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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산 큰 산 ( 렘 3:19-4:4 ) 본문

구약 QT

작은 산 큰 산 ( 렘 3:19-4:4 )

주하인 2009. 9. 9. 10:05

난 달이다.

 

 

달 이다.

이 땅에 머물지 않고

저 하늘에 속해있다.

그래서

내 뜨고 짐을

휘영청

둥실이라

표현 받는다.

 

비록

지금 보이는 저 달이

마치

공사 중이던 건물 안에

갇혀 있는 듯 보여도

 

달 이다.

 

 

누가

그를  

이 땅에

끌어 내렸는 가? 

나  스스로인가?

아님

날 보는 자인가?

내 마음인가?

내 현실인가?

......

 

그래도

달이다.

저 하늘 위에

둥실 떠 있는

달이다.

 

 

제 3 장 ( Chapter 3, Jeremiah ) 


19.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 중에 아름다운 산업인

      이 낙토를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아버지.

나의 아버지.

내 아버지.

 

' 너희가 나를 내 아버지라 부르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23.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작은 산

큰 산.

헐벗은 산도 오늘 묵상 구절에 나온다.

 진리이신 주님을 두고

어디에서 무엇을 찾는가?

작은 산 큰 산 벌거벗은 산.

나름대로 열심히 열심히 자신들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부르짖고 찾는다.

 

 하지만 진리이신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내 아버지 인 것을..

 

 

 차분히 살아오던 내 삶이 또 때가 되었는가? ^^;;

마음이 흔들린다.

아침에 걸어나올 때 느끼던

그 아침의 청량한 햇빛이 별감흥이 없다.

 버스에 탔다.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예비군 훈련 복장의 사람들.

다운 증후군의 여학생 -버스 정류장에서 자주 보던 아이인데, 늘 친구가 같이 다니더니 요 며칠은 혼자다

늘 시끌시끌 자제 못하고 떠들던 아이가 조용하니 마음이 그렇다. - 도 보이고

조는 승객들이 다수다.

아침 출근하는 저들의 어깨 위에 얹혀진 삶이 무거운 듯 보인다,

자리가 나 얼른 주저 앉았다.

무거운 허리도 그렇고 묵상집을 들춰보기 위해서도 그렇다.

집에서 잠깐 들여다 보고 나온 구절이 

예언서가 늘 그렇듯 공의의 하나님의 두려운 탓이라서 인지 쉽지 않았기에

늘 우아하게 서서 가려던 의욕을 포기하고

자리에 서둘러 앉았다.

 잘 눈에 안들어 온다.

잠시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쳐다보는 데

뒤에서 큰소리로 핸폰 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 대판 싸웠대.............$^$^*(_@#& '  

가슴 속에 들어오는 생각이 있다.

' 난 왜 저들처럼 저렇게 열심히 어울려 살지 못하는가?

 고상하고 좋은 소리만 하고 격조에 맞는 소리만 하고

뜻 맞는 사람들과만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가?
 주님의 뜻은?
적극적으로 세상에 어우려 지려면 주님과의 이 고요한 시간이

점점 줄어들 것을...

외롭게 느껴진다.

세상의 외로움을 주님의 시간으로 바꾸는 것이 맞는가?

그렇다면 교회일 열심히 하면서 그들과만 교제를 하고 하면

영적이고 외롭지 않진 않을까?

교회일이 반드시 영적인 일하고 일치하지 않음은 알지 않던가?

.................

무엇이 옳은가?'

 복잡히 머리를 누르려는 다양한 생각들을 누르고

눈을 묵상집에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이 산 저 산 , 작은 산 , 큰 산, 헐벗은 산.......을 가리지 않고

쉽게 말해 명산 대첩을 찾아다니며 부르짖고 외친다.

 우리 어렸을 적은 산들이 민둥산이 많았는데...

우리 고향 뒷동산은 그리 높지 않아서

어린 나, 걷고 움직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던 나도

가끔은 올라 갔다.

그 낮은 산 정상에 올라가서 손 높이 들고 '야호'라도 외치면

무엇인가 그 어린 가슴에도 맺힌 것이 잠시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곤했다.

 산이 깊으면 더더욱 그렇겠지.

계룡산, 삼각산..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모여드는 곳이다.

 묵상을 들여다 보면서 순간 머리 속에 그려지는 모습은

낮은산 높은 산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찾아 들어 손을 들고 소리소리 외치는 그림이다.

  무엇인가?

그들은 왜 산에서 저러고 있는가?

꼭 저들이 찾는 게 바알 뿐인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산에서 부르짖는 자들에게 뭐라하시는가?

큰산, 작은산...

표현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들이 찾는 것이 우상이든 하나님이든

진짜가 아닌 왜곡된 하나님을 찾기에 그러는 것은 아니던가?

 

 

  혹시........

내가 혼란 스러워하고 바라는 생각이

작은 산과 큰 산에 올라가서

주님이 계시지도 않는 방향으로 소리소리 지르고 싶어하는

그런 심사는 아니던가?

 나름으로는 열심히 손을 들고

아무도 없는 그 산상의 밤에

무서운 늑대의 소리를 참아가며 열심히 열심히 외치지만

주님이 계시지 않는 방향에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 시대 그 사람들도 그 고난을 참아가며 외칠 때는

나름 가슴에 큰 허전함이 있었거나

주님을 찾을 열심이 있었기에 그렇지 않았을까?

 

 세상을 산다는 것.

세상 만을 바라보면서 산다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만 같다.

골프치고 술마시고 괜찮은 친구들과 뜻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그들과 단지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 만으로 기뻐하고 .......

그리고 그러다가 재미없으면 낚시도 다니고

그러다가 여행도 한번 모여서 가고

그러다가 좀더 짜릿한 무대로 옮겨가서

...........^^;

옆에 나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친구가 있는데

무엇이 문제일까?....................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하나 더 고려할 점이 있다.

'주님'과의 관계.

 어찌 생각하면 부담이다.

생각할 머리,

느껴야 할 가슴

누려야할 시간이 '半分' 되니 힘이 좀 들긴하다.

 하지만, 그 분이 진리가 틀림없이 맞기에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둘을 적당히 나눌까?

아니면 하나를 포기하고 온전하게 한쪽으로 나갈까?

당연히 진리이시니 주님 쪽에 올 인하는 것이 옳지?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하누?

날 바라보는 아내의 '우울한 눈'은 어찌 달랠꼬?
병아리 처럼 ,

남의 둥지를 차고 들어서 울어제끼는 뻐꾸기의 새끼처럼 울어대는

자식들은 어쩌누?

 그래 , 주님의 뜻대로라면 박차고 선교 나가고 ... 하는 것이 '믿음'이지 않을까?

.........

생각이 나뉘는 게 우리 기독교인의 숙명이다.

즉, 주님은 어찌보면 '부담'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주님의 은혜가 주어지면 정답은 안다.

 이땅의 삶은 허상이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진실이며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갈등이 생기지만

갈등을 넘어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매일 순종함은

놀라운 평강을 주시어서

그 은혜로 주님 나라 갈 때까지 살다가 죽는 것.. .

그것이야 말로 잘 사는 삶이란 것을...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늘 주어지면 좋으련만,

또한 저러한 깨달음이 모두에게 주어져서

모든 선택받은 자가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면서도

올곧게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가끔 이렇듯 오늘 , 며칠 처럼 자꾸만

싸이클을 그리면서 다가오는 혼란이 있으면

헷갈린다.

헷갈림이 오래되면  주님의 흔적은 멀리 있는 듯하고

주님의 말씀은 부담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며

어느새 메마른 영혼의 갈증을 달래기 위해

이 산과 저산

이 큰산 저 작은 산을 헤메이기 시작하고

어느새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주님이 아니고

우리 속의 원죄가 투영된 다른 형상을 바라보고 있게 된다.

 

 삶 속으로 돌아와서

난 그렇다면 이런 신앙과 생활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하나로 일치 시켜 가야 한다는 말인가?

사람들과의 인기와

'하나님 뜻대로의 청결한 삶.'

'인생의 목적과 인생의 재미'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포기할 것들에 대한 억울함'은  어찌 채워가야 하는가?

주님이 손해 보시게만 하는 분이신가?

 

 내 인생의 목적이 다시 한번 정확해져야 한다.

'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서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

  나에게도 억울함이 없어야 한다.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의 허락하신 여유로움으로 즐겨야 하는 결과물로

세상적 물질과 여유도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삶속에서 정화되어

주님이 바라는 인격적 성화를 이루어 내고

결과적으로 내 모습을 보고

많은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님의 향기를 맡게되는

결과론적 전도가 이루어짐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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