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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늦지 않았다 (요 19:31-42 )

주하인 2009. 4. 11. 11:10

제 19 장 ( Chapter 19, John )

 

 

 

비록

작은 자여도

숨은

하늘을 향해 쉬고 싶다.

온통

주님의 십자가로만

들이쉬고 내 쉬어

전 영혼을

주님의 생기로

물들이길 원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 부터라도

주님의 하늘을

죽도록 원한다.  

 

 


  
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처참하다.

하지만 그래도 빨리 돌아가셨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고통은 심하지만 기간은 짧게 하셨다.

'그날을 감하리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고통은 필연이지만 어찌할 수 없는 필연이나마

주님의 뜻안에서 쉬이 지나가게 하소서.

주여.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아리마대 사람도 두려워 하던 자고

니고데모도 그렇다.

 그러기에 숨어 다닌다.

요셉은 은휘하고 니고 데모는 밤에 나왔지 않던가?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 돌아가시자 마자

즉시

예수님 쪽으로 나아 왔다.

최선을 다하여 섬겼다.

보라.

요셉은 빌라도에게 시체를 달라는 목숨을 건 용기를 발휘하였고

니고데모는 몰약 등의 비싼 것을 들고 오지 않았는가?

 

 그렇다.

요셉이나 니고데모로 대표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나 결단하지 못하고 세상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자들을 암시한다.

거기에는 미성숙한 주하인도 포함이 된다.

그러한 자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이다.

 

" 아직 늦지 않았다. "

" 결단하라 "

" 그래 그 모습 그대로여도 된다.

  할수 있는 한도에서라도

  최선을 다하라. "

그러시는 것 같다.

 

그들이 모두 저 시간 이후 온전한 결단을 하고

주님의 열렬한 사도로 된 기록은 없다.

사도 행전에도 그리 나오지는 않는 것 같다.

힘이 된다.

의욕이 생긴다.

주님은 부족한 모습이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삶과 결단을 인정하시는 것 같다.

 

 또한, 

 이들의 이러한 조심스러운 ,

그러면서 주님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 예수님의 육신이 장례식이 이루어 지게 하시니

그것이 놀랍지 않은가?

 

 내 부족함?

주님에 대하여 죄송스러움?

그것 당연하다.

 늘 주님 앞에 죄인 심정으로 회개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기회가 될 때 최선을 다해서 주님께 정성을 올려야 한다.

 하지만, 죄책감은 금물이다.

내 부족함을 가지고도

내 한없이 늦어서 기회가 없을 것같은 절망의 시기도

주님은 다 들어 쓰신다.

 

아직 늦지 않았다.

 

   
41.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주님의 예비하심은 또 이렇다.

새 무덤으로 준비 하셨다.

가까운 곳이었다.

동산 안에 있었다.

 

 그래도 가장 좋은 배려시다.

 

 만약 내가 예수님의 입장 이라면 - ^^;;;-  '죽기 전에 잘 되어야지 그게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우주적 흐름 안에

어쩔 수 없이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 - 비록 예수님 정도는 아니어도

내가 겪는 고통, 고난,  이 지긋지긋한 힘듦이 우주적 사건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는가?

주님과 나 만의 우주적 고난이다.  모든게.. - 안에서

하나님은 그나마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신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이지만

그 고난은 무슨 원인이지만

주님이 우주적 원인으로 허락하신 것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고난을 슬퍼하거나 버려버려야 할 징그러운 것으로 여겨야 할

당위성은 떨어진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허락하신 것인데,

더더구나 주님은 그 고난을

가장 빠르게 없이하시고

감하시고

그 후에도 최선을 다한 After-servise 하실 것임을 보이시는데

 슬퍼할 것은 없다.

오히려 그 분 하나님의 세심함을 기뻐해야지.

그 분의 약속을 기대해야지.

 

차이는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준 -고통은 없어야 한다-에 의하여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만

주님은 주님의 우주적 기준에 의하여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그 고난이 비록 내 죄에 의한 것이라도

니고데모나 요셉을 보아서도 그리 늦은 것, 나쁜 것 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 어리석은 지체함을 통하여 주님은 주님의 것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적용

 

1. 아직 부족한 것 같아도 받아 들이자.

 스스로..

 남도..

 

2. 늦은 것 같아도 좌절 말자.

 나 스스로 ,

 남에게도

 

3. 주님은 모든 좋은 것을 주심을 믿자.

 늘 기다리자.

 

4.  주님 주시는 게 나랑은 달라도 그것은 최선이다.

 주님은 가까운 곳에

 어딘가 결단 부족한 니고데모와 요셉을 통해

 가장 좋은 무덤으로 마련하셨다.

 그것은 그 분의 사랑의 방식이다.

 

5.  주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자.

 내 모든 것은 주님의 사랑 탓이다.

  돌아보자 .

 돌아보면 확연히 느껴진다.

 

 

6. 자식과 아내를 더 이해하자.

 요셉과 니고데모일 수 있다.

 

7. 성경 일곱장 읽겠다.

 

 

 

기도

 

주님.

오늘은 부족한 스스로에 대하여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늘 이게 마지막일 것 같고 다 끝난 것 같고

나만 최고로 부족한 것 같은데도

주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니고데모와 요셉의 모습을 보며

이제라도 최선을 다하는 자로서 거듭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후의 내 태도가 다시 옛날의 그 흐지부지

지금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다시 돌아갈 위험성이 다분하고

지금의 내 결단이 일과성이 아닐까 걱정이 되어도

그 것 마져 주님은 다 아신다는 말씀으로 받습니다.

그 부족한 결단,

나의 이 부족한 믿음 마져 극복하려 선택하는 순간

주님을 의식하는 마음을 놓치 않는 순간

주님이 날 위로하신다는 것을

날 기뻐하실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

부족한 자 들을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일부분을 담당시키시는 것을 보고

다시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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