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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과실 내적과실 진실과실 ( 요 15:1-8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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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과실 내적과실 진실과실 ( 요 15:1-8 )

주하인 2009. 3. 27. 09:08

제 15 장 ( Chapter 15, John )

 

 

어느 정도 성장하고 있을까?

아직 아기 수준일까?

아기가 귀엽다.

그 순수함을 잃지 않은

큰 과실로서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길 원한다.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과실'이 여섯 번이나 나온다.

과실이 무엇인가?

열매, fruit이다.

열매란 무엇인가?

결과물, 소출물이다.

 무슨 결과물인가?

주님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며

예수님 십자가 지고 따르라 하시지 않던가?

주님은 주님을 본 받길 원하시는 것이시다.

결과물이란 주님 십자가의 사랑에 반응하는 댓가다.

 주님이 그토록 큰 사랑을 주셨으니

나도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바라시는 것이시다.

 

 그렇다면, 과실은 어떤 형태이어야 하는가?

수박이어야 하는 가 ?

포도 나무 예를 들으셨으니 포도여야 하는가?

사과의 붉은 열매여야 하는가?

무화과인가?

.........

다양한 소출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사람에 따라서...

 

 그렇다면, 과실이란 어떤 종류여야 하는가?

 우선 '외적 과실'인가 '내적 과실'인가로 크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외적 과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크게 성공한 목회,

전도의 수를 엄청나게

선교하고

멋진 찬양집회에서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고

교회에서 봉사나 구제를 많이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겉으로 드러난 행위적 결과물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겉으로 부드럽고 인내를 더 잘하고 기도 더 많이 하고...

이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외적 과실'이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적과실'의 결과물일 수도 있기에

좀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내적과실'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

 내면 안의 분노와 상처가 치유되고

좀더 온유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긍휼의 모습을 보이고....... 주님의 보이시던 성격적 특질을 향해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할 것이 몇가지 있다.

 

 외적으로 치우치는 사람들과

기독교를 믿지 않아도 외적인 결과를 이루는 자들과는 어찌 구분할 수 가 있겠나?

외적으로 많은 결과를 이룬 사람들의 성격이 오히려 더 거친 경우는

어찌 이해할 수 있는가?

주님이 과연 그런 결과를 인정하실까?

 내적과실에 대하여서는?

심리적 통찰을 통하여서도 성격적 변화가 가능하다.

행동의 우선을 통하여서도 내부의 변화가 가능하다.

심리학적으로 행동심리학이 있다.

실제로 '착한 일' 을 의지적으로 시작하면 마음이 착해지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겨우 성격적 변화를 유발하기 위함인가?

성화라는 것이 심리학적 치료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바리새인 들이나 인도의 고행자들도 행위를 통해 어느정도는 자기 통제가 가능한데

그것보다 우수한 '기독교'의 장점은 어디인가?
 외적 과실을 추구하는 분들은 과연 내적과실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인가?

 내적과실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만 하고 '금식'만 할까?

행위와 내적 성화는 어떻게 양립시킬 수있는가?

 선교지에 나가서 당황하는 선교사님들의 이야기도 많지만

성화를 향해 급속도로 나가는 분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외적과 내적을 과연 분리할 수 있는가?

 

 

 난,

수도적 성향의 교회에서 첫 신앙생활을 하며

늘 갈등하는 바가 저러한 것들이었다.

다는 아니지만 세상의 교회의 추세는 주로 '외적 과실'을 추구하는 쪽이고

우리 교회는 '내적성화'를 추구 하면서

딱딱해져 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무엇을 추구할까?

물론 외적 추구도 내적 성화는 따라온다.

하지만 왜곡의 위험성도 많다.

내적 성화 위주는 딱딱한 자신 만의 성을 쌓을 위험성이 많고

세상에 영향을 끼치길 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합당치 않은 듯하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해법이 있다.

'더 과실을 많이 맺기 위하여 깨끗케'

내적인 과실을 맺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것이 우선이 되어야 함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과실'이라 표현된 '외적 과실'은 현상으로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더 많은 과실'을 맺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찌 이해가 되는가?

짧은 말씀 묵상과

그를 통한 하나님의 내 삶에 역사하시는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주님의 말씀을 통한 내적인 정화를 위한  선택'이 있으면

외적인 현상이 따라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 더 나오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우리의 주님 앞에서의 '의지'도 배제하지 못하는 것이긴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실의 과실' , 즉 '통합의 과실'을 얻기 위해서

깨끗해지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어찌 내적으로 집중을 해야 하는가?

아까도 언급한 바처럼

심리적 방법이나 고행이나 면벽과는 어찌 달라야 하는가?

아니, 어떤 게 진실인가가 문제다.

 

 답이 나와 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마치, 포도 송이가 포도 나무 가지에 매달리듯 매달려야 한다.

 

그것은 무슨의미인가?
 연결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포도 나무의 수액이 포도 전신을 흘러야 하는 것이다.

포도 나무와 가지와 열매는 다른 부위이자 하나이다.

  예수님이 성찬 때 포도주와 빵으로

당신의 피와 살이란 이야기는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고

빵을 먹음으로 난 그 분의 몸에 살로서 달라 붙게 되어

그 분의 성령이 내 영의 혈관을 타고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즉,

내가 그의 안에 거하고 그 분이 내 안에 거하는

그 분의 임재 안에 거하게 될 때

온전한 통합의 , 진실의 과실을 맺을 자격이 생기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외적이니, 내적이니 고민할 이유가 없어지고

세상의 다른 방법들과는 차별화된

진실의 영적 원리의 과실이 맺혀지게 되는 것이다.

 

 

 너무 머리속의 논리의 장난 같은가?

난, 지난 수년간 너무도 확연한 체험을 하고 있다.

말씀 묵상을 통해

주님을 내 영혼의 원리로 선택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부터

그 분은 내 영혼에 놀라울 정도의 말씀의 증거를 보이기 시작하셨다.

 

우선,

평안을 넘어서는 평강의 전율을 자주 맛보게 하신다.

심령천국이 이해가 되고

말씀의 곳곳이 개인적으로 확실히 체험하게 해 주신다.

 현실의 내 모습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상처라는 이름의 어둠은 옅어 지고 있고

가정에서 아들 아내와의 관계가 많이 회복되어 있고

전혀 배우지 않은 사진이 감성있게 찍히게 되고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키타가 찬양리더의 수준까지는 올라가게 되었으며

블로그는 수년간 거의 매일 빼놓지 않고 쓰게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내 진료 수준의 상승이다.

한마디로 '진료 패러다임의 완전한 업그레이드'가 나에게 일어났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고전적 인 방법에서 '최소침습적' 개념의 수술로

날 완전히 바꾸셨다.

간증거리다.

.........

 

나의 변화를 통해

주님은 무엇을 보길 원하시는가?

 예수님 영접하고

오직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 말씀으로 인하여

부정적이고 사납기 그지없던 이 영혼의 정결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그 분은 외적인 환경조차 바꾸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과실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

나에게 길을 보이신 것이다.

 

온전한 성화의 길.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길.

먼저 그 나라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길.

.....

 

물론 갈 길은 멀다.

난 과실을 맺기에는 아직 멀었다.

주님 앞에 창피하고 죄스러운 일 뿐이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짐만 될 뿐이다.

 

하지만,

난 내 인생의 길의 끝을 보고 있다.

과실이다.

내가 맺을 과실을 목표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내 인생은 앞으로는 힘이 더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하루가 두렵고 근심이고 짜증보다는

비전 있고 힘이있고 보람차고 기쁜 시간이 더욱 많다.

 외적 과실,

그 결과물을 더욱 이루기 위해

시간이 필요할 것을 난 느끼고 있다.

서두르지 않으리라.

그 마져도 주님 안에서 주님 인도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지금 바라기는

55세 즈음에 '돕는 선교사'와 '단기 선교'를 하고 싶기는 하다.

내 달란트가 도움이 된다면

내 영혼을 불태우는 찬양을 지금이라도 하고 싶다.

 

주님

감사합니다.

과실에 대하여 묵상하며

많은 생각들을 주셨습니다.

어찌보면 자신의 결과에 대하여 지나친 만족을 보이지 않는가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늘 말씀을 통하여 나를 비추어 보는 과정에서 드러난

잠시의 결점이라 생각하고

주님이 원하시면 절 바꾸시길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온전한 과실을 맺고

선후가 바뀌지 않고

주님이 임재하시는 가운데

주님의 말씀따라 하루하루 날 바꾸어 가다 보면

어느새 외적 과실 마져 풍성한

온전한 인격의 영혼의 과실

성화의 과실 마져 이루어져 있을 것이란

약간의 수동적인 편안함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주님은 자유이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힘을 허락하시고 계기를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 다시오실 때까지

힘을 내어 나아가길 원합니다.

당신의 생명,

당신의 성령으로 날 태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대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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