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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불겠습니다 ( 렘4:5-18 ) 본문

구약 QT

그리 불겠습니다 ( 렘4:5-18 )

주하인 2009. 9. 10. 12:33

제 4 장 ( Chapter 4, Jeremiah )

 

 

조그만 몸짓이라도

주님

그냥 바쳐

올리겠습니다

 

가느다란 음성이라도

주님

그냥 불어

올리겠습니다

 

주님

나팔 부시라면

그리 하겠습니다

 

주님

크게 외치시라면

그리하겠습니다

 

부디

당신의 빛을

늦추지만

말아주소서

 

 

 

5.  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 
'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이땅에서 '

' 나팔을 불라.   크게 외치라'

' 너희는 모이라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라..고

주님이 예레미야님에게 말씀하시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두렵다.

 

 

10.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칼이 생명에 미쳤나이다  

 예레미야님은

'슬프도소이다'

' 주 여호와께서 '크게'  속이셨다' 면서 하나님께 따진다.

 

 다소 불경하지만 그 마음이 불경이 아니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발현한 것이니

불경보다는 솔직함이 돋보이고 그의 애절함이 돋보이는 것이다.

 

존비비어 목사님의 저서 '순종'에서 보면

복종은 태도의 문제이고 순종은 행동의 문제라 한다.

진정한 순종은 복종을 의미한다고 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권위자가 옳지 않은 명령을 내릴 때도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성경의 뜻이냐하는 데

그 내용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마음으로 태도로 복종할 자세를 취하면서도

행동은 주님의 말씀 범위 안에서 조금은 달리할 여지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 보이는 예레미야나

소돔과 고모라 멸망의 예언 앞에서 아브라함님의 타협

모세가 선택되었을 당시 하나님께 타협하는 것

그외의 광야에서의 몇번의 주님과의 타협이 그것이다.

복종의 마음과 태도를 지니되 가장 공손한 방법으로

주의 명령에 대응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

 그것이 올바로 순종하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

그게 반드시 옳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성경의 '권위자에 대한 순종'의 구절을 보면서

내 도덕성에 조금 맞지 않아도 윗분에 순종할 의지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어딘가 찝찝하며 해결되지 않던 부분에 대하여 설명이 되었다.

 오늘 예레미야가 언뜻 보면 불순종의 모습을 띄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본주의의 사랑'이나 '본인의 치기'의 발로가 아닌

복종의 태도 안에서 주님께 조심스레이 건의하는 모습을 보며

그 설명이 새삼 떠오른다.

 

 


14.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악한 생각.

정말 악이란 무엇인가?

주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음이 '악'이라고

성경에 나온 구절을 들어 누차 글을 썼음에도

살면서 그 악의 경계를 구분하기 조차 쉽지 않음이 사실이다.

 위의 예에서도

어디 주님에게 '대드는가?'  그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악의 틀인데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님은 그렇지 않았다.

 순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조금은 이해가 가지만

그 악을 정확히 구분지어내는 것은 어쩌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

그래서 그 '선민'의 선택을 받고

선지자의 인도를 받아가는 '유대'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도 타락해가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 지성을 가지고 일천 몇백년 동안

세상의 역사와 함께 하며 놀라운 성인들을 많이 배출한

카톨릭의 리더들이 '완전한 다원주의'에 빠져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위의 예레미야의 예에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든 것...

어떻게 보면 짜릿한 용기로 보이지 않는가?

그것을 주님은 질책을 하지 않으신다.

 

 과연 '악'이 무엇인가?

진실로 어찌 삶에서 악을 구분해 낼 수 가 있는가?

그래서 이 어지러운 세대에 '나팔 불고' '외쳐 소리크게 ' 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세상을 돌아보면 나쁜 짓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에 따라 바른 소리 하는 사람도 많아 졌다 .

매체가 늘어감에 따라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

세상을 향해 외치는 소리들이 많아졌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아지지 않고 자꾸만 더 세상은 타락하는가?

 

 산부인과 진료실에 있다보면 경악을 금치 못한다.

10대들이 산부인과에 찾아오는 비율이 많아 졌고

또한 그들이 '버젓이' , 정말 버젓해지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이게 된

'나 ' 산부인과의사의 마음도 놀라운 것임을 오래전 부터 썼지만

이제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해졌다.

 작년하고 비교하여 정말.. (.정말...이다.. ) 더러운 병이 많아 졌다.

'클라미디아'란 성병이 얼마나 많은지

좀 심한 통증으로 산부인과 찾아오는 10대들의 거의 대부분 - 올해 부터 그렇다.  -에서

발견될 뿐 아니라 50대 아주머니 , 가정주부할 것 없이

정말 놀랍도록 많이 체크된다.

 그 질병의 특성상 기술이 발달된 최근에서야 체크가 가능한 이유도 있고

가격이 비싸서 누구나 시행하지 않고 있다가

수년 전 부터야 본격적으로 시행한 탓이 없지는 않지만

올해 부터는 거의 매일 하루 1-2건의 '클라미디아 감염'이 발견되고

아주 난소나팔관 농양(고름 주머니) 환자 들이 입원한다.

 지난 8월은 그 수술 만 5건을 넘어 했다.

검사가 시행되지 않했던 지난 수년간은

뱃속에 농양(고름 주머니) 달릴 정도의 심한 질병은 일년에 몇건도 보지 못했다.

 내 환우 분들의 절대 수가 늘어난 이유도 없지는 않지만

그걸 감안해도 올해부터는 너무너무 많이 증가했다.

이것은 '성 문란'이 100% 원인이고

난 개인적으로 이것을 '종말 병'이라고 이름지었다.

  참고로 신문에서 어떤 의사 분께서

  우측 상복부 , 간 부위 통증이 원인을 알수 없이  지속되는

  젊은 여성의 상당 수가 이 클라미디아가 번져서 간 껍질에 유착을 일으킨

  'Fitz -Hugh - Curtis ' 증후군이란 이야기를 썼다.

  난 끄덕거렸다.

  벌써 난 많이 경험하고 있는 병이다.

  젊고 늙음,  행실의 바르고 나쁜 외적 증거가 없어도 .. 심하다.

 

 이 종말 병은 '악한 세태'의 변화의 원인이다.

그래서 애꿎은 가정주부 들도 피해자가 되고 있다고

나름대로 순화해서 생각은 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이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악함은 그 말초적인 재미와 비례하여 - 수배는 더 크게 비례할 것이다. ㅜ.ㅜ ; - 세상을

종말을 향해 달려가도록 만든다.

 신종플루?

이 새로운 종말병이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가지만

난 이 클라미디아의 심각성은 그 보다 더 심하면 심하지 덜하진 않다 생각한다.

솔직히 신종플루는 기존의 독감(플루)보다 치사율의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하다.

단지 처음이니 떠드는 것이지...

조류독감이 더 치사율이 높다.

이 클라미디아는 아직 죽는 지는 모르지만

살아있는 동안 그 후유증은 심각하게 남아 환우를 괴롭힐 것이다.

 

  다시 바로 전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이 '惡', 이 '惡함'이 그처럼 많은 큰 소리들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창궐하는가?

 그 악이 더 악해짐에도 문제는 있고

악에 대하여 눈감고 사는 악한 마음도 문제가 있지만

위에 쓰던대로 '악'을 올바로 구분하기 쉽지 않은데 원인이 있다.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노력하나도

올바로 서서 깨어 있지 못하면 왜곡되기 일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속수 무책으로 당해야 하는가?

 어제 바쁜 핑계로 쓰다가 중단했지만

이 산, 저산, 큰산, 작은산, 헐벗은 산에서 찾아가 소리소리 지른다고

주님이 모두 다 응답하시는가?

모두 다 주님을 바라보고 소리치는가?

혹시 악한  쪽을 , 바알 쪽을 '잘못 '바라보고 소리지르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왜 이리 어려운가?

왜 고민을 해야 하는가?

오늘 분명히 주님이 '이스라엘을 보고, 유다를 보고 '

나팔을 불고

큰 소리를 외쳐 돌아오라고 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는 좀더 흔들리지 않는 '악'에 대한 기준점이 필요하다.

 지금도 조금만 틈만 나면 내 자아가 내 앞을 가리워 버리고

내 영혼은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가려 한다.

 소리내는 것은 지상명령이시다.

잘못되어 가는 세상을 향하여 올바른 소릴내야 한다.

그게 주님의 명령이시고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존재의 이유이고

그러다가 천국을 가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바램임을 안다면

난 말씀 앞에 서려고 노력하고 준행하려 몸부림 쳐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말씀하시면  내 속에 들어 있는 왜곡된 지식체계를 자꾸만 내려 놓아야 한다.

난 내 의지와 내 판단을 내려 놓아야 한다.

내 판단은 오직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말씀을 올바로 내 영혼에 받아들이기 위해서

난 죽도록 큐티를 해야 한다.

큐티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받으려 노력해야 한다.

 말만 커다란 오늘 묵상의 거짓 선지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

성령의 그 평강이 내 따르는 '증거'가 되어야 한다.

 

 어제 저녁 아들과 성경을 읽기 전 '찬양'을 했다.

그 중 일 부가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이다.

정말 오늘 주제랑 일치 한다.

 아이가 컴퓨터하고 있는 동안 혼자 먼저 성경을 읽고

오랫만에 기타를 집어 들어 조율하고

몇년 전인치유 사역 때 만들어 두었던 악보를 꺼내 들어

외울 목적으로 몇곡을 연습했다.

그 당시는 악보를 외울 틈과 생각도 못했기에 시도한 것이

혼자 은혜를 받기  시작했다.

아이가 와서 같이 하니 더 은혜롭다.

늦은 시간이라서 목소리를 자제자제하면서 하는 것이라

고운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아이와 나만의 영혼의 떨림이 둘 사이를 휘감는다.

 시편 적은 구절을 찾아 두장을 읽고 나서 나누었다.

정말 필요한 말씀이 써서 대기 해놓은 듯

아이와 나는 깊은 이야기를 멈추어짐도 없이

오랫동안 나누게 되었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마치 아이가 나의 동역자 같다......^^;

어린 녀석,

늘 부족하기만 하고 느린 것 만 같은 아이와 나누는 시간 내내

주님의 은혜가 느껴진다.

 

 그렇다.

세상이 악의 구분이 불가능하고 힘이 들어진 이유는

어제의 묵상 중에 느낀 것처럼

하나님과 세상을 같이 신경써야 하는 우리 기독교인의 특성 상

그것을 부담으로 느끼고 힘이 듦으로 느껴짐에 따라

말씀을 피하게 되고 

자아의 앞섬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 영적 이스라엘인, 영적 유다인은

주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야 한다.

순종을 기본으로 

주님을 향한 방향으로 늘 나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나서 주어지는 그 놀라운 기쁨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기준으로 하루를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이 명령하는 것을 복종의 태도로 순종해야한다.

그것이 내 영혼의 놀라운 감성을 깨울 것이고

그것은 내 인생의 먹고 삶과 성공과 재물.......모든 세상의 복을 책임지시게 될 것이다.

그 원리다.

그 원리 만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의 악에 묻어 오염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누르면서 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난 그리 생각한다.

아니다.

난 그리 체험하고 있다.

주님을 믿고

말씀을 기뻐하며 사는 동안

내 물질도 주님이 책임지시고 계시다.

지금 그렇지 못한 분들이 계신가?

그 분들은 시기와 순서의 문제다.

곧 그들이 주님의 말씀 앞에 서는 순간

시간이 되어 주님이 내려주시는 시간이 되면

그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복'을 물 붓듣이 주실 것이다.

 고난은 영적으로 먼저 서길 바라시는 주님의 뜻 안에 있다.

얼른 순종하고 복종하자.

말씀 앞에 서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자

그러면 세상은 선으로 가득차게 된다.

최소한 우리가 서 있는 앞은 그렇게 될 것이다.

쏟아지는 주님의 은혜를 감당하기 어려웁게 될 것이고

부어주시는 축복으로

영적 이스라엘 동지들아................. 

 

난, 나팔을 불고 있다.

최소한 이 블로그 안에서는............

 

 

 

적용

1. 한마디라도 외치겠다.

 기독교 인이든, 불신자들이든...

 주님의 말씀 한마디.

 

2. 말씀 일곱장 읽겠다.

 

3.  악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한다.

 선은 말씀과 은혜와 내 인격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인격의 변화란 사랑, 긍휼이 많아짐을 의미하고

 그것은 내 영감이 선하게 증가되는 것을 증거로 한다.

 악한 사람들은 절대로 선한 눈물이 없어진다.

 

 

4.순종하는 삶을 살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낮아져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가 약한 것들을 기뻐하고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고.... 는

 내가 그 상황에 당함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성질내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 것 등의 태도의 문제 만이 아니다.

 그렇게 낮아져서 신음할 내 자아를 기뻐 받아 들이고 안아주는

 내가 나를 용인하고 사랑하는 '주님의 피조물로서의 나를 사랑'하는 개념을 포함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뜻이다.

 내가 나를 사랑함은 부족한 내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기뻐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은 이것을 전제로 한다.

 이게 주님을 위해 영광을 올리는 길이고 

 그것은 내가 사는 인생의 목적의 일부이기도 하다.

 

5.  주님의 원하시는 방향을 향해 손들도록 지도하는 것이

   나팔을 옳게 부는 것이다. 

   선한 일이다.

   문제는 내 태도다. 

   조금더 온유하게...........

 

 

 

 

기도

 주님.

오늘은 묵상 구절이 쉽지 않음에도 길어졌습니다.

생각을 많이 주셨습니다.

이게 남을 위함이 아니어도

나를 위함이어도

내 블로그를 유지하는 기조와 어긋날지

혹은 합당할지 조차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를 통해 나를 인도하시고

오늘 하루 어제 보다 조금더 신심깊은 올바른 성장을 하기를 바라시는 뜻은 알겠습니다.

주님 바랍니다.

늘 흔들리기가 바람 앞에 갈대보다 못한 저로서는

가끔 내 소리내는 것이 정말 주님의 뜻과 합당한 것인지 혼란 스러워

쉽게 나팔 불듯

당당하게 주님의 이야기를 세상에서 내 뱉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저로 선과 악의 구분을 정확히 하는 지혜를 허락하시고

상황상황 당당한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소서.

주여.

간절히 바랄 것은 사람들의 가슴에 회한이 남는 소리를 아니하게

제 입에 온유함을 허락하시고

제 얼굴과 제 눈을 잡아주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

  -  music by 주하인 + 아크

 

아크는 둘째 아들 아이디입니다.

10시 넘은 시간 아파트 거실.

성경읽기 전.

숨죽이면서 부른 찬양.

그래도 둘은 은혜가 되어서

많은 나눔이 이어졌습니다.

 

주님은 역시...

 


 

 

 

1.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가로 나를 늘 인도하여 주신다

 

2. 예쁜 새들 노래하는 아침과 노을 비끼는 고운 황혼에

사랑하는 나의 목자 음성이 나를 언제나 불러주신다

 

3. 못된 짐승 나를 해치 못하고 거친 비바람 상치 못하리

나의 주님 강한 손을 펼치사 나를 주야로 지켜주신다

 

 

후렴)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

철을 따라 꼴을 먹여 주시니 내게 부족함 전혀 없어라

1.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가로

나를 늘 인도하여 주신다

 

2. 예쁜 새들 노래하는 아침과

노을 비끼는 고운 황혼에

사랑하는 나의 목자 음성이

나를 언제나 불러주신다

 

3. 못된 짐승 나를 해치 못하고

거친 비바람 상치 못하리

나의 주님 강한 손을 펼치사

나를 주야로 지켜주신다

 

 

후렴)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

철을 따라 꼴을 먹여 주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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