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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하게 하소서 인식하게 하소서 인도하소서(벧전 4:12-19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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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하게 하소서 인식하게 하소서 인도하소서(벧전 4:12-19 )

주하인 2008. 5. 8. 10:13

제 4 장 ( Chapter 4, 1 Peter )

 가는 몇 주전 부터

심한 알레르기로 얼굴이 붉은 마스크 쓴 것 같던

내 아내.

 걱정은 뒤로 하고

너무도 잘 적응하고

마지막엔

아기 피부처럼 맑게 되어 돌아왔다.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자인 내 아내는

시련이 꼭 힘듦 만은 아님을

증명해 내고야 말았다. ^^*

주님이 살아 계시고

말씀이 하나도 헛되지 않음을..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너무도 좋아하는 구절

 사랑하는 자들아..

실은

사랑한다고 해도

잘 현실감이 없었었었다.

불쌍한 나였다.

사랑받는 자란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늘 불안하다.

크나큰 관심과 칭찬이 설령 있었어도

믿어지지가 않으면

얼마나 불행한가?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고 달라져간다.

사랑한다는 말이

그리 쑥스럽지 않다.

그리 어색하지 않다.

나이가 들어도 징그럽게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ㅎㅎ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다.

주님이 날 '사랑한다' 신다.

얼마나 대단한가?

 

 그런데

그 사랑하는 자가 해야될 행위가 있다.

그것은 조건은 아니다.

우리의 역기능의 부모가 했던

조건적으로 해주던 그런 개념이 아니다.

마땅히 사랑 받는 자가 나타날 수 밖에 없고

사랑 받는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는 권고의 개념이다.

내가 그리 하지 않아도

주님은 날 사랑하심은 틀림이 없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그리 하지 않아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이 더욱 성장하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내 마음과 똑같은 개념이시다.

 

그 마땅히 해야할 것이 있다.

 

 시험을 받아야 한다.

그 시험도 그냥 시험이 아니고

불시험이다.

 이것은 '고난'은 사랑 받는 자의 필연이라는 이야기다.

즉 돌려 이야기 하면

내가 받았고 받고 있는 힘듦이

이유가 다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고난 중의 지독한 어려움과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깊은 외로움 조차

주님이 다 알고 계셨다는 이야기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가?

고통 받을 때 눈물로 쳐다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것이 우리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고통 중에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힘듦도 힘들지만 기쁘게 받을 수 있다.

이전에는 외롭게 뛰는 혼자의 달리기 인줄 알았었지만

이제는 땀이 나도 응원해 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힘이 나는 경기가 될 것이다.

그 분이 그것을 기뻐하실 것이다.

응원해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그 분을

기쁨으로 받아 들이는 것.

 땀을 흘리고 슬며시 올라가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지는 시험 과정.

 

 그게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자들이

마땅히 걸어가는 인생의 과정이다.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위의 원리를 모르는 자들이

이 구절을 보면

마치 '메조키스트'들의 피 가학적 즐거움을 말하는 것 같이

소스라치게 놀랄 수 있는 구절들이다.

 고난을 즐거워하라구?

그게 가능키나 한 일인가?

자기 팔목에 젓가락을 꽂고

다리를 가부좌 틀고

앉아서 벽을 향해 잠자고

꺼꾸로 매달리고

땅속에 파묻혀서 수도한다고 하는

몇몇 수도자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기독교는 다르다.

그들은 그들의 의가 그들을 그렇게 하지만

기독교 인은

주님을 위해

주님으로 인해

주님 때문에

주님이 허락하신 '인내'의 한계 안에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거기엔

기쁨이 있다.

거기엔 놀라운 평강의 펼쳐짐이 있음이 다르다.

그들은 외롭지만

우리는 외롭지가 않다.

그들은 '도'를 이룬다는 자가당착적인 쾌감은 있을 지 몰라도

우리는 사랑받는 자로서 당연히 할

부드러운 만족

기쁨이 있음이 다르다.

 

 문제는 인식이다.

이러한 주님의 깊은 사랑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그 분의 사랑을 받아 들이면 된다.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자들은

주님의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깊은 만져짐을 겪으면 된다.

성령의 터치를 체험하면 된다.

주님의 십자가의 그 사랑의 극치를

영혼으로 이해하면 된다.

배우고 느끼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말씀 앞에 겸허해야 한다.

말씀으로 영혼의 원리로 삼으려는

선택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주님이 다 하신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보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그리스도 때문에 약한 것을 참으면..

능욕을 견디면..

복이 있다고 한다.

말의 유희가 아니다.

 

 

성령.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신다 하지 않는가?                  (펌)

 성령 충만하면 얼마나 기쁜가?

 그 분이 늘 우리의 위에 계신다면

이 세상의 풍파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게 몰아쳐도

해볼 만 하다.

 그 분이 날 사랑하시기에

내 가슴 한켠이 늘 든든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인정 만하고 인식만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견디기만 하면

그 성령님이

인도하실 것을 ..

 

고난은 고난으로 인정하면

고난이 커지지만

고난은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견디시면

선으로 바뀐다.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할 일이 있다.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실패해도 괜찮다.

노력 자체를 주님은 귀하게 보신다.

부끄러워 하는 것은

사단의 장난이다.


     

 

적용

 

1. 난 사랑 받는 자다.

 기뻐하겠다

 

2. 사랑받는 자로서 해야할 일을 하겠다.

 인내하겠다.

 인식하겠다.

 

3. 성경 여섯 장 읽겠다.

 

4. 난 행운아다.

 내 행운을 이웃에게 알리겠다.

그게

찬양이든

진료의 성실함이든

블로그이든

관계에서의 인내든..

 

5.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님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지름길이고

 성령이 내 위에 늘 계실 기회다.

 

 

기도

 주님

어찌보면

어이없을 이야기지만

그 안에 주님의 원리가 숨어 있음을

최소한

압니다.

그래서

전 행운아입니다.

그 사실이 아는 것을 넘어

느껴지고 체험되었기에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후의 고통 속에서

아직도 계속되는 어리석음의 되풀이가 문제입니다.

주여.. 주여.. 어찌하여.. 라고 하려 합니다.

물론 제 속의 연약함 때문이기도

인간의 본성이기도함을 알면서도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주여

이 연약함 마져 아시는 주님이시여

오늘 그것을 아시고

사랑하는 자라는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불시험이 저에게 늘 있음을 공감해주시고

그럼에도

그게 행운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인내하면

내 머리위에 계실 하나님의 영이

날 또한 번 쓰다듬을 기회임을 인식도 시켜주십니다.

주여.

도우심을 감사합니다.

인식이

시간을 보내며

하루를 살다보면

자꾸만 잊게 됨을 고백합니다.

그게 지금까지입니다.

주님..

이제는 조금 다르게 하소서.

말씀대로 되게 하소서.

성령이시여.

인내하게 하소서.

인식하게 하소서.

그리고

축복하소서.

인도하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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