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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과 죄인 사이[막2:13-28] 본문

신약 QT

의인과 죄인 사이[막2:13-28]

주하인 2020. 3. 5. 08:38



17.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의인'에 대하여

우리는 모두 다 잘 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후 '성령'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는 '의롭게 되었다. '

그래서 우리는 '의인'이..................다.....라고 할 수 있을까? ^^;


 오늘 예수께서 그러신다.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다 '

의인이라면.....난.. 지금이라도 예수님을 찾을 더 이상의 이유가 없겠지.

예수께서

"너는 벌써 다 깨끗해졌으니,

 즉 의인이니

나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

하산하거라 ㅎㅎ" 하지 않으셨을까?

난. .아직도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이 전제가 되지 않은 내 매일은

솔직히 눈뜨고 서 있을 자격조차 없는

'죄'로 뒤숭숭한 자 맞다 .

그러기에

주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하신 것 처럼

난..

아직 죄인과 의인 사이의 그 어떤 지점에 있는 자 아니던가?


'의인'의 자격을 가진

죄인같은 의인 ^^;;


그 무슨 소리인가?

아직.......갈 길이 많이 남은

더 '정화'되고 '연단 ' 받아

남은 '죄' 다 쏟아버리고

온전 성화 되어야 할 게

바로 '나'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나.. 죄인(정확히는 죄인 같은 의인 ^^*)이

남.. 죄인.. 을

정죄하거나 그를 핍박하거나

그로 인하여 '혐오'하거나할

그 어느 건덕지라도 있단 말인가?

 

오늘 말씀이 그렇다.

아직 죄된 자가

죄인을 핍박할 그 어느 건덕지도 없으며

아직 떨어뜨릴 죄가 남아 있는 자니

스스로도 좌절하거나 눈치 볼

그 어느 이유도 없다는 이야기다.

 더

주님 예수님을 바라보며

매일 말씀으로 순종하고

기도와 간구로 내 더 의로울 매일을 살아내야 한다.

감사하다.



주님.

오늘은 죄가 아직도 완전히 떨구어지지 않은

죄인같은 의인

죄와 죄 사이

의인과 죄인 사이에 대하여 묵상하게 하십니다.

주여.

예수님 믿는 자라고 무시할 위치도 아니며

예수님 믿는 데 왜. 라고 좌절할 상황도

아직은 아님을

오늘 말씀을 보면서

다시금 돌아봅니다.

내 주여.

주님의 곁에 더욱 더 바짝 붙어

오늘 말씀을 붙들고

하루 더 열심히 살아내어

온전한 의인이

어서 빨리 될 수 있길 기대해야겠습니다 .

내 주여.

도우소서.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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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시  또 자유(2011.01.16)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예수꼐서 '다시 ' 바닷가에 나가셨다한다.

바닷가에 가니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나가셨던가?

예수께서 움직이시니 군중이 몰려 드신 것인가?

몰려들 것을 아시고 가르치실 때가 되어서 나가신 것인가?

 어찌되었든

주님이 '다시 ' 나가시기로 결심하셨을 때

그곳 바다에 나온 자들은 '진정으로 귀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행운의 사람들이다.

 개중의 얼마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기회를 주신다.

늘 기회를 주시려 하시고 계시다.

그때 그곳에 있는 자들은 귀한 복을 얻는다. 


 

 

14.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펌)

 

주님

이렇게

기다리고 사모하니

어서오소서

 


'또' 지나가시다...라 하신다.

또 한번 그 길을 지나시는 것인가?

그냥 '강조의 또'란 말씀이신가?

또 그길이라면 문맥상 이어지지 않는다.

강조의 의미라면 무엇을 강조하시는 것인가?

그 길위에서 만난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만나게 된게 그 지나가던 중이라는 점을 강조하시는 것인 것 같다 . 

 만일 그가 거기에 앉아 있지 않더라면

예수님의 제자의 이름이 바뀌었을까?

어쩌면 그가 그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더라면

그가 있을 곳에 '또' 지나가셨을 지도 모르고

아니면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지 모르기도 하고

아니면 11명의 제자 - 가능성은 적지만.. -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 예수님이 '또' 지나가시는 그 길에 앉아 있음으로 인하여

온 우주에서 가장 행운이 있는 자가 되고 말았다 ^^*

 

 '다시'와 '또' 를 통하여 주가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던가?

주님은 또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시고 다시 찾아 오신다.

그런데 그 때 그 자리에, 그 바닷가에 있으면

그는 가장 귀한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 분의 허락하신 그 값없는 은혜,

가장 놀라운 기쁨을 놓치게 될 지도 모른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려 노력하며

내 삶의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개선해 나가려는 노력은

정신차리고 보면 

내가 예상치도 못했던 현실의 과분한 변화가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온 것도 있지만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노력 만 가지고도

혹은 그 분의 세미한 음성이 느끼는 순간

내 영혼에 기대에 부풀게 하는 듯 심장이 두근거리며

영적 충만감이 넘치고

마음이 놀라웁게 평화로운 체험을 잊지 못해서 그렇다.

점점 믿음의 시간 - 성장이라고는 반드시 못하겠지만 ^^; - 이 지나면서

뚜렷해지고 확실해져 간다.

 그러한 체험은 '다시'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실 때

언제나 그 분이 오실 듯한 '영적인 ' 바닷가 , 그 길위에 있어야 한다.

 그 바닷가 , 그 길 위에 있음은

행실을 조신하게 하고

말씀 하시니 따르려는 순수한 결심을 하고

주님 주시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그것이다.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그 바닷가

그 길위에서 다시 만난 주님이 허락하시는 것은

'자유' 시다.

 자유는 날아갈 것 같은 홀가분함이다.

그렇지 않은 때에 예상 못한 터짐이다.

압력이 세지다가 갑자기 풀려남이다.

그럼에도 확신되는 '안전감'이 동반된 후련함이다.

눈물날 기쁨이다.

 

주님이 주심은 그렇다.

주님은 천국을 허락하셧다.

우리의 사후에

현실의 압박 속에서도...

 

 그것은 주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우연히 그 길, 그 바다에서 다시 만난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예수님의 보혈을 허락으로

우리의 영혼에 작용하심이다.

 

 

 아내가 오랜 두통을 가지고 있다가 연초에 결심을 하고 입원하여

MRI 찍었는데 예상치 못한 '동맥류 - 동맥에 꽈리같은 혹이 생긴 질환'가 생겨서

S병원에 예약을 해 놓았다.

자칫하면 '홀애비' 내지 ' 반신 불수 ' '식물인간' 아내와 살 뻔했다. ㅜ.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두통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연히 발견된 ,

미리 coiling이라는 특수 기법으로 치료하면 완치가 가능한 질환이다.

난...어제 묵상 구절을 보면서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이해가 갔다.

'기도 '많이 하는 아내다.

사람들에게 참으로 성심껏 잘하는 아내다.

아마도 아내의 그런 품성과 쌓인 기도로 주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 치료하신 것처럼

아내의 질병을 미리 발견하게 하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사했다.

 저녁에 아내를 퇴원시켜 수요 예배 드린 후

집에 떨궈 놓고 수영을 갔다 오면서

계속 마음에신호가 오던 가족 예배를 드리기로 마음 먹었다.

'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모시고

철저히 한마음으로

온전히 예수님 만이 고치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런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군중을 뚫고'

그들의 손가락질과 예수님 머리 위에 떨어질 '먼지'와 '돌' 같은 것을 감수하며

돌발적으로 '옥상'을 통해 지붕을 뚫고 환자를 달아내리는 것은

중풍병자의 병 나기 전 부터 베풀어진 사랑과 기도 탓에

네 명이 '철저히 하나된 믿음으로 밀고 나갔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가족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당연히도 어머니의 상태에 대하여서도

완전히 이해가 되어야 하고..........

 들어가 보니 아내는 잠들어 있고

부르니 감사하게도 순수하게 응하는 큰 아들과

사도신경하고 성령 '찬양'을 드렸다.

아이가 훌쩍이는 듯하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는 말씀을 나눴다.

말씀은 자연스레이 '믿음을 바탕으로 사랑 안에서 하나된 가족 공동체' 였고

곧 있으면 아버지가 될 만한 나이에 있는

큰 아들에게 ' 아버지로서의 롤모델'로 주모의 모습을 보며

너는 네 자녀들에게 더욱 잘할 수 있음도 확신으로 심어 주었다.

아들은 말은 안하지만 감동한다.

참 오래된 벽이 최근 얼마 전 부터 녹아 내리고 있음을 느낀다.

솔직히, 열심히 세상을 사는 것들도 중요하지만

믿음을 약화시키며 혼란 스러워 하는 세상적 성공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경건한 자세를 추스리고

좋은 아버지라는 명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려는 자식을 가진 내가

더 행운이라는 생각이 듦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들과의 가족 예배.

어쩌며는 별거 아닐 수도 있을 행사에 감격하고 감동할 수 있음은

 '다시'

 그리고 ''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려 하고 섰기에

예수님 그 분이 허락하신 '자유' 탓이 맞을 것이다.

그러기에 돌아 생각하면

예수님을 모르는,

믿지만 깊은 만남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이 세상을 허겁거리며 사는 것보다는

어찌 이리 행운이고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내내 가슴을 충만히 채우고 있었다.

아이와 잠시이지만 참으로 행복했다.

 

 그렇다.

다시 또 하루의 어쩌면 큰 변화 없는 하루가 밝았고

들어가는 나이에 근육과 기력이 쇠하여 갈 것이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있고 기대가 되는 하루가 됨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조금이라도 겸허하려 마음 가지고

아주 적지만, 그래도 늘 떠나지 않으려는 노력을 보시고

그 분은 내 영혼에 '자유'를 허락하신 탓인 듯하다.

 

이,자유가 내 영혼의 생명을 표현하는 단어로 꼭들어 맞는다.

 

 

 

적용

1.  다시 시작이다.

 새해가 다시 밝아온지 얼마 안된다.

 새해 아침 특별새벽기도를 한번도 빼먹지 않았다.

 다시 시작이다.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는 한 해가 되리라.

 

2. 또 다시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을 기억하자.

 그 분은 내 잘못은 기억도 하지 않으시나 보다.

 다시 또 나를 사랑한다고 수도 없이 외치신다.

 주님 믿고 좋은 것이 이것이다.

 난 사랑받는 자다.  

 

3. 자유.

 주님의 자유를  세상에 외치자.

 그 분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신 분이시다.

 그 분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다.

 모든 형식의 주인이시다. 

 그 자유를 가슴 깊이 받자.

 미움으로 부터

 과거로 부터 자유롭자.

 

4. 이해하고 받아 들이자.

 예수님은

 타인의 잘못과 불의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이자 논리가 된다.  

 그래서 더 자유롭다.

 

5. 성경 세장 읽으리라.

 그 분은 가르치신다.

 죽도록 배우자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날마다 새로워 지길 원합니다.

이전의 품고 다니던 어리석음 미움,

오래된 오류의 생각들

괜한 부정적인 마음들 다 내려 놓기를 원합니다.

그게 주님의 가르침과 인도하심과

주님의 원리 안에서 그리되길 원합니다.

주님

다시 주님 흔적 보이실 그 영적 바닷가 에 나가 서 있기를 선택합니다.

주님

또 주님 자주 다니실 그 길목에 앉아 있기를 선택합니다.

주여.

이 적은 열심을 기억하시고

놀라운 가르침과

레위를 제자로 선택하신 것처럼

저도 놓치 말고 귀히 여기소서.

영적 육적 축복을 허락하시사

힘껏 살아가도록 도우소서.

이 적은 세상의 재미 속에

의미 깊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끄소서.

제 아들들 그리하시고

제 아내 그리하소서.

 

 특별히 간구할 것은

주님의 은총으로 발견된 질병을 완치시키시사

 아내 건강을 끝까지 지키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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