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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들(딤후 3:1-9 ) 본문

신약 QT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들(딤후 3:1-9 )

주하인 2010. 6. 8. 14:20

 제 3 장 ( Chapter 3, 2 Timothy )

 

노인

우정

 

바람

생기

 

녹색

평안

 

강물

여유

 

한낮

밝음

 

느림

기쁨

.....

.....

 

말세의 그것들과

상관없는 우리가

마땅히

회복해야 하는 것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말세의 고통.

그 고통의 이유.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자기 사랑

돈 사랑

자긍, 자기 긍지 .

교만

부모 거역

감사치못함

거룩하지 못함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정이 없음

원망을 풀지 않음

참소 즉, 모략과 비방 함 

절제 못함

사나움

선한 것을 비웃음

.............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배반 조차 능력으로 인식하고

조급함, 빨리 빨리.

쾌락지상주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비웃음.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종교행사와 종교인은 많아지지만 

경건의 내용을 이해조차 못하는 상태.

( 예를 들어 이런 것.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성경에서 우상 섬기는 자들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의 근본조차

 '종교 대 타협'이란 너무나 그럴 듯한 인본주의를 이유로

 경건한 듯 모여서 같이 행사를 벌이고 예배에 같이 참여하고 같은 소리 내는 자들......

 경건한 듯 보여도 그 안은 해결되지 못하는 지옥의 갈등의 표현일 뿐...

 그래라.  그렇게 해라.   그렇게 해서 말세의 모습들을 아주 잠시 누리라.

 그러다가 주님 오시는 그날에 '너 모른다'는 소리와 함께 이를 갈며 후회해라.......!!)

 

 이게 '종말적 세계현상'이다.

지금 너무나도 그렇다.

'정치인들의 도덕적 해이

 말들의 거칠어짐

 경건에 대한 원리조차 생각지 않함

 사랑이란 것에 대한 비웃음

 오직 감각이 우선함.

 엽기

 성공

  ....................'

눈만 드면 보는 것을 위에다 죽 나열한 것이다.

 


 
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이 모든 것이 '누구의 탓'이던가?

 유인하는 사단의 탓인가?

 그러한 죄는 유혹에 끌려 죄짓는 여인의 것은 아니던가?

유혹당하는 여인으로 상징화된  우리에게는 책임은 없던가?
아니다.

'욕심'이 문제다.

욕심은 죄의 기본이다.

 

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이 세상 .

지식이 고도로 발달하고 누구도 열심히 배운다.

하지만, 그 열심이 한편으로 한 부분은 편하게 하지만

더 많은 다른 피해자를 만든다.

문명의 발달은 사람들로 편하게 했지만

지구의 다른 편 사람들의 식량난과 경제적 인권적 궁핍을 더 많이 가져온다.

과학의 발달은 기후의 변화와 자원난으로 고통을 급속도로 가중시키고

쓰레기, 그것도 중금속 쓰레기로 지구를 파괴시켜간다.

편한 자들은 더 좋아지는가?

비만, 성인병으로 삶의 질은 떨어져 가고 암은 더 많이 생긴다.

 

 진리에 이르는 배움은

욕심을 내려놓고

위의 나열된 종말적 , 말세적 현상을 거꾸로 잡아갈 때만 이루어진다.

그게 그런데

불가능하다.

인간의 힘으로는 가능치 않은 일이다.

영혼에 각인된 죄의 유혹은 사람을 그렇게 돌이킬 수 없게

족쇄를 채워 버렸다.

담배 인이 박혀 중독이 깊었던 나도

내일이면 마음대로 끊을 수 있다고 하며 피워 온 것이

이십년이 넘도록 그랬다.

 하지만, 돌이킴이 가능하기도 하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진리를 받아들일 때만이 그렇다.

 

 화요일 점심은

내 나이 또래의 몇 분과 점심을 같이하는 시간이다.

오늘 이야기는 '느림'에 대하여 진행되었다.

느림.

성공 못할 가능성이 많은 행태.

좋은 차타고 빠른 속도로 질주해야 성공의 확률이 그나마 있음에도

자전거나 타고 풀이나 사진 찍고 하늘 바라보고

세상의 직위에는 더 멀리하고........

그리 달갑지 않은 감성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리 열심히 살면서

돈내고 운동하지만

느리게 사는 나는 자전거 타고 퇴근해서

조금 떨어진 종합운동장 수영장 까지 가는 길이

안양천 변길이고

그 길 가에서 하늘과 꽃과 바람과 여유를 찍어대는 것은

일부러 시간내서 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 많은 운동량 뿐 아니라

여가와 쉼과 재미를 주지 않는가?

그래도 사회성이 부족하여 성공하지 못할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전에 허겁대던 때 보다는 훨씬 많은 영감과 능력이 부어지며

의학적 기술이 증폭되었던 고백은 많이 되풀이 하지 않았던가?

 

 느림.

나쁜 것 치고 조급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담임 목사님의 설교가

오래 전에 있었다.

느리고 여유로운 말세는 생각하기 힘들다.

요새 사람들,

자신들의 이유없는 허겁증을 안다.

그래서 그들도 '올레'길이 어떠니

'슬로우 시티'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진정한 쉼과 창조적 능력은

느림을 회복하는 데서 나오고

그 느림은 영적인 여유에서 나온다.

영적인 여유는 '마르다'의 분주함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다.

가진 것을 손에서 풀어놓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마리아'의 그것의 자세에서 나온다.

그 자세야 말로 경건의 형태를 배우려고 노력하여

이 사람 저사람 만나고 네트워크 형성하고 세미나하고 발제하고

협회조직해서는 될 수가 없다.

그것은 경건의 모양은 띠울 수 있지만

경건의 자세는 결코 이룰 수 없다.

경건은 '성화 '되어가는 자들의 외부적 표현 모습일 뿐이다.

경건은 '영적인 고요'를 이야기 한다.

영적인 고요는 '하나님의 평강'을 아는 자 만이 느낄 수 있다.

그 고요는 사람들이 없는 '광야 빈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삶 속에 자기 일을 하면서도 이루어 질 수 있다.

영적인 고요는 나른한 귀찮음이 아니다.

그 고요는 암탉의 날개 아래 있는 병아리의 평안한 기쁨이다.

그 고요는 주님을 깊이 만날 때만이 알수 있다.

아니, 그러한 당위성을 알고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기쁨이다.

 느림은 과정에서 나오는 삶의 행태일 뿐이다.

느림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알고 선택을 하는 순간

허락되어 나오는 현상이다.

그 느림을 통하여 다시 영혼이 살아날 수 있다.

주님을 크게 느끼는 '영적 빈들'이 딜 수 있다.

 

 

 

적용

 

1. 느린 삶을 기뻐한다.

 모든 것, 걱정되는 미래 , 가까운 장래.......근심 걱정 모두를

주님 손에 내려 놓는다.

 그리고는 내 가진 모든 욕심을 펼쳐 놓는다.

비교도 질타에 대한 두려움도 주님 말씀 앞에서 내려 놓는다.

 

2. 유혹에 대한 흔들림.

 욕심이 선행되어 유혹된다.

 흔들림은 주님의 뜻이 아니시다.

 어두움은 모두 주님의 뜻이 아니시다.

 

3. 성경 세장 읽겠다.

 깊이.....

 

 

기도

 

 주님.

아무리 보아도

현세대의 움직임,

그 안에서 바삐 움직이는 원리들은

적응하기도

따라가기도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전엔

그러한 내 가 너무도 부족한 거 같아 흔들리기도 해 왔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너무 쫓음은

말세의 현상을 잡으려는 어리석은 것임도 알았습니다.

세상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 살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살수 있기를 원합니다.

죽도록 주님 말씀을 붙들 수 있길 소원합니다.

주님 말씀으로 인하여 영적 빈들에서 느끼는

그 고요를 느끼며 살길 원합니다.

저 혼자라면 괜찮습니다.

제 딸린 식구들의 문제,

환우들의 문제는 때론 제 가슴을 무겁게 부딪히며 누르고 옵니다.

주님

나이가 들어갈 수록 더욱 더 부딪치는 분량이 늘어납니다.

주여 그럴 때

지혜를 주시어

제가 감당할 부분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잘 구 분하게 하시어

그 가운데서 중심 잡힌 회복을 허락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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