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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QT

베드로의 빈무덤 ( 요20:1-10)

주하인 2009. 4. 12. 13:44

제 20 장 ( Chapter 20, John )

 

 

많은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서도

밝음을 보지 못하고

밝음 보다는

어두움 만을 보는 것인가?

 

주님이 도우시면

가로등 불빛이 더 밝아 보이고

밤 하늘의 달은

더욱  영롱이 보일 것을 ..

 

 

 
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선불 맞은 멧돼지 처럼 뛰어온다.

 요한이 젊어서인지 훨씬 빠르다.

그러나, 베드로가 늦게 들어와도 먼저 무덤에 들어간다.

뒤따라 들어온 요한과 베드로는

빈무덤을 발견하고는 깊이 심상해서 돌아간다.

 베드로는 배가 조금 나온 30대의 남자 일 듯 싶고

요한은 겁이 많은 어린 청년 일 것 같아

그들의 뜀박질을 상상하니 재미가 있다.

아마도 베드로는 최선을 다해 뛰었을 것이다.

죄책감을 해소하는 길은 지금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란

당연한 생각 때문에 그럴 것 같다.

어쨌든 그럼에도 늦었다는 것을 보니

그는 뛰기에는 그리 합당하지 않은 몸매를 가졌을 것이란 추정이 되고

그런 배나온 아저씨의 최선을 다해서

헉헉거리며 뛰는 모습을 상상하니 재미가 있다.

 요한의 겁먹은 사춘기 소년 같은 얼굴도..

  일절 설명없이 '돌아갔다'는 표현을 보아 머리가 복잡하고 터질 것 같은

갈등의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말하고 싶지 않고 그냥 멍하니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런 심한 갈등의 상태가 그려진다. 

 

 그들은 빈 무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활에 대하여 알지 못하던 자들이기에

예수님 육신이 사라진 사실에 대하여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을 것이다.

 베드로의 심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세번 부인한 사람이다.

그러한 죄책감에 빈무덤이라니..

이것은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무리 무식하고 담대하고 단순한 베드로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의 부담이 틀림없다.

 만일 아무 일도 없었던 상태에서

가까운 친지의 시체가 없어졌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많은 통곡과 걱정과 안절부절을 못하며

찾아다니는 일을 벌였을 것을

그냥 돌아갔다는 표현으로 보아

그들의 심사가 얼마나 '찢어질 듯한 '가 가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베드로의 빈무덤.

정확히는 '베드로의 심사를 가지고 빈무덤을 쳐다보기'...다.

위에서 추리 했듯이

그는 사랑하고 존경하던 선생님을 배반했단 자괴감이 너무도 컸다.

거기에 믿겨지지 않는 소릴 듣고

최대한 빨리 달려가서 '후다닥' 들어가 쳐다본

그분의 시체가 사라지는 사건은

그의 심사가 어찌할 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머리가 뱅뱅 돌았을 것이다.

미칠 것 같았을 것이다.

주님의 시체라도 직접뵈었다면 '3번 배반' 사건에 대한

처절한 통곡의 회개라도 했을 것을..

그렇다면 마음이라도 좀 후련해서 덜 죄송할 것을..

( 만일 그랬더라면 베드로는 죄책감은 어느정도 가라앉았을 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장의 기회는 맞지 못했을 것이다.

  죄책감 해소하기 위한 '내적치유' 일변도의 목회는

  심리치료사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고민해 보아야할 시간이 아닌가?

   베드로는 그 후에 성령세례로 기독교의 수장 역할은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적 고난이 반드시 고난 만은 아니다. )

그런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는게 베드로의 빈무덤이다.

 

베드로의 빈무덤

또한 '예수님 예루살렘'입성까지

그 환희에 찬 성공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십자가 사건으로 일순간 무너진 것도 모자라

단순했던 시절의 베드로로서는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자기 자신의 추악함에 대한 정면으로 '직면'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얼마나 자괴감이 심했을까?

자신은 죽어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실제로 의리파 유형의 사람들이 그렇듯

전혀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강직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분석하고 스스로 자신하고 있었는데

그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온전히 깨어져 버리다 못해

산산조각 으로 박살 나는

정신적 테두리의 무장 해제의 순간을 의미한다.

 어찌 생각하면 '자살'이라도 생각해 볼 만한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다.

최소한 우울증이라도..

그러기에 그러한 그들은 아무 소리 안하고

그 다음의 어떠한 행위도 취하지 아니하고 ,

아니

못하고 돌아서서 터벅터벅 되돌아 갔다.

베드로는 이후에 옛 어부시절로 돌아갔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인가?

자포자기다.

후에 나오는 그의 어부 생활의 멍한 무료함 - 충격을 받은 자들이 혼이 나간 것 같은..- 에 대하여 읽어볼 수 있는

구절들이 나온다.

  

 또한  그러기에 베드로의 빈무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의 성숙된 지도자 베드로를 위한

자아 성찰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만일 , 베드로가 이러한 혼란의 시간이 없었다면

그는 후의 사역을 감당할 자격이 못되었을 것이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의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영장』이라는 책에서

'쫓기는 자'에 대하여 묘사한 부분이 나온다.

쫓기는 자는 어떤 이유든 - 재능이 뛰어나거나 , 가정의 뒷받침, 도우는 손길 , 상처..-  외적인 성취에만

급급하고 내면을 돌아볼 수 없고

정신없이 바쁘기만 하였던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하며

그들은 그들의 재능이나 노력 등에 의하여

어쩌면 인생의 초기에는 사회분야에서 성공 뿐 아니라

 '영성가'나 '목사'님등으로도 성공할 수 있으나

시간이 갈수록 그들 내면의 결핍으로 인하여 정체되거나 뒤처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그리고 , 이들은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드릴 소지가 다분하다고 하였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쫓기는 자인데

이들은 결국 인생의 후반에 결핍된 내적 에너지로 심각한 정신적 위험까지 올수있다고 한다.

 맞다.

베드로도 만일 예수님의 일방적 보호와 양육아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더라면 '쫓기는 자'가 될 위험성이 다분하다.

 어쨋든 그의 이러한 빈무덤을 통한 좌절의 극대화는

그의 내면에 동요를 일으켰고, 그러한 동요를

디베랴 바닷가의 예수님의 보듬으심과 가르치심에 의하여

성숙한 자로서 거듭날 기회가 되었다.

 

 그러기에  베드로의 빈무덤

심한 좌절의 어두움을 의미하는 것이자

한편으로 큰 성장의 기회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 인생은 안그런가?

돌아보면 심각하게 어려운 시간을 건너왔다.

그 시간은 날 죽음으로 몰고 가기 쉽상인 고통이었지만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의 영접과 주님의 평강이라든가

주님의 살아계심 등을 이해하고

내 영혼이 성장할 기회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베드로의 예수님 제자로서 받은 호산나 환영처럼

나름대로 들들 떠 있지는 않던가?

그러던 자가 갑자기 급전직하

3번 부인한 비천한 자로서 스스로를 혼란스러워 하던 베드로처럼

또 한번 당혹스러운 일을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오늘은 부활절.

아침 3시 50분에 눈을 뜨고 잠시의 묵상을 하고

실크로드 공연복을 집어 들고

자주색 보타이를 목에 두르고

안양 문예 회관에서 멋지게, 정말 멋지게  - 남들이 다 ,...그런다.    정말 잘했다고 - 공연을 하고

그곳에 오신 여러 분들과 부활의 기쁨을 같이 널리 공포 했지만

그토록 부활의 중요한 순간에

난 결국 '베드로의 빈무덤' 처럼 변화없는 뒤틀림만 맛보고 있다.

왜 이리도 내 내면은 쉽사리 정화되지 않는가?

왜 어두운 듯한 생각은 부활의 아침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가?

 

  

 베드로가 간과한 것이 있다.

잘 개켜 진 수건이 다른 곳에 놓여 있던 사실이다.

 만일 누가 해꼬지 하려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더라면

잘 개놓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할 것이다.

 긍정적 싸인이 아니던가?

 그렇다.

모든 일은 주님의 허락하에 있다.

 그것이 세상의 돌아가는 일의 원리다.

어두움 만 있지 않다.

어두움이 있으면 밝음이 있다.

밝음을 보지 않고 어두움 만을 보려는 성향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밝음을 보면 어두움은 쉽게 사라질 수 있다.

 

 베드로가 그러기는 쉽지가 않기는 하다.

하지만, 베드로의 빈무덤은 그냥 빈무덤이 아니었다.

주님이 무엇인가 메시지를 남겨 놓은 곳이었다.

그것을 캐취했더라면 베드로는 훨씬 빠르게 회복이 되었을 것이고

훨씬 쉽게 자신의 성숙을 이루어 냈으리라.

 

 나도 많이 졌다.

그렇지만 지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것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 놓음으로 이루어지는...

 

 나도 빈무덤을 보고 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어두움으로 보지 말라고 하신다.

연합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도원으로 들렀다.

오전 이른 시간.

벗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얼른 기도원 굴 속으로 들어갔다.

정말 무거운 마음이었지만 억지로 억지로 부르짖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감사합니다.............'

부르짖는 감사의 기도.

베드로의 빈무덤에 남겨진

나를 향한 긍정의 메시지를 난 감사함으로 표현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냥 그렇게만 되풀이 하였다.

베드로의 죄책감 같은

내 속의 어두움을 십자가에 내려놓고 감사. 감사. 감사..... 기도했다.

감사하다.

마음이 흐름이 자유로와 진다.

 

 

 

적용

 

1. 성경 14장 읽겠다.

 어제 못 읽었다.

 친구 만나느라 까맣게 잊었다

 

2. 베드로의 빈무덤을 묵상하자.

 그 무덤은 어둠의 무덤이다.

 좌절의 무덤이다.

 하지만 기회의 무덤이기도 하고 성장의 무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가만히 기다리자.

 

3. 기다린다.

 성령 충만함, 세례로 베드로가 온전히 해결 받았다.

 그러게 하소서.

 

 

기도

 

주님

베드로의 빈 무덤을 묵상했습니다.

이게 부활의 시간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장 복된 시간입니다.

온 우주에서도 가장 귀한 축복의 길이 열린 시간인데

베드로는 빈무덤을 보고

부활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어두움을 봅니다.

그의 죄로 인하여서 그러한가 봅니다.

회개 하게 하소서.

회개하고 잊게 하소서.

밝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은 기회를 허락하시기 위하여

두려움과 어려움을 허락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주여 도우소서.

 

저도 깨닫게 하소서.

베드로처럼 성장하게 하시고

베드로 보다 더 긍정적이게 하소서.

좌절감, 죄책감을 모두 십자가에서 해결 받게 하소서.

그리하고 성령으로 온전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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