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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

이 일이 지나고 나면 (왕상17:17-24)

주하인 2006. 5. 25. 12:17
17 이 일 후에(Some time later )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 어디에나 누구에나 고통은 있는 법이지요 )

 

( 얘도 절규를 하네요.     뭉크 같이...ㅎㅎ)

 

 이 일 후에(Some time later )라니...

그 일이라면 끊임없이 기름과 밀가루가 나오는 그 사건 아닌가?

죽기 바로 직전 꿈결처럼 나타난 엘리야 선지자에 의해서 극적인 도움을 받고 살아나고 앞으로도 걱정이 없는 그 일이 아닌가?

 아니..

먹고 살일이 걱정이 끝나고 나니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인가?

 

 아들이 병들었다.

현실적으로 눈앞에 혼란이 오고 걱정이 쌓이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찌기 시작했다.

 

그러나 숨이 끊어졌다.

엄청난 충격이 왔다.

기왕지사 죽을 목숨.. 이제 배불리 먹다가 죽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서운하고 답답하긴 하지만 위로가 될 수도 있으련만...

 

 사람의 마음은 그게 아닌가 보다.

죽을 고비를 넘겨서 먹구 살만해서 모든 시름 놓으려니 다시 그런 환란이 몰아닥치면 이전 것은 싹 잊어버리고 충격이 더 커지는 모양이다.

 

 18절에 보면  절규를 한다.

 

 몇마디 되지 않는 이 구절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속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으니  참으로 성경은 재미도 있고 신묘하기도 하다.

 

 

 아침에 매일 큐티에서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사래가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다 못해....

자기들 맘대로 하갈을 취해 아들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을 보며

'인내'는 신앙인에게 너무도 필요한 성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인내는 믿음의 선진 들에게도 너무나 어려웠던 항목이며

이 인내의 시간은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시기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듯한 이 지루함의 순간에도 주님은 불꽃같이 보고 계신다.

이 인내의 시간을 잘 넘기면 엄청난 축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부의 반응은 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분명히 그 녀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생에 베푸신 그 사랑을 알고 기적을 체험하고 옆에 계심을 체험하고 있고 현재도 밀가루와 기름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

단, 일초도 그 분의 보위하심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고 , 아직도 그 간증의 기억이 따끈따근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그 은총이 약간의 개인적 어려움이 있다고 이리 표변한다.

은혜가 은혜로 받기질 않고

지독한 공격과 원망으로 변한다.

 이치적으로 이해가 가는가?
엘리야는 단지 그녀를 도왔을 뿐이다.

과부를 살리신 것 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의와 아무런 연관없이 예수님을 보내시고 매일 같이 성령을 통한 성결은총을 밀가루 처럼 기름 처럼 보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히려 원망하는 경우가 없는가?

 

( 고통은 나이 불문입니다.   사는게 苦海 맞지요...)

 

'아버지 하나님 !  왜 나만 !!! '

 

 참으로 죄송한 고백이지만

입으로 발설하지 못해서이지

며칠 이내에 몇번은 나도 저런 원망이 슬쩍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기도하려고 눈을 감으면 눈물이 쏟아질 때

저런 감정이 없었다고 어찌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과부는 솔직하다.

마치 다윗이 시편에서 가끔 저런 솔직한 감정의 일단을 보인것처럼...

그리고

저런 감정은 이치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각박한 현대에서는 훨씬 더 많은 강도로 발생하고 있다.

 

 문제는 저런 원망후 돌이키지 못하는게 문제다.   

정말 하나님과 상관이 있지 않다고 실족해버리면.....그건  파멸이다.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그래..

주님 곁에 있으면 자꾸만 커져 가는 것이 죄의식이다.

무슨 일만 생기면 내 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죄 지을일이 그리 많지 않았을 그 당시의 과부께서 저리 고백하신다.

왜 그럴 까?

 

 그런데 문제는 이 죄의식이 '회개'로 이어져 주님께 더 다가가는 도구가 되지 못하고 있을 때이다.

 이것은 '죄책감'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이다.

죄책감은 이렇다. 

 십자가에 내려놓고 주님이 해결해 주시길 가만히 바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주님의 임재하심을 알아야 한다.

그 분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때가 되면 그 분은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우시고 모든 죄에서 자유로운 '회개'를 허락하시게 된다.

 이때는 죄가 생각이 나도 원망하고 남에게 투사하며 그것도 모자라 주님을 저주하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게 된다.

 

 믿는 사람들이 과연 주님 앞에 다 해결 받았을까?

천국에 당장 올라가서

천사같은 얼굴표정 하며 주님 보좌에서 나오는 그 빛을 받으면서

영원토록 하나의 갈등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니라면 왜 십자가의 중생을 받고도 그럴까?

 

  아들을 죽게 하려고

이제 그 수준이 이렇게 대놓고 '원망'하는 수준까지 올라간다.

 이 원망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원망은 자신을 해칠 때는 우울 증으로...

남에게 투사할 땐 무서운 분노로 오는 파괴적 감정이다.

드디어 하나님께도 투사하지 않는가?

오늘 보이는 이 과부의 병적인 현상도 해결 받지 못한 원망이 이유다.

엘리야는 도움을 주신 분인데.. 오히려 배은 망덕하게..

 

빛은 어두움에 의해서 배척당하게 되어 있다.

주님 앞으로 가려는데는 그 자체 만 가지고 핍박과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친구들이 술안먹는 교인 되었다고 전화하면 틱틱댄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익숙한 이러한 죄성 감정에 대하여 어찌 대처해야 하는가?

 

1. 이일 후에...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신앙 인생에 벌어진 주님의 그 간섭의 날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늘 감사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그래야 멍한 망각을 피할 수 있다.

 

2. 주님은 엘리야가 그랬던 것 처럼 언제나 곁에 계시고 있음을 느끼고 감사해야 한다.

 

3. 이제 곧 고치시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의 고통 조차 모두 다 그 분의 섭리 하에 있음을

  믿고 기뻐해야 한다.

 

4. 늘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5. 엘리야 같은 믿음의 선배들과 교제를 해야 한다.

 

6. 인간의 원죄에 의한 어두운 속성에 대하여 이해하고 스스로도 감싸 안고 위로해야 한다.   그래야 어두운 죄책감에 빠지지 않는 선한 죄의식으로 회개가 가능하다.

 

7. 주님이 보이지 않는 메마른 순간이 곧 있을 축복의 징조이니 인내하고 기뻐해야 한다.

 

8. 믿는 우리는 애꿎은 고난을 받게 되어 있다.  

   핍박을 기뻐하자.

엘리야는 도움을 주신 분인데.. 오히려 배은 망덕하게 원망을 받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오히려 아들을 살려준다.

 

빛은 어두움에 의해서 배척당하게 되어 있다.

주님 앞으로 가려는데는 그 자체 만 가지고 핍박과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친구들이 술안먹는 교인 되었다고 전화하면 틱틱댄다...

 

 

 그래서

높은 믿음과 성실한 인격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성실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기도

 

감사합니다.

주님

 

또한번

과부의 언어를 통하여

그의 너무나도 비신자적 인격을 통하여

나의 모습을 들여다 보고

주님께서 저에게 권면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극명히 보여주시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수천년 전 중동의 변방 인물이나

지금의 우리들이나

하나도 다를 것 없는

그 인간의 죄악성을 그대로 들여다 보게 하셔서 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주님 앞에 올곳이 서서

십자가 앞에

모든 고민과 갈등과 죄책감과 원망과 ... 죄를 내려놓고

해결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역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의를 하나님께 집중시키는 수단이다.

- 찰스 스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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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6:5-6)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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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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