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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붙잡으소서 (요20:24-31) 본문

신약 QT

절 붙잡으소서 (요20:24-31)

주하인 2009. 4. 14. 10:17

   제 20 장 ( Chapter 20, John )

 

꽃무리를 보아야

봄이 옴을 알수 있단가?

안봐도

세상의 생기로

봄이 왔음을 알 수 있지 않던가? 

그래도 그래도

이 화려한 꽃을 보고서라도

봄을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봄이 와도

마음 만은 

겨울이 아니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빈다.

 

 

 


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이 사람은 왜 이리도 의심이 많던가?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주하인에게도 평강을 주소서.

더욱 더 큰 평강요.

감각의 안정감을 넘어서는

환경과 이유에 상관없는 평강요.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안보고도 믿으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지만

안보고  믿는체 하는 것이나

보고서도 못 믿는 것  보다는

보고라도 믿을 수 있는게 더욱 좋다.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 예수님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맞습니다. '
 당연하지만 당연한 게 힘들 때가 많다.

 

 요새 세대는 자꾸만 주님 믿는 다는 게 부끄럽게 느끼도록 하는 세대다.

기독교인들의 탈 불법의 여론화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영적 세계나 신비에 대한 경시하는 풍조로

부활 등의 개념이 우습게 보이도록 하는 현상.

 문명의 발달과 개인화의 극대화로 인한

일방적 강요 같은 진리를 거북스러워 하는 마음.......

많은 이유가 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라 고백은

어쩌면 좀 뜨악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을 수 있다.

 열심히 더 세상에 충실하고 논리적이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향해

매진 한다면 더 좋을 듯 싶은 데

어쩌면 뜬금없는 유아적 행위처럼 느껴지도록 하기도 한다.

 

 발칙한 큐티.

수년간 거의 매일 같이 하나님 말씀에 나를 비추는 노력을

이곳에 담아왔다.

 하루하루 쓸 때마다

어떤 때는 주님 말씀 앞에 서도 죄를 짓는 내가 죄송해서

어떤 때는 쓸데 없는 언어의 유희가 아닌가 하는 의혹으로

어떤 때는 괜한 취미생활 아닌가 하는 흔들림으로

어떤 때는 남들과 다른 유치한 시간 소모 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 그냥 그냥 버텨왔다.

그 버팀의 가장 큰 기둥은 은혜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

그리고 묵상을 하고 블로그를 정리하면서

내 안에 중심으로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한 바램은

'예수님은 내 주시고 내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이다.

그 고백이 세상에 뻗쳐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큐티를 하고 정리를 하고 그것을 세상의 보는 모든 자들에게 나눈다...는 것이

이 발칙한 큐티의 기본 목표로 잡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고착되는 시간이 길어지 수록 확신이 강해진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듯

오늘 도마가 그렇듯

생각과 감성으로 주님을 느끼고 주님을 확신하는 데는

어딘지 모를 빈틈이 나를 치고 다닐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가장 큰 것은

'보지 않고 믿는'

정말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의 정말 반딧불이 비치는 빛보다 적은

이 적은 믿음은 스스로 생각하기 가련하기 짝이 없을 때가 많으며

그럴 때, 아니  짓는 일상의 죄로

흔들릴 때마다 '과연 이게 내가 할 자격이나 있는가?'한다.

그 때 주님은 흐릿하게 보일 때가 많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주님 나에게도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소서' 다.

그래서

절대로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싶다.

확실한 믿음이란

비바람 속의 항공모함 속의 흔들리지 않는 평강을 의미한다.

누가 뭐래도 화도 내지 않고

어떻게 성공하고

어떻게 칭찬을 받아도

그리 기뻐하지 않는 고요한 평강의 기쁨으로 만 인식되는 상태다.

먹구름과 천둥 번개가 쳐도 그 구름위를 걷는 안온함으로

홀로 있어도 외롭기 보다는 주님의 임재로 뿌듯한..............

평강의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을 온전히 내 구주로 온전히 내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전혀 믿음에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확실함에 따라 다르다.

 정신이 없이 주님도 알아보지 못하던 마리아가 주님을 뚜렷이 보고 깨닫던 것처럼

의심 많던 도마가 주님을 뵙고 주님 앞에 무릎꿇고 소리질러 고백한 것처럼

내 영혼에도 주님을 절대로 , 단 한톨도 의심하지 않는

그런 믿음으로 성장하길 원한다.

그래서, 확실하게 주저없이 마음에 부끄러움없이

'주님은 내 하나님이시다'다라고 소리소리 지르길 원한다.

 

  이 블로그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그리 되시길 원한다.

 

 

적용

1. 성경 일곱장 읽겠다.

 말씀은 살아계신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 다시한번 확실히 보길 원한다.

  이해보다는 확신하는 말씀을 원한다.

 생명의 말씀을 영혼에 받아들이길 원한다.

 

2. 주님을 간절히 사모한다.

 

3. 블로그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주님 예수님에 한점 의혹없으시길 기도한다.

 

4.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길 기도한다.

 

5. 세상의 것들은 멀리가라.

 나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고린도 후서의 말씀이 내 고백이 되길 원한다.

 세상은 살되 세상은 주님 만나는 기회일 뿐임을 명심하자.

 

 

 

기도

 

주님 예수님

살아계심을 압니다.

내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하지만, 주님

가끔은 머리 속에서 변덕이 죽끓듯하고

마음은 자주 멍해지고 있답니다.

아직도요.

세상을 보면 주님을 잊는 때가 수도 없이 많고요.

어느새 제 자아가 주님 앞을 가로 막아

생각이 멀리 달아날 때가 있습니다.

벌써 아침에 나올 때도

내 자아의 안전을 도모하는 계획들이 절 사로 잡았었습니다.

금방 머리 턴게 주님의 은혜였지만

제가 그런 자 올시다.

주여 불쌍히만 여기시고

세상의 어떠한 달콤한 유혹과 논리와 장란에도

그것들은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도구일 뿐이란 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저로 흔들리지않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도마처럼...흔들리는 이 어리석은 주하인에게

주여

도마처럼 흔들리지 않을 믿음을 주소서.

주여.

하나 더 바라올 것은

제게도 실재의 예수님을 뵐 기회를 주소서.

간절히 소원합니다.

꿈이든

환상이든

소리든........

부족한 저로 흔들리지 않을 증거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수님.

절 붙잡으소서.

주님을 이유로

주님의 생명으로

주여 절 붙드소서.

주님의 십자가로 저의 부족함과 의혹을 못박으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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