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장미 이슬(출34:1-17 ) 본문
제 34 장 ( Chapter 34, Exodus )
장미는
등을 돌려도
장미다
비가 내려도
장미에 내리면
그 비는
비가 아니다
이슬이다
그냥 이슬이 아니다
장미 이슬이다
내면이 아름다운 자는
이슬같은 비를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장미와 같다
돌덩어리 같은
내 내면도
주님을 위하여
주님에 의하여
주님의 그것으로
장미같이
아름답게 만드소서
주여
절
도우소서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첫 십계명은 주님이 준비하신 돌판이다.
다시 주시기 위해 모세에게 '처음것과 같이' 직접 깎아 만들라고 하신다.
그 판에 주님이 말씀을 새기신다하신다.
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인적을 금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특별히 주의를 당부하신다.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새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그렇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맞으시다.'
그 분은 자비로우시다.
그 분은 은혜로우시다
그 분은 너무도 나의 추함을 잘 인내하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인자하신 분이시다.
그 분은 진실하신 하나님 맞으시다. '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리어 경배하며
내가 늘 해야 할 것은
땅에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는 것 뿐이다.
그것도 급히 엎드리어야 한다.
15.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그들이 모든 신을 섬긴다 하셨다.
지금은 'postmordernism'이 횡행하는 시대다.
그것은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사상이다.
모두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얼마나 매혹적인가?
남자가 여자 노릇하고 여자가 남자노릇해도 아무 상관없다.
더러운 것 아무리 더럽게 해대도 자기만 좋으면 끝이다.
대통령이 애 짓해도 그만이다.
목매달아 죽어도 그만이다.
모든게 '신'이다.
온갖 음란이 판을 치고
서로 서로의 육신에만 지독히도 탐닉하여
얼짱이니 몸짱이니... 섹시녀니...
그러면서 그 몸을 마구 뜯어고쳐서라도
그 탐닉에 제공할 몸을 만들고
또 다른 몸을 탐닉한다.
영혼은 생각할 여지도 없다.
그냥 그게 신이다.
...........
정신이 없다.
세상은 정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돌아간다.
아니 변해간다.
그 안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세상의 사조가 말세의 징조이기 때문이다.
이 말세의 징조의 깊은 이면에는
'이슬람의 준동'과
'힌두교' 사상의 두축이 기본이라 한다.
거기에 국내적으로는
'어른 여야 할 자'들의 자살 등... 자살의 영들이 판을 치고
북한의 전쟁의 영들이 움직이는 등
세상은 바야흐로 '모든 신들'이 움직이고 요동치는
말세의 세상이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목사님의 명쾌한 분석이다.
평상 시 생각하고 있던 것을 그 분 께서 정리하시니 놀랍다.
나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눈을 뜨고 있는 분들이
느낄 수 있는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때 우리가 해야할 태도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그냥 세상이니 넋을 놓고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금 중심을 하나이신 하나님께 집중하여
내 영을 이끌어주시길 간구할 것인가?
아침에 들여다 본 묵상에서는
처음에 주님께서 만드셨던 돌판을
모세에게 만들라고 하신다.
당신께서 만드신 그대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첫사랑 때 성령의 그 놀라운 사로잡음에 의하여
내 영혼은 놀라운 감동으로 불탔었다.
주님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감격에 들 떠다녔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며
아론의 금송아지를 몇마리 기르고 부수고 하다보니
마음은 냉랭해져 버리고 만 있는 것같다.
나름 주님의 말씀을 붙들려는 선택이 있기에 덜하지
말씀을 읽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영혼은
자칫 부서진 돌판과 다름없는 상태로
세상의 우상 더미 속에 묻혀 살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입장에 있음을
알 수 밖에 없다.
이제 돌판을 다시 다듬어야 한다.
주님 나라를 향해 가는 과정은 연단의 과정이다.
성장이 필요하다.
성장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방적 성령충만과는 다른 어떤게 필요하다.
그게 '모세의 돌판 제작'이다.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전 어린 신앙 때는 무조건 주님이 다 인도하셨지만
이제는 우리의 노력과 헌신이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그 돌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심비' , 마음판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계속되는 미움 , 걱정.... 등 성령의 열매와는 상관없는
마음의 '결'을 유지하면서
그 마음 속이 아직도 거칠 거칠 하다면
주님께서 '손가락'으로 다시 쓰시게 하시기 위하여
마음을 닦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노력 만으로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주님이 보여주신대로... 라고 하셨다.
성령께서 하시었던 대로
성령께서 하시도록
마음을 맡기려는 결단 만이 필요한 것이다.
기도하고 말씀 앞에 서려는 노력.
준행하려는 적용의 노력...
그 과정이 돌판을 매끄럽게 다듬기 위한 노력이다.
주님 말씀 묵상을 시도한 수년 동안
내 마음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도 아직 거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대패질을 멈추지 않는다.
난, 하루라도 빼먹지 않으려 노력한다.
말씀으로 그리한다.
어제 그제 출근 길에
그 전날 밤에 왔던 비로 인하여 촉촉히 젖어 있는
장미덩쿨을 볼 수 있었다.
장미는 고개를 숙이고 잎사귀는 그 장미를 둘러 쌓고 있다.
그 위에 빗 방울이 방울 방울 맺혀 있다.
참 아름답다.
빗 방울은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나 아름답지는 않았다
장미 위의 빗방울은
다른 어느 곳 위의 빗방울 보다 더 아름답다.
장밋 잎의 방울은
다른 어디의 빗방울 보다 더 이슬스럽다.
빗방울이 이슬의 생명력으로 변화하는 순간이다.
난, 장미가 되고 싶다.
내 마음의 돌판을 갈고 갈아
장미의 향기와 장미의 자태와 장미의 우아함을 내어 보이기를 원한다.
장미의 잎처럼
내 움직이는 반경이 생명력으로 넘치길 원한다.
그래서 나에게 오는 어떤 것이든
아름다움으로 변하게 하고 싶다.
빗방울이 빗방울이지만
마치 이슬같은 아름다움을 주듯
빗방울이 홀로 떨어질 때는
흙탕물의 일부지만
그가 장미 곁에 옴으로
아름다운 장미 덩쿨로 보이게 만드는
그 장미의 생명력을 띄우고 싶다.
그 모든 것이
주님을 전제로 가능하다.
주님은 아름다우시다.
주님은 더디 노하신다.
주님은 생명이시다.
주님은......................
적용
1. 성경 일곱장 읽겠다.
2. 태도를 정결히 하겠다.
두번 째 돌판 때부터는 조금 엄격히 요구하신다.
몸짓 발짓 매너도 신경 쓸때이다.
조금 덜 이야기 하겠다.
조금더 침묵하겠다.
조금 더 눈을 내리 뜨겠다.
3. 주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시다.
주님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자에게는...
주님은 무서운 분이시다.
모든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주님 말씀 묵상을 놓치지 않겠다.
4. 아들의 생일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리라.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이전과는 다른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조금더 성장한 자에게 그리하십니다.
성장한 자야 말로 '장미'와 같은 아름다움의 자격이 있습니다.
그 장미가 주위를 온통 아름다움으로 물들이는 것처럼
주님의 생명으로 절 장미로 만드소서.
그리하여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빗방울 같은 떨어지는 자들에게
장미의 이슬이 될 기회를 주게 하소서.
주님으로 그리하게 하소서
난 내 의지와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그 어디에도 없음을 압니다.
주여 .
그리하여 주님을 의지하오니
끝까지 저를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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