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이제는 이미 이루어진 일 (요19:28-30) 본문
제 19 장 ( Chapter 19, John )
둘째와
이미 졸업한 고등학교을 산책했다.
달이 걸린 교정의 나무가 을씨년 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아직 밤이 깊은 것 같아도
조금 있으면 새벽이 오고
해가 뜰 것이다.
이미 주님은 그렇게 이루어 놓으셨다.
온 우주는
그분의 뜻대로 움직인다.
아직
그림자는 깊은 듯하지만
달은 밝고
그림자는 두렵기 보다
운치가 있다.
주님이 이미 그리 하셨다.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now ;이제)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이 후에'라 한다.
수치마져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다가온 일행에게 당부의 말씀을 마친 후..
그 후에,
아직 고통은 온전히 끝나지도 않으셨을 텐데도
주님은 '이제 ' 다 이루었다고 하신다.
성경을 다 이루었다 하신다.
그러고는 돌아가셨다.
나 개인적으로 받아지는 느낌은 그렇다.
주님은 우리의 죄와 무지로 인한 고통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그 중에서도 '수치심'은 마지막까지 떨구기 힘든 질긴 것인가 보다.
어쨋든 주님은 나를 대신하여 온전하게 길을 열으셨다.
그리고는 다 이루 셨다고 확언하신다.
십자가로 인하여 온전한 생명의 길을 다 완성하셨다는 것이시다.
'이제, 이미'라 하신다.
그것이 말의 유희가 아니고 '이무 이룬 줄 아시었다'고 나오는 것이다.
확실한 사실인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아직도 목이 마르시고
아직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상태로 고난이 그친게 아니다 .
이상하지 않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면 모든 죄가 그치고
우리 속의 갈등은 없어지는가?
움직이는 모든 반경이 다 꽃과 생기로 가득차는가?
회개할 거리는 하나도 없는 온전한 사람인가?
아직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셔 고통을 받는데
정말 우리의 삶 속에는 예수님 영접하고 고난이 하나도 없을까?
어차피
세상을 산다는 것은 사단의 영역을 걸어간다는 것이다.
공격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주님은 십자가로 이겨놓으셨다.
죽으면 주님이 완성해 놓으신 천국행 십자가 대로를 밟고 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이루어 진것이시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언제든지 우리가 십자가를 선택하기만 하면
그것은 이겨놓은 싸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십자가를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가까이 했느냐는 것이다.
해마다 사순절 만 되면 가정에 분란이 있다가
사순절이 끝나고 나면 어느샌가 무슨 일이 있느냐는듯이 평화로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올해도 여지없이 사순절이 들어오고 조금씩 흔들리더만
아들을 향해 화를 냈다.
머리 큰 아들은 반항을 하고...
냉랭하다.
화를 내고 나면 두 마음이 뒤죽박죽이 된다.
주님께 죄송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함
속상한 마음.
역기능의 폐해는 그리 쉽게 씻어지지 않는다.
열심히 잘 달려오고 이정도면 되었다 하는 순간에
넘어지면 다시 한번 옛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그래도 요번엔 조금 더 다른 대처를 했다.
주님 말씀 묵상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십자가가 유난히도 크게 다가온다.
그 십자가 위의 주님이 뒤틀리려는 심사를 받아 가신다.
가슴이 미어지려는 마음을 대신 지고 올라가시는 듯 하다.
훨씬 빨리 안정이 온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생명을 내 영혼에 받아 들인다.
주님이 받으시는 고난을 아주 조금이나마 같이 느껴 보게 된다.
수치를 주님이 가져가신다.
십자가에 못박으신다.
훨씬 마음은 편하다.
스쳐지나가는 사단의 소리들이 약해진다.
오늘.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날이시다.
아침에 나오려니 괜히 마음이 답답하다.
주님이 그러신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도 이제는 이미 끝난 싸움이다. '
끝났어도 고통은 좀 있지 않겠는가?
문제는 십자가를 늘 묵상하고 영혼에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하는 것이다.
그리되면 영혼이 떠나서 돌아가도
천국의 삶이 기다림을 확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성경의 응답을 이룸을 확신하고 사는 삶이 얼마나 힘이 있겠는가?
죄는 죄다.
죄는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수치도
상처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그리고는 이미 이루어진 '축복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전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사는 것은 아직 온전한 고통으로 부터의 자유는 아닐 지라도
주님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십자가 다리를 타고
자유롭게 흘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
난 자유인이다.
이미 자유로와 졌다.
죽어 주님 곁에 가는 날까지
힘을 내어 살자.
기도
주님
감사드립니다.
쉽지 않은 묵상이고
그 묵상의 이미 이루어진 승리를 이해하고 믿는게
쉽지는 않았지만 주님 저로 확신하고 기뻐하게 하소서.
모두 용서하게 하시고
모두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 놓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시여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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