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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 요21:1-14 )

주하인 2009. 4. 15. 11:51

제 21 장 ( Chapter 21, John )

 

 

죽을 때까지

이런 아름다움을

꽃 피울 수 있길 원합니다.

 

주여.

성령으로 절 잡으소서.

성령 충만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도

뿜으리이다.

주여..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 그 후에'다.

살아나신 예수께서 베드로 일행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후'다.

 

성령 체험.

성령충만.

성령세례... 등 다양한 말이 나온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성령세례는 성령을 체험한 이후

주님이 예비하신 개개인의 일정시간이 지나간 후

쏟아 붓는 성령의 체험으로 성령 충만이 지속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한다.

 울 목사님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 성화의 경지에 올라

주님의 임재가 내주합일 되어

생수의 강이 폭포수처럼  배에서 흘러가는 것처럼

성령이 전 신, 전 영혼을 사로잡아

단 일초도 주님과 떨어질 수없는 상태,

즉, 로마서 8장 의 고백처럼

'생명의 성령의 법이 ........' 우리의 전체를 다 사로 잡히는 것을

성령 세례라고 말씀하신다.

 

 어느 것이 맞은지 모른다.

그냥 기독교에서 쉽게 성령세례라 표현하는 것이 맞은지

위의 표현이 맞는지...

하지만,

묵상 구절에서 보듯이

'그 후' , 즉 성령을 받은 후에도

베드로가 디베랴 바닷가로 표현되는

옛 습관, 옛 삶, 세상적 삶으로 되돌아 가 있다.

 그것은 '성령체험'이 금방 성령 세례나 성령 충만하고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돌려 말하면

기독교인이 금방 모두 착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베드로 처럼 심한 심적인 좌절로 바닥까지 떨어지는 

깊은 연단을 거쳐 가서야 주님께서 비로소 쓰임 받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 예수님을 구주로 섬긴 그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 뿐아니라

작금의 기독교인들 모두가

이 제자들 같은 깊은 환란에 빠져 연단을 심하게 받은 흔적이 없고

따라서 그들 모두 곧 있을 오순절의 성령 불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심한 환란은

그 환란을 맞이하는 동안

주님 앞에서라는 전제만 된다면

주님의 쓰이을 받기 위한 연단, 즉 제련을 통한 불순물빠지는 기간임을 알 수 있다

 

 나에 대하여는 어떤가?

자주,

' 주님을 이렇게 믿어 왔고 그렇게나 사랑을 받았던 자가  이것 밖에 할 수가 없는가'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없지 않아 있다.

그럴 때마다 깊은 좌절에 들어가고 싶은 자기 연민의 유혹이 슬그머니 올라오고

내 속의 깊은 곳에서 스스로에게 분노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만일

이때 그 연민의 신호에 계속 날 맡겨 버리면

그래서 주님을 생각에서 지우려는 어이없는 결심을 해버리면

그것은 우울의 깊은 늪에 들어가 버릴 수 도 있는 것이다.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삶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

이게 전부일 것이라 생각하고 전인생을 걸고

주님 예수를 따라 다니던 자들이 허탈하게 디베랴 바닷가에 앉아 있다.

그러다가

베드로의 '나는...' '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한다.

정확하게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었을 것이다.

 

 넋을 놓고 뱃머리에 걸터 앉아서 있던 일행들은

서로 한마디 이야기도 없었다.

그냥 애꿎은 담배 - 있었을 세대는 아닐 것이지만 극중 효과를 위해서..ㅎㅎ  - 만 버끔 거리고 태우다가

그것도 지루하자,

갑자기 베드로가 허리춤을 털고 일어나며

'에라.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 겠다'라고.....

  무엇이 느껴지는가?

어쩐 지 익숙한 느낌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을 향해 , 부자를 향해 전력을 질주하다가

예기치 못한 일로, 특별히 최근의 금융대란으로

본의 아니게 실직이나 삶의 굴곡을 겪을 때

그래서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때

그 공허함과 허전함은 얼마나 심할까?

  더구나, 이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인생 대 역전을 이루려 하던 꿈이 물거품 되어 버리고

옛시절로 와 있는 것이다.

 세상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던,

예수님이 주시던 그 놀라운 카리스마의 평강 속에서

철저히 지도 받던 그들은

단 일푼도 장래와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의심이 없었을 것을

그토록 믿었던 그 분과의 시간이

마치 바람 불면 없어지는 모래 먼지처럼

흔적도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다시 과거로 , 고향으로 회귀되어 내려온 것이다.

오늘날 보이는 많은 사회현상의 그것과 어찌나 닮아 있는가?

 조금만 더 있으면 이들은 '우울증'에 걸릴 지도 모른다.

 

 난 어떤가?

 자꾸만 나오는 옛습관.

무엇인가 목표를 잃은 듯한 허전함과 특별한 이유없는 걱정이 

슬그머니 들어올 때가 있다.

 물론, 말씀 앞에서고 예수님을 내 생명으로 받아들일

결심을 굳혀가고 있으면서 잠시이지만..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어쨋든 그들은 그들의 빈 마음으로는

주님을 알 수있을 심적 에너지가 없다.

그러니,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님.

 

기독교인이 된 것,

그 분의 구원을 얻은 행운 중의 또다른 자랑스러움은

그 분 예수님은 인간의 이러한 변화 마져 정확히 알고 계신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천년 전의 사람들이나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 그들 심사에 흐르는

영혼의 상처로 인한 심리적 흐름까지 정확히 알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시기에 주님은 일상을 먼저 회복시키신다.

 보라.

머리가 깨어질 듯한 멍함 속에서

무슨 삶의 의욕이 있을 것이며

삶의 의욕없이 어쩔 수 없이 던지는 그 물에 어떤 고기가 잡히겠는가?

 

 주님은 우리 어리석은 고민자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시리라고는 전혀 예측 못할 때에

어둠 속에서 나타나신다.

그리고는 우리의 부족한 것 마져 다 챙기신다.

그것도 '풍족히...'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문제는 이런 회복을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물에 뛰어드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그 간절함은 '배반에 의한' 죄책감을 해결하고자 하는 회개의 간절함이다.

그것보다 예수님의 그 평강에 대한 본능적인 간절한 바램이다.

그러한 주님 예수님에 대한 갈구가 있어야만 일상 마져 회복이 될 기회가 되는 것이다.

위에도 명기한 것 처럼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 앞에 서려는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주님이시다.

그래도 날 구원하실 분은 주님 뿐이시다.

어제 도마의 고백과 같이 '주님은 내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간절함이 생기고 평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베드로의 그 넋을 잃은듯 멍함은

주님에 대한 죄책감과 주님을 잃은 방향 부재의 탓이다. .

그래도 주님이 전제가 되었기에 그러한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아.

그 세심하시기 까지 하시기란...

때가 되면 주님은 다시 모습을 보이시려 오신다.

 

 

 

 죄로 따지면

누구라도 그 무게에 버틸 수가 있을까?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어찌나 이렇게 음란한 생각은 온전히 떨어지지는 않는가?

예수님 영접하고 목석되는 남자가 있으면 메일 좀 써 주셨으면 좋겠다.

어찌나 이런 포악함은 사라지지 않는지?

어찌나 걱정과 근심은 오래도 달라 붙는지?

어찌나 자기 연민은........................... 

 십자가 예수님을 믿은 후 단 한번에 온전한 의인이 되어 버렸다면

이 땅은 얼마나 평화로울 것인가?

천국을 옮겨놓은 상태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오늘 베드로 일행의 '그 후'의 상태를 보아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주님 곁에 다가가려는 노력과

거기에 기다리는 시간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절대로 그 기간은 짧지 않을 수도 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으시지만

절대로 그 분 만으로는 성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그 분을 향한 '선택'과 '의지'라는 과정이 필요함을

그때가 되어야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신다는 것을

베드로의 태도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지 않은가?

 얼마나 심리묘사가 잘 되어 있는가?

 마치 살아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래서 성경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소설이라면 저리 변화 무쌍한 시대를 가르는 실제를 묘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2천년 전의 요한 著者가 심리학의 대가이며

미래 SF소설의 창시자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모두 살아 있는 진실이다.

 

오늘 묵상은 나에게도 시사하시는 바가 많다.

 

 그래.

질 수도 있다.

이전과 같은 깊은 나락의 시간이 오래 필요치는 않다.

베드로도 그렇다.

나도 그럴 수 있다.

일어날 수 있다.

 또한, 베드로처럼 반드시 큰 인물로 쓰임을 받기 위한 과정일 뿐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과정에 맞추어

나의 정도에 맞는 성화로 이끌려 하심이다.

 

성령의 세례를 엄청 사모하여야 한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제는 이 어리석은 영혼에 자리잡는 기본 원리가 되어야 한다.

이전에는 훌륭한 목사님들이나 기본이 되어 있는 성도들이나 가능한 줄 알았다.

그래서 베드로님의 고민이 그럴 수 있는 이야기로 넘어갈 수도 있다 생각했으나

이것은 주님을 사모하며 일상의 삶에서 성화하려는 욕구를 가진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위안의 묵상임을 알 수 있다.

 

힘이 난다.

 

예수님 감사드려요.

성령으로 절 이끄소서.

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 앞에서 해결 받으려는 의욕을

이제는 죄책감으로 인하여

힘없음으로 인하여 , 자기 연민 때문에 멀리하는 어리석음을 내려 놓겠습니다.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 께서

강력한 성령의 충만함으로 절 잡으소서.

실제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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