얼마나 된다고 저런 행동을 할까?

하나님의 기적을 본지 얼마나 된다고 저럴 수 있을까?

 무지한 사람들 무리인 군중을 떠나서도

아론은 또 왜 저러는가?

 그 분의 심사를 예측할 몇가지 단서를 찾아본다.

' 더디게 내려오는 모세에 대하여 초조함 내지 두려움'

' 무리가 주는 중압감'

' 감동을 쉬 잊는 인간의 원죄적 결점'

.. 등 한마디로 '조급함으로 야기되는 한계 '로 표현되는 이 상황이

이 아론으로 하여금 모종의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필이면 왜 '금송아지'인가?

송아지가 주는 어떠한 이미지가 하나님과 연관되어지게 만들었을까?

참으로 종교적 대상에 대한 생각은 알 길이 없다.

힌두교의 '소'를 숭배하는 사상이나

브라질 밀림 깊숙한 곳의 원시 부족 중 '메기'를 숭배하는 사상이나

뱀을 숭배하는 사상.....등 고대나 원시종족들의 사상에서 유래하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상징적 현상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던 그 기적을 연관 짓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연관지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논리는

그 아론이 이후에 선언하고 지켜나가려는 성일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절기와 제사 행위와 별반 다를 것 없다는 데서 나온다.

 

 그 아론의 마음을 한번 들여다 본다.

우선, 군중의 힘에 대한 두려움이 었을 것이다.

자신을 이끌어 가던 절대적인 존재이던 '하나님의 사자 모세'가 빈 공백에서

그는 군중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었다.

그의 영혼은 당연히도 '리더'라는 portion에서 비어 있는 것이다.

주님이 허락지 않으셨는데..

그러나 , 상황에 몰리자 그는 빈 영혼의 공간을 '허위'로 채우기로 결심했다.

또한 알게 모르게 그 마음 속에 리더 자리에 대한 욕심이 있었을 줄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하여 군중을 진정 시켜보려 하였을 것이다.

 그 허위는 그의 경험과 이스라엘 민족에 형성 되어진 어떤 영적 공통상황에 의거하여

'송아지'가 떠올려 졌을 것이고

그러한 대상물, 즉 우상을 지금까지 모세가 흐릿하게 보여주던

하나님을 형상화 시켜 놓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우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으려는 인간의 속성을 만족시켜

일순간 무리로 하여금 진정을 가져오는 효과를 보였을 것이고

그 진정을 지켜본 아론은 그것이 마치 '진리'에 의하여 이루어진

어떠한 현상임으로 잘못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러자 ,힘을 얻은 그는 카리스마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마치 리더로서 하나님께 직접 지위를 부여 받은 자 처럼

당당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머리 속에는 불꽃 처럼 자신감이 일게 되었을 것이고

그 자신감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자신의 지휘를 발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란 판단으로

멋지게 여러가지 '명'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허상,, 허위. 우상..이라는 표현을 하게 되었다.

이 우상의 특징은 어떠한가?

 일단 '사람들의 필요를 위하여'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그러신가?

하나님은 홀로 계신 분이시다.

 또 우상은 형체로 구체화 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 아니시다.

누구도 알 수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을 보면 거의 대부분 죽을 수 밖에 없다.

 그 앞에서 앉아서 먹고 서서 놀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우상은 '쾌락'의 도구다.

하나님은 '기쁨의 원천'이실 뿐이다.

그 분은 때로는 고난을 통해서도 당신의 놀라운 평안을 주신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는 과연 '우상'의 위험에 안빠질까?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고 구제하고 선교한다고

또한 기도생활 열심히 한다고 과연 '우상'의 위험에서 자유로울까?

 

 정말 오랫만에 기도원에 갔다.

아...........................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이다.

과장이 아니다.

마음이 불콰했던 상태였지만

앉아서 주님께 집중하는 그곳은 세상과 다른 곳이었다

이처럼 편안하고 선한 생각 들이 쏟아지는 곳이 또 있을까?

목요일 철야 기도.

졸리기도 말할 수 없이 졸리다.

그러나 기쁘다.

육신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영혼은 춤춘다.

아..

깨달은 것이 있다.

그동안 찬양을 할때 버겁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었다

내가 나를 위하여 불렀던 것이다.

주님이 채워주는 기쁨으로 부르는 찬양은 훨씬 영역이 넓어지고

바이브레이션이 놀랍다.

염소의 음메하고는 차원이 다른 놀라운 감각이

내 성대 깊은곳에서 느껴진다.

아.. .최고다.

 목사님이 그러신다.

기도생활, 신앙생활 한다고 다 예수님 믿는 자들인가?

아니다.

오직 성령의 기쁨으로 충만한 후 이어지는 기도와 헌신과 구제...만이

주님을 믿는 자다.

 맞다.

아론은 하나님을 생각했다.

하지만 우상을 섬겼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 열심으로 기도하지만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다른 형체를 보고 있지는 않을까?

 목사님이 그러신다.

주님.. 주님.. 해도 예수님 믿지 않는 분이 있을까?

있단다.

그게 그거 아닌가?

아론의 금송아지 쪽으로 하나님 제사 지내는 것.

 

 난

오늘 무엇을 보고 기도하는 가?

정말 난 바른가?

아직까지는 그렇다.

 주님의 기쁨으로 세상을 살려는 노력.

그것이 아직까지 '주하인은 우상'에게 기도하지 않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감사하다.

 

그렇다면 아론의 그 우상을 만든 기본은 무엇인가?

'조급함'이 우선이다.

기다리지 못함이다.

주님을 앞섬이다.

모세가 내려옴은 성령의 응답을 상징한다.

내가 옳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아론의 심사를 추정해도 그는 '우상'을 만들 당시 '확신'에 차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도로서 행하는 기쁨을 믿고 있었을 줄 모른다.

이게 중요하다.

기쁨처럼 보이는 '자기 만족'은 일시적으로 사단 도 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성령의 열매'에 속하는 것이냐 아니냐다.

기쁨도 선한 기쁨이어야 한다.

기다림에 응답받은 인도이어야 한다.

특별히 리더분 들은 그렇다.

평범한 우리 주모 같은 자들도 삶의 매 영역에서

주님께 기도하고 기다리고 응답받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도받는 결심이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신앙적 삶'이고 신행일치의 삶이고

그것이야 말로 썩어질 이 육체의 생리적 변화에서는

도저히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생의 목적'에 대한 유일한 답이다.

그게 삶의 이유이다.

 

 그런데 하나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아론이 모세와 함께 있을 때도 그렇던가?

앞으로도 그럴 기회가 있던가?

아니다.

그는 큰 하나님의 틀 안에서 안주할 때는 빛나는 신앙인이다.

이러다가 모세가 없고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가 시작될 때

그의 조급함은 폭죽을 터뜨린다.

이 조급함은 폭도적 무리의 그 조급함의 에너지를 받아 다시한번

불꽃을 튄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지금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지금은 나름대로 안정된 모습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가운데 거하니

나름대로 거룩한 듯,

남들보다 나은 듯 잘난체하는 주모도

저러한 환경, 관계 속에서 들어가도 온전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가?
 아론의 모습을 닮은

현 교회 내의 상당히 많은 분들 가운데서 금송아지 모시지 않는 분들처럼

나도 피하지 않고 그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다가도

정말 안정된 믿음을 유지할 자신이 있는가?
 불행이도 없다.

 

그렇다면 이 묵상의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주님 만을 바라보고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은 쉽지만

세상의 거친 흐름 속에서 그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고 살

아론이나 모세와 같은 신앙인,

바울 사도와 같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나름대로 위치를 공고히 다시 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느 정도 길을 알았으니

그들 사이에서 순서를 정해야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세상을 살되 주님을 잃지 않는 것'이다.

세상을 주유하지만 천국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제 기도원 목사님의 말씀대로

성령 충만이 된 후에 일이 진행되는 것이고

오늘의 아론이 모세를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고

내려놓음의 저자의 변, 처럼 주님을 앞서 나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조급을 좇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기다림을 배우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순서다.

목표를 세우고 기다리고 인내하되

세상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주님.

오늘은 조급함과 관계 속에서의 지혜에 대하여 묵상했습니다.

주님.

제가 아주 부족한 말씀입니다.

저에게 기다리는 인내를 주시고

기다리며 흔들리지 않을 지혜로

조급함을 내려 놓을 확고 부동함을 허락하소서.

모세로 대표되는 성령이 오셔서 나를 인도하실 때까지

내가 계획한 일을 인내로서 기다리게 하소서.

주여.

아론의 앞섬을 보지 않게 하소서.

그들의 그 어리석은 방종을 보지 않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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