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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제

주하인 2006. 10. 16. 13:33

( 아가페 마을의 요셉 초등학교 아이의 해맑은 웃음

 

제가 어제

오후 예배 기도하다 울먹 거리고 말았습니다.

창피하게요.

 

그게 그랬습니다.

 

슬퍼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억울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냥 눈물이 났습니다.

 

아니

아마도 감동해서 그랬던 듯 싶습니다.

 

참으로

오랫만의 일이었습니다.

한동안

그리도 충만하던 시상이

어느 순간인가 뚝 그치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 일상이 그저 그리 흘러갔었습니다.

 

그렇다고 큰 혼란은 예전 만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이랬습니다.

 

찬양 연습을 하고 있는 중

한시간 늦게 차를 몰고 교회로 향하는

얼마전 사고낸 아들녀석이

또 한번 사고를 냈다는 겁니다.

접촉사고요.

 

집사람 푸르르 떨면서 전화를 받더군요.

그러면서

저를 바꾸려는 걸

매몰차게 내 말 안듣던 걸 탓했습니다.

집사람이 대신 아침예배 뜨문뜨문 참여하면서

심하게 당황하면서 사고처리를 하였던 모양입니다.

 

제 속에는 막연한 화보다는

내내 두가지 마음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정죄하는 마음과

주님을 의식하는 마음 말입니다.

 예배하며 머리가 복잡했었습니다.

 

그러나

'말한마디'라는 복음성가를 성가대에서 부르면서

전 응답받은 줄 확실히 알았습니다.

'위로의 말~한마디 아픔을 씻어주고~~♪'

주님은 아들에게 절대로 나쁜 말 하기를 원치 않으신 겁니다.

이거야 말로 주님의 확고 부동한 명령이 아니겠습니까?

전 절대로 아이에게 나쁜 소리는 한마디도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요.

마음이 정해져 버리니

돈문제니 교육이니 다짐이니

아무것도 고민할 거리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난 그냥 좋은 격려의 언어만 사용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찬양은 연습한 것 보다 훨씬 은혜로왔습니다.

그 찬양은 슬픈 노래가 아닙니다.

그러나

부드럽게 부르며 깊은 떨림이 있는 찬양은 주님의 평온이 더해지니

은혜롭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사정을 모르시는 목사님도 찬양에 대하여 여러번 칭찬을 하셨습니다.

 

예배 끝난 후

걱정되는 눈초리로 들어온 아이를 난 맑은 얼굴로 맞을 수가 있었습니다.

정말 제 속에

그 아이를 질타하고픈 의욕이 티끌조차 남지 않은 맑은 얼굴이었습니다.

아이가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점심 식사 후

목사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나서

대표기도 시간이 돌아 왔습니다.

 

 당당히 나가 마이크를 잡는 순간

이해할 수 없는 목메임이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에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이자리에 불러서

기독교인이란 이름을 주시고

성도라는 자격을 주시며

참으로 좋으신 분들과 하나의 연합을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

겨우 겨우 말을 이어갔다.

기도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을 때

내 눈에 눈물이 함박 만큼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머리 속을 뒤져도

인간적인 감동거리를 찾을 길은 없었습니다.

그냥

경험적 이유를 들어 하나를 알수가 있던 겁니다.

 

은혜 받은 겁니다.

성령이 운행하던 겁니다.

 

전 그렇습니다.

성령이 운행하시면

제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튀어나옵니다.

목소리의 깊이는 훨씬 깊어지고

떨림이 있는 가봅니다.

 

 이유를 살펴 보았습니다.

주님의 응답을 제대로 받았고 

주님 뜻대로 준행하고자 순간 결심했고

그후 내 속에서 벌어지는 평온을 주님의 임하심으로 제대로 이해하였고

결과

감동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몇차례의 경험이 쌓이면

오늘 엘리사의 쏘아보는 눈빛의 의미가 이해될 것이고

그분의 울음이 나에게도 허락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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