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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맞아도 아무렇지 않다(행 14:19-28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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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맞아도 아무렇지 않다(행 14:19-28 )

주하인 2007. 10. 12. 11:19

제 14 장 ( Chapter 14, Acts )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 이런 꽃 들은 아무리 밟혀도 똑같은 아름다움을 곧 다시 뿜어 내더라고요... )

 

 

돌로쳐서.

죽일 만큼 때렸다.

성밖에 끌어 내칠 때

사도 바울의 육체는 어땠을까?

피가 철철 흐르고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서 늘어졌을 것이다.

사람 들이 죽은 줄 알 정도로...

 

 내쳤다.

집어 내 팽개쳤다는 뜻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을까?

얼마나 속상했을까?

 

무엇 때문에 바울은 이런 고생을 할까?

예수님을 전격적으로 만나고

3일 동굴 속의 그 대 변혁이 없었더라면

인간의 의지로 이 이후의 행보가 가능할 까?

 

나도 아팠다.

돌로 맞은 적도 없었지만

돌로 맞은 듯 아팠다.

어제 하루는...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힘듦이 돌처럼 아프게 한다.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바울이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는 표현은

제자들이 둘러서자

그냥 툭툭 털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성에 걸어 들어갔다는 뉘앙스다.

 

 아프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그의 피를 닦아 주지는 않았을까?

그 죽을 정도의 고통이 과연 아무렇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부축해야 하는데 그런 뉘앙스가 전혀 아니다.

 

그렇지 않고야

그 다음 날 더베로 간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의 초인적 의지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설령 들어가도

상식적으로는  다음 날 운행할 수가 없다.

주님의 치유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바나바와의 하룻 밤

그 밤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아마

진통의 능력으로 걸어온 당시는 무리가 없었을 지라도

그 저녁

그의 낡은 옷과 찢어진 상처

위에서 느껴진 감정의 고통과 힘든 영적 부대낌 등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나바와 함께 한 그날 저녁에 회복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정성스레이 동역자를 씻어 주었을 것이고

바울 님을 위안했을 것이며

믿음 가득한 눈과 혀로 그를 만져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깊은 기도로 그를 위한 치유 기도를 해주었을 것이고

아마

그 저녁

바울 사도의 몸을 둘러 싸고

황금색 기류라도 흐르지 않았을까?ㅎ

마치 SF영화의 상처 치유 장면 처럼

모핑 기법을 보듯이

온갖 상처가 원상회복 되지는 않았을까?

거기다

근육이 마치 슈퍼맨처럼

터미네이터 처럼.. 울퉁 불퉁 잠깐 꿈틀대지는 않았을까?

ㅎㅎ

 

어찌 되었던

그들은 완전회복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너무나도 당연하다듯이

그곳을 떠 났다.

 

난 바나바가 필요합니다. 

주여. 

 

( 십자가는 물리친다  !! )

 

 

아침에 버스 안에서 들여다 보며

잠깐 눈을 감고 묵상했다.

비록 바울 처럼 대단한 선교자는 아니고

평범하기 그지 없는

무지랭이 - 어제 돌맞은 듯 아파서 들여다 보기 싫은 성경을 꼭 보아야 할 것 같기에 펼쳐든 시편 73장에 아래와  같은구절이 나와 있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 인 나에게 바나바 같은 자를 붙혀 달라는 기도가 가당키나 할 진 모르지만

그래도 주님께 기왕 묵상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장면 장면이 하나하나 나랑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알고 있는 바 , 주님께 구하기로 했다.

묵상하다가 굵은 글씨처럼 눈에 튀어 들어오는 것을 개인적인 응답으로 받고 기도하다가 병이 나은 얘기들을 많이 보았고, 양자물리학의 그 '의지'를 불어 넣음으로 해서 변화가 되는 상태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는 나는 '믿음'에 굳이 제한을 둘 이유가 없음을 배웠기에 비록, 의심 많고 불안정하지만 한번 바나바 같은 도우미를 구해 보고 싶다.

 

 위로하고

기도해주고

이해해주고

주님 일에 도움이 되는 ...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주님은

주님 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면

기적과 치유와 표적을 아낌 없이 주신다.

 

난,

어떤가?

복음을 전하나?

내 삶은 힘이 있나?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제자들이 믿음에 거하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환란을 겪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환란은 왜 겪어야 하는가?

모두 바울이나 바나바님 처럼 뛰어난 선교의 일을 하고 복음 교사 , 및 전도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

믿음에 거하여야 하는가?

환난은 하나님 나라 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신다.

그 환란은 선교나 전도자가 아니면 또 어떠한 성격의 환란인가?

일상의 삶을 유지하면서

주님을 잃지 않고 동행하려는 몸부림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의 삶이 지금의 우리 보다 눈 에 뛰는 저항 세력 내지 압박 세력은 있지만

어찌 되었던

소시민의 믿음에 대하여

바울은 '믿음을 굳게 가져라 '한다.

 

나보고도

굳게 '믿음'을 가져라 .. 하시는 것이다.

' 내가 ..

 무슨..

 어떤 믿음?

 선교도 못하는데... ' 라는 생각이 있다.

그러기에

큰 믿음 가지고 힘있게 살기를 조금은 �추기는 한다.

그러나,

오늘의 묵상의 내용은

일상의 삶에서 갖는 믿음의 크기도

아니,

가져야할 믿음의 크기도 다르지 않음을 말씀하신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 될 수 밖에 없다.

더더구나 믿는 자로서는

불신자들 보다 더 가지는 인내의 무게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삶의 과정이

순교의 터이고

매일 매일이 전도와 교사의 삶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어렵게 사느냐고 비아냥 대는 자들에 대하여

순교할 수 밖에 없고

그런 나이되어도 그리 할 수 밖에 없냐는 눈초리에

주님을 생각함으로 편법과 세상에 돌아가고 싶은 회귀 욕구를 잠재우려는 시도를 할 때,

그런 말이 돌이 되어 날 칠 때

그 것은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 겪을 수 밖에 없는 과정이고

그 것은 필수 불가결한 고난 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힘들다.

그러기에 더 귀하다 .

그것은 일상의 순교이고, 일상의 전도이고, 일상의 교사이다.

 

나에게 그렇게 다가온다.

어디에 놓였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위치가 높고 낮음도

또 중요치 않다.

 

그 상황에서 받는 고통의 정도는 동일하다.

그냥 믿음으로 받아라.

그리고 인내하라.

주님을 의지하여...

어제 묵상처럼 '주님을 힘입어'..

그것이

주님 나라가는 고통을 이겨나가는 '연단'의 기회이다.

 

사도 바울의 돌맞고 일어서고 툭 털고 감만 멋진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일상에서

그냥 주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게 돌맞고 일어서는 것이다.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사도 바울 선생님은 배울게 너무 많다.

장로들을 택하여 주는

행정적 탁월성도 그렇다.

그들을 위하여 금식 기도해주는 - 더구나 환자였던 사람이.. ㅎㅎ- 

또한, 주께 부탁하는

친절함과 배려깊음과

세심함과 더불어

주님앞에 올바로 섬이 그렇다.

 

그는 영육간에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게

두 사람이기에 가능하다.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다시 안디옥에 갔다.

초심의 회복이 필요하다.

모진 고난과 열심 덕에 이루어진 많은 성과들.

 

성과물이 거치면

그 성과가 올무가 되기 십상이다.

작금의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의 세습 문제가 한동안 이슈에 오른 적도 있다.

모 교회 그 목사님의 아드님이 움직이는

숨은 돈이 수조라는 헛소문(?) 도 있다.

 

성과에 만족하고

성과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자가 당착은

하나님 이외의 괴물을 만드기 십상이다.

 

이 두 분은

이미 이룬 일 , 즉, 이루어 낸일을

이루기 위하여 이 전에 기도했던 곳,

바로 그곳이 안디옥 교회인 바

안디옥 교회로 다시 돌아갔다고 나온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초심(初心)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다.

 

참 배울 바가 많다.

그들에게는

오직 주님 밖에 없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위하여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요 며칠 사이.

아침의 그 풍요로움이 그리워진다.

잊고 살면서 부터

내 갈급과 영적 메마름이 컸다.

증거로

큐티가 건조해지고 습관적이 되었으며

시 쓴적이 얼마나 오래되었는 지 모른다.

시를 알지도 못하고

문학이라면 치를 떠는 자가

글을 쓰기에

얼마나 영감이 넘쳤기에 그랬던가?

그런 내가 다시 메말랐다.

 

엊저녁엔 불현듯

교회 기도회 다시 나갈까.. 생각이 퍼득든다.

 

아침에 옷 갈아 입고 나오는 데

아내가

'오늘 교회에서 산기도 있데요..'한다.

간다고 했다.

 

안디옥이다.

잠시 옛 열정을 되새기어 보련다.

한구석 마음에서는

'피곤하다.

 가지말자.

 거 뭐...' 하지만

하려 맘 먹고

버스 타고 들여다 본 '안디옥'이

그것이란 생각이 들며

오늘 묵상이 하나도 거침이 없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이어진다.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오래 있다.. 어제도 나오고 또 나온다.

 

힘들고 지칠 때 피해 버리고 싶은 게 인지 상정인데..

난 그렇다.

아니..

난 그랬다.

아니..

이젠 안 그러려 한다.

열심히 열정을 내다가도

부대끼면 가라앉는..

그러다가 포기해버렸었다.

 

참 ..

본의 아니게

인도하심으로

오래 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긴 했지만

그때마다

돌맞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 앉아 도망가버리고 싶은 경우가 너무도 많았다.

 

이제

오랜 시간.

오래 견디는 게

주님 안에서 아주 귀한 덕목임을 알면서도

어제 같이 갑자기

내 속에서 돌이 맞았음을 느끼곤 할 때는

그만 도망쳐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그래도

성경의 말씀을 붙들어

우지 무매 하고 주님 앞에 짐승같이 느껴지지만

굳이 굳이 항상 주님을 생각하려는

아주 적은 몸부림을 주님은 그래도 귀하게 여기시는 듯하다.

오늘 아침은

마치 바울 님께서

아무렇지 않은 듯

툭툭 털고 일어나

더 이상 생각지도

들어내지도 않고

안디옥에 까지 내려와서

오래 있는

그런 모습처럼

나도

비슷한 차분한 감성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

 

 

 

 

적용

1. 사도 바울님도 피곤죽이 되도록 돌을 맞았다.

   곤란과 환란은 그럴 수 밖에 없는 기독교인의 당하고 견딜 바임을 이해한다.

   속상해 하지 않겠다.

 

2. 환란을 기뻐한다.

 잠시다.

 곧 큰 영광을 볼 것임을 믿는다.

 주님의 능한 손 아래서 겸손으로 이겨낸다.

 때가 되면 알아서 챙기실 것이다.

 

3.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행동하겠다.

 주님은 화평이다.

화평을 위해서는 무조건 ..............

 

4. 바나바 같은 도우미가 누구인지, 아니면 달라고 기도한다.

 

5. 오래 견디겠다.

 

6. 일상의 삶이 순교이고, 교사의 행동이고, 전도자이며 믿음의 시험터임을 믿는다.

주님이 보고 계시고

주님을 위해 삶을 삶을 잊지 않는다.

 

7. 초심을 회복하겠다.

 날마다 교회에서 자며 기도하던 그 때를 잊지는 않겠다.

오늘 산기도에 꼭 따라 가겠다.

 

8. 내 부족한 부분, 주님에게 아뢴다.

  인도하심 받겠다.

 

9. 성경을 다섯 장 읽겠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새삼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낍니다.

 

어제의 돌맞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사도 바울 선생님의

그 초연함이

이전에는

아귀뚱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일견 코믹한 상상을 많이 하며

그 코믹안에 계시는 주님의 뜻을 알듯 모를 듯 했지만

지금은 확연히 느낍니다.

 

아니

오히려

제 삶의 하나하나를

묵상에 맞추어 가며

2년여 가까이 지나가는 동안

하나도 내 삶의 운행과 다를 바 없고

그 때마다 성경의 예가 어찌나 그리 맞는지

살아계신 하나님은

수천년 전 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감정의 흐름과

영적이신 원리를 보여주고 계시며

그러기에

살아있는 영감으로 쓰인 글이라는 걸 믿을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살아계신 주..

살아계신 성령님...

 

노래라도 마구 부르고 싶은 느낌이 듭니다.

감사하신 분.

주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힘입기만 하면

돌로 맞아도

아무렇지 않기를 결정합니다.

주여

그러기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주여

일상의삶을 살다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그냥 주님 뜻이면

끝까지 오래 견디며 살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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