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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잘못 모두 주님의 掌中이다 ( 행15:36-16:5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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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잘못 모두 주님의 掌中이다 ( 행15:36-16:5 )

주하인 2007. 10. 16. 12:52

제 15 장 ( Chapter 15, Acts )

 

( 주님은 안보이시는 것 같아도 모든 우주 운행 질서의 중심에 계십니다. )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을 전한다.

이때만 해도

둘은 거의 하나같이 움직였다.

 아마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했을 것이다.

기분 좋았을 것이다.

바로 이때만 해도......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여기 부터가 문제다.

바나바가

아무런 생각없이

자신의 친척인 마가를 데리고 가지고 한다.

당연할 듯한 의견이다.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바울은 딱~ 자른다.

밤빌리아에서 한마음으로 일하지 않고

배반하고 돌아간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바울의 의견이 타당하기도 하다.

주님의 일에

배반하는 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엄청나고 귀하고 위대한 일에..

 

옳다.

그러나 ,

옳지 않다.

 

옳은 것은

주님 앞에 온전하려는 그 마음가짐이 옳다.

 

옳지 않은 것은

자기를 한편으로 키워주어 그날까지 있게 해준

바나바, 그 귀한 분의 말을

일언지하에 자른 방법론의 잘못에 있다.

어찌 생각하면

그는 인격적으로 모난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의 젊은 날에 그 무서운 일을 행했고

그러기에 그의 행보가 놀라웁게 쓰이지 않았던가?

 각설하고

그의 잘못된 판단은

마가가 나중에 그의 아주 가까운 동역자로 거듭 났음에

그 증거가 나온다.

 

 이렇다면

이러한 잘못과 잘함은

주님 안에서 어찌 생각되어야 하는가?

이 사도 바울을 보면서

난 내 모습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아서

자뭇

흥미롭기 까지 했다.

모난 면,

단정적인 말투

큰 일이라면

적은 남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

 

 이하에 계속 나오지만

주님은

그의 잘못과 잘함을 통하여

그 대단한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그게 놀라울 뿐이다.

나 개인적으로

희망이기도 하지만

주님 안에서의 늘 서 있음에 대한 메시지 이시기도 하다.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sharp disagreement'

영어로는 이리 나온다.

'첨예한 의견 불일치'

 심히 다투어는

마치 주먹질이라도 할 듯한 살기 등등한 상태를 풍기고

첨예한 의견 불일치는

서로 높은 위치에 있어

대놓고 상소리하고 

주먹질은 못하지만

그 말의 날카로움이

서로의 심장을 갉아 먹을 듯 비수를 세우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어찌 되었던

두 사람의 그 간의 행보를 보아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사단이 벌어진다.

 

그리고 나서는

치졸하게

바나바는 마가 만을 데리고 구브로로 가 버린다.

 

여기서

몇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바나바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그 인자함과 Supporter의 대명사이며

초대교회 행정의 조율가이던 그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에 걸려서 삐져 버리다니..

 마치

사랑하여 결혼하고

천년 만년 알콩 달콩 살듯하던

신혼 부부가

아침에 일어나서도 다정히 욕실에 들어가 잇빨을 닦으려 하다가

치약 짜는 것 하나 가지고

순식간에 부부싸움과 더불어 이혼도장 찍는 현상처럼....

그럼에도

바나바의 그간의 인격적 풍모를 보아도

도저히 그의 심사는 이해가 가기 어렵다.

 

 몇가지로

그의 심사를 추론할 수 있다.

 

일단은

그의 내성적 성격 탓이다.

상처로 인하여 오랫동안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하던 자들이

어느 순간

일정 수준의 스트레스에 이르면 폭팔하여

예기치 못한 성질을 내는 것과 마찬 가지로

그의 온유와 인내는 성격 탓이며

단지 마가는 터질 듯한 스트레스의 발화점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업적이 쌓이고

결과물이 눈에 보이면

그것에 대하여

알지 모를 시기와 비교로 인한 질투가 생기게 되고

마침

바울 사도께서

선교지를 돌아보자는 주도적 제안에

속이 상했을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같다.

성령 충만하여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도

자칫하면 넘어져 버리고

실족해 버리는 게 본색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매일 큐티를 하고 주님의 말씀을 읽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넘어진다.

아니면 주님이 그냥 쓰시지를 않으실 것이다.

넘어지지 않도록...

 

 물론 위의 것은 추정이다.

추정을 통하여 주님은 역사를 하신다.

이 추정을 통하여

주님이 필요하시면

나의 영혼에 각인 시킬 무엇을 주신다.

그간의 큐티의 연륜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마가는 어땠을까?

 마가는 밤빌리아 사건을 보아도

오늘

사도바울과의 대립하시는 친척 바나바의 뒤를 쫓아 구브로로 그냥 쫓아간 것도 보아서 그렇다.

유야무야.

술에 물탄 듯...한 사람.

그러면서도

영적인 최첨단에서 이름이 떠나지 않는 것.

또한 마가 복음이란 성경의 일부분을 쓰게 된 것 등을 돌아보아

그는

하나님을 절절히 사랑하면서도

자기의 주관이나 목표가 뚜렷하지는 못하였던 사람.

그러면서도

시간이 지나 결국은 사도 바울이 옳음을 알고

그의 뒤를 좇은 사람임을 보아서도

그는 한참 영적 성장기에 있는

영적 청년기의 사람이었을 듯 싶다.

그나 저나

바나바의 뒤를 좇아 가는 그나,

그를 데리고

화풀이 처럼 구브로로 떠나가는

온유의 바나바는

마음이 어땠을까?

 

바나바는 속상하면서도 후회가 많이 되었을 것이다.

마가는 미안하고 죄송하고 주님께 죄송하였을 것이다.

 

궁금증이 드는 것은 이렇다.

 

 남아 있는 바울의 마음은 어땠을까?

구브로로 행했던 바나바 일행의 행로는 어땠을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 있는

당연히 구원 받기 위하여 예정이 되어 있는 자들에게

복음의 소리를 들려 주었을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첨예한 대립 마져도

주님의 장중(掌中)이다.

모든 것은 주님의 뜻 안이다.

 

 그렇다면

이 주님의 손바닥 안에서 있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늘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늘 말씀을 멀리하면 안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특별히 다툼을 잘하면서도

다툼에 대하여 지독한 좌절감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메시지가 된다.

 

이런.. .

주님의 뜻 가운데서 생기는 다툼은 그리 큰 좌절을 할 필요가 없다.

주님의 뜻과 먼 개인적 사리사욕에 의한 다툼은 피하여야 한다.

물론 , 주님은 모든 걸 다 주관하시지만

우리의 선택에 넘긴

영역에서는

우리가 반드시 주님의 뜻 안에서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의지와 결정과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들의

첨예한

예상치 못한 다툼을 통하여

또 다른 결과물을 가져 오게 된다.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바울은 실라를 택했다.

 

 실라를 보낸 지 며칠 안되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실라를 데려온 것이다.

 실라에게는 뭐라고 했을까?

실라는 왜 응했을까?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들의 첨예한 대립 후의 갈등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냥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자연스레이 받아 들였을까?

 

실라가 안디옥에 왔을 당시

바울과 영적인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기에 위에 예상한 곤란한 부분들이 쉽게 해소가 되어있었을 거이며

실라가 두 말하지 않고

그의 2차 전도 여행에 따라 나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주님 성령님이 물흐르듯이 조율하신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지만...

 

 바울께서는

싸움 이후에

최소 십여일- 실라를 다시 부르고 체재 정비하기까지 -의 시간 동안

회개는 했을까?
바나바에 대하여

인간적 아쉬움은 없었을까?

그 시간 이후 내내

그는 어떠한 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을까?

자신의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었을까?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 등을 다니며 교회를 굳건히 한 행동으로 보아

그 분은

주님 안에서

사소한 감정적 문제들은 다 해결하신 분 같다.

 

주님의 일 열심히 하다 보면

이 세상의 일에 대하여

자유할 수가 있다는 것이 이런 묵상의 결과다..

 

주님의 손 안에 붙들려

자유로움을 누리며 사는 삶.

그러면서

남과 이웃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삶.

 

그것이

주님이 허락하신

기독교인의 삶의 풍요로움의

이유가 된다.

 

 

적용

 

1.  사사로운 일로 포학이 올라오는 게 익숙한 장면이 드문 그들에게서 보인다.

    개인적으로 '성질' 안 부리는 하루가 되도록 노력한다.

 

2. 나의 문제는 누구에 가까운가?

 마가의 우유 부단함.

 바울의 직선적이고 독단적임.

 바나바의 상처.

고쳐야할 기도의 문제다.

 

3. 그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는가?

 영적 최전선에 서 있는 자들로서

 회개의 기도와 응답이 우선이 되었을 것이다.

  늘 주님 앞에 깨닫는 자로서 행동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닮아야 한다.

 자신의 문제는 주님 앞에 내려 놓고 해결 받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거짓 죄책감등은 내려 놓는다.

 단, 주님 안에서

 주님 뜻대로 행하는 일에야 만 가능하다.

 사리사욕의 일이나

 더 이상의 진행의 합리화로서는 곤란하다.

 

4. 배워야 할 바는 무엇인가?

그래도 주님의 일은 했다.

내 곤란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증거하는 일은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

나는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이 땅을 산다. '

나는 '내 모든 현상의 지위를 통해 주님을 증거한다 .'

나의 모든 생활의 삶은 주님을 전도하는 일을 위하여 주어진 것 뿐이다. ........라는....

 

잘 알면서 흔들린다.

아직도  영혼 깊숙이 주님이 임재하실 자리의 지평을 넓히지 못한 모양이다.

 

5. 전도는 사명이다.

 어제 전도 두명 했다.

오늘은 하나했다.

내 삶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현장이다.

 

6. 성경 다섯 장 읽겠다.

 

7. 여성병원 직원 하나가 그 만 둠으로써

 오늘 부터 화요일 저녁 마다 당직을 하게 되었다.

나이 든 내가 .. 라는 가슴아픔이 있지만

주님께서 기도하고 공부할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되니 기쁘기도 하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하던 변화다. 

 주님 안에서 있으면

자유로워 진다.

 

8. 내가 마가와 같은 존재는 아닌지 돌아본다.

 여기서의 마가는 잘못행동함으로 다툼의 빌미가 되는 자.

늘 돌아보고

지혜롭고 겸손하게 처신한다.

안되면 주님께 의지하고 얼른 얼른 벗어나고

마음도 털어 버린다.

 

9. 내 잘 잘못 모두 주님께서 쓰신다.

 자유다.

 희망이다.

 그러나, 답보 상태가 되면 안 쓰일 수도 있다.

 성장해야 한다.

 

 

 

기도

 

 

 

 주여

많은 생각 주셨으니

주님 뜻대로 인도하소서.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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