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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다 (요16:25-33 ) 본문

신약 QT

내가 그렇다 (요16:25-33 )

주하인 2009. 4. 1. 10:43

 

 

내가 그렇다.

 

목련이 그러하듯

주님 하늘을 향해

만개한 내 꽃을

언제까지나

피워 올릴 수 있길

그토록 간절히 바랐으나

바람이 불어오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스러져 가는

이들

허무한 꽃 봉우리처럼

나도

그럴까 두렵다.

 

 

내가 그렇다.

믿음이 그렇다.

이처럼

오늘은 풍성한 듯하지만

내일은 또

어찌 될지

난 모른다.

 

하지만

주님이

그러하심에도

평강 중에 거하라 하시니

면목이 없구나.

 

내가 그렇다.

주님 앞에

늘 면목이 없는 자다.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제 곳으로 도망할 제자들.

주님을 혼자 둘 제자들.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고

주님을 더 열심히 섬길 듯 하지만

바로 얼마 안 있으면 그들은 그렇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어 버림을 난 잘 알고 있다.

 

 각각 흩어져 버리고 나면

그들의 심성 안에는 무엇이 남을 까?

무슨 생각하게 될까?

 

 그토록 전력을 투구하여 주님을 따라다니다가

주님을 버리고 나서 그들은 반드시 혼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 혼란은 이런 것일 것이다.

 

 허전함.

인생을 걸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나선 분이 없어짐.

 

 죄책감

그 분을 배반했다는 당혹감은 상당하리라 예측이 됨

 

 예수님에 대한 걱정

위에 주님이 언급하신 것이 있지 않은가?

'혼자 계신 것이 아니다'

주님의 세심하신 배려는 그것이 겨우 인생의 먹고 사는 문제나

삶과 괴리 되어 있는 허무한 '천국'타령 만은 아니심을 쉽게 알 수 있지 않은가?

너무도 당연하지만..

 자신을 배반할 제자들을 아시고 미리 귀뜸하심으로

그들의 죄채감을 어느 정도 사하시고

예수님 자신에 대한 염려를 낮추시려는 말씀...

모든 면에서 주님은 이토록 섬세하고 자상하신 분이시다.

더더구나 그 분은 인간으로서  모든 심적인 고난을 다 안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그 분은 이러하신 말씀을 하시는 것이시다.

 

 

 제자들.

이 어리석은 인간 군상들의 대표들은

과연 주님을 배반하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각 자기의 처소로 간 후

이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만 그들 심령 속을 파고드는 괴로움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그들이 디베랴 바닷가로 다시 돌아가서

허탈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쉽게 알 수 있다.

 

 이 심정적 괴로움.

 주님을 깊이 만나고서도 남아 있는  자신들의 이 추악한 모습을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주님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는

주님 예수님의 그 놀라운 카리스마와

그 다정한 언어와 가르침으로 얼마든지 깨우침 받고

다시 회복될 여유가 많았으나

문제는 더 이상의 도움이 없으실 것이란 것이 어렵다.

 

그러나,

그런가?

정말 그런가?

 

 디베랴 바닷가의 어부로 돌아갔을 때까지는 그랬을 지 모르지만

그 후에는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 누가 복음의 마지막에서 보듯이

우리가 알듯이 회복하였다.

더욱 놀랍게..

그 것을 오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33절에서 이리 나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무엇을 이르시는가?

그들의 그 허탈함이 있을 것이다. ..라는 것.

그러나, 그러함에도 그들은 '평안'을 누릴 것이라는 것

그들의 잘못이

그들이 잘못한 탓의 환란이기 보다 세상에서 당하는 환란으로 말씀하시며

죄책감을 사해주시고

그것을 넘어서 오히려 '담대하라'고 하지 않으시는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위안하지 않으시던가?

세상을 이긴 것인가?
나를 이긴 것인가?

나의 죄책감을 이기어 낸 것인가?

그런 구분 자체가 사랑의 주님에게서는 의미가 없다.

그냥 나를 이기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배반'은 그 분에게 의미가 없으시다.

당연히도 그러할 수 있는 일과성의 잘못된 판단이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님은 믿고 사랑을 주신다는 이야기다.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

너희는 세상을 이기었다.

 

 

소망이 분명하다.

 

 

 말도 하기 싫다.

묵상은 더더구나 마찬가지다.

열심히 

주님 앞에 열심히 살아오려다가

또 주저 앉았다.

혐오스러운 나머지 스스로 에게 말도 하기 싫다.

'주님

 이 밤이 지나면 눈을 뜨지 않게 하소서.'

이리 외치고 잠이 들었다.

그럼에도 눈이 떠진다.

왜 이리 어깨는 아프고 몸은 피곤한가?

자신도 없고

그렇다.

 

그럼에도 억지로 성경은 들었다.

며칠 간 나하곤 아무 상관 없는 말씀을 하신다.

그래도 들었다.

속에서 뒤틀려 올라오는 어떤 생각들은

그냥 그대로 두었다.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판단도 저항도 하지 않는다.

묵직한 걸림이 날 가로막는다.

 

 ' 그래

 그리 해라.

 ..........'

혼자 되뇌인다.

 

 힘을 내어 묵상 구절을 카피하고

며칠전 찍어 놓은 사진을 들추어 블로그에 억지로 넣었다.

오랜 경험에서 결국은 내가할 일은 묵상을 놓지 않음임을 안다.

 동료들과 점심 먹으러 나가던 길에 소담이 피어 난 목련이 보인다.

그 때찍어둔 사진을  삽입했다.

 늘 그렇지만, 한번도 구절을 생각한 일이 없지만

사진 밑의 멘트는

오늘 묵상과 맥이 이어지는 듯하다.

 

 '내가 그렇다. '

 

어쩌면 내 영적인 상황이

이 탐스럽지만 금방 지고야 마는 목련의 그것과 도 닮아 있는가?

그래도 목련은 봄이면 어김없이 피고야 만다.

날씨가 이리도 쌀쌀함에도

그들 목련의 꽃은 그렇게 소담스럽다.

그리고는 진다.

 

 

 이기다가 지고

지다가 이기고

또 이기다가 지고

..........

그러면서 조금씩 커져만 가는 목련 나무처럼

세월이 흐르면

내 영적 크기도 커지려나?

 

주님이 그러신다.

세상의 환란이라구..

조금은 가벼워 진다.

내 잘못이지만 세상의 환란이라 하신다.

주님 안에서 평안하라 신다.

세상을 이기었다고 하신다.

 

내가 그렇다.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적용

 

1. 성경 일곱장 읽겠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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