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생명입니다(요14:1-14) 본문
제 14 장 ( Chapter 14, John )
도처에
생명이
그득합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믿으면 근심하지 않아도 될 예수님.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NIV: the way to the place where I am going 내가 가려는 곳으로 향하는 길)을
너희가 알리라
길을 가시는 예수님.
천국을 가시는 길을 아시는 주님.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의심많은 도마.
그래도 궁금함을 솔직히 묻는 도마.
길을 두고도 길을 모르는 도마.
이제 곧 알게 될 도마.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천국 행 길을 가시는 예수님이시고
그 길을 아시기는 예수님 이시지만
길 자체이신 예수님.( 복잡하지만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느껴지는 역설의 하나님)
진리이신 예수님
확실하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보고도 보여달라는 빌립
눈이 막힌 것인가?
의심의 영이 막고 있는 것이다.
그들 뿐인가?
모두다.
보되 보지 못하고
듣되 이해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
난 아닌가?
길이신 주님
진리이신 주님은 믿어진다.
길이시며 길을 아시며 길을 가시는 현상이 이해가 된다.
그것은 주님이 내 안에 점점 더 깊이 자리 잡으시면서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냥 이해가 된다.
그냥 이해가 될 때 내 속의 증상은
놀랍게도 희망으로 차는 듯
마음이 촉촉하게 기뻐지고
가슴이 어딘지 모를 기대감으로 콩콩 거리는 듯하다.
진리이신 하나님.
그것도 확실히 믿어진다.
말씀이 내 일생의 그대로 임을 체험하고
점차 흐르는 세상의 모든 원리가
성경에 다 나왔음을 읽어보고 느껴지기에 그렇다.
말씀이기에 그렇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아버지가 그 분 안에 계신 예수님.
그 분이 아버지 안에 계실 수 있는 예수님.
이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가 되는
그 이해가 되는 사실이 가슴으로 믿어진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위의 여러 모습의 예수님 중에
'생명'의 예수님에서는 아직도 걸린다.
개나리가
주님 계신 그 하늘을
온통
생명으로 채웁니다.
아침에 묵상 중에 '생명의 예수님'에 도달하면서
걸리는 부분이 있다.
두려워 하는 부분.
분노.
근심.
도마와 같이 빌립과 같이 믿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내적 부분들.
...............
분명코 '생명' 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
안다.
주님 안에서 성령으로 완전 합일이 되기 전에
온전한 생명의 삶은 아니란 것.
아직은 생명의 빛이 우리의 영혼에 들어와
그 생명으로 발아가 되어 새싹을 피우고 있을 뿐이란 것.
그러기에 생명의 삶을 누려가면서도 아직은 고민의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아직 생명과 반하는 저러한 어둠의 부분들- 아유. ^^;;;...............- 이
내 뜻보다 훨씬 크게 날 가로 막고 있다고 느낄 때
생명의 예수님이란 오늘의 말씀이
나에게는 아직은 해당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솔직히 이전에는 생명이란 단어는 머리속의 이해 차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만도 대단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주님은 생명을 머리가 영혼으로 느끼길 원하신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에 대하여
이제 내게 이해되는 것은 이렇다.
위에 말하는 그 어두움의 생각들은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사람의 아들로서 살아오고
사람의 친구와 사람의 이웃으로 살아오면서
우리의 영혼 속에 가지게 된 확고 부동한 어떠한 가치 - 핵심가치-로
생각의 틀이 형성되어 버린다.
그 생각의 틀 들은 살아가면서 어떠한 일을 하려 할 때마다
영혼 속에서 자꾸만 제동을 걸게 되고
그 제동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 특질이 나오게 되고
그것에 따라 상황 상황 스스로 판단하고 분석하며
스트레스를 받기도 오버를 하기도 만족하기도 한다.
그 사람의 특질에 따라 여러 다양한 성격으로 나오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긍정적이라 생각해도
원죄가 있는 자들이다.
그 안의 생각의 대부분이 긍정적여도
어두우 부분은 반드시 있다.
이 어두움은 절대로 혼자 떼어낼 수 없다.
어두움은 끝까지 남아 인간을 좌절과 어두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우울에 빠지게 하고
늙어갈 수록 잦아드는 무기력과 분노와 허탈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한다.
천일을 면벽하고
만일을 고행해도 떨구어 낼 수 없다.
난,
살면서 참 힘이 들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언가 허전했다.
늘 초조하고 불안했다.
혼날 것 만 같고..
동일한 연령 들의 말과 태도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들이 부딪치고 다투는 문제들 - 특별히 우리 386 세대의 민주화 투쟁도 큰 의미가 없게 느껴졌고
공부해서 의사되고 성공하는 문제도 그랬다............- 도 나에겐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화가 많았다.
세월은 지나고
연애란 것도 하다가 실연의 아픔으로 잠못자고 먹지 못하는 - 이 먹보가....-날을 경험하기도 하고
결혼이란 것도 하게 되어 자식들도 태어나게 되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뜻대로 되지 않고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 지고
현실은 조여 들면서 의료 사고도 나고
내 영혼 속에 원치 않는 나쁜 경험들이 이루어 놓은 생각 들이
점점 더 날 괴롭히기 시작하면서
혈압을 올리게 하고 잠을 못자게 하고...........
사는 게 지옥 이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영접했다.
날아갈 듯했다.
마치 뽕 맞은 듯했다.
부작용 전혀 없는...
그러고 나서 수개월 후 그 첫사랑의 기쁨이 사라지고
되풀이 되는 세상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들과의 싸움은
또다시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말씀 묵상이 시작이 되어가서야
난 깨닫기 시작했다.
주님의 말씀, 주님을 선택한 순간은
내 전 영혼은 놀랍도록 생기가 충만해지고
내가 원치 않는 그 어떠한 인도가 날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그러다가 옛 구습의 흔적에 손발 풀어 날 맡길 때는
여지없이 좋지 않은 감정들로 괴로워 하기도 했다.
그랬다.
날 주위로 생명의 원리와 죽음의 원리가 가까이 있다.
그 중 어떤 원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시간의 내 성품이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만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천사'와 '악마'의 유혹과 비슷하다.
만화는 어떠한 면에서는 너무 단순화 시켜 유치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누구도 알고는 있지만 표현하지 못하거나
내놓고 말하기 힘들어 하는 어떤 것을 이유로 해서
표현하지 못하던 것을 단순하고 극명하게 표현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화에 빠지기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각설하고
내가 의지적으로 말씀을 선택하여
주님이 내 영혼을 차지하시게 되는 시간은
'심령천국'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이 될 정도로
내 영혼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고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지며
공기는 더 맑고
하늘은 더 높고
꽃이 주는 색감은 더욱 진하고 뚜렷이 보이며
가슴은 놀라운 평화와
이해할 수 없는 잔잔한 기쁨이 폭이 넓어 져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면에서
주님은 생명이라는 표현이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이 생명의 하나님이 머리 속 개념이외의 것이 아니었던 것은
그 너무도 당연한 생명을 받아들이기를 겁내는
반대 세력 -사단, 세상의세력 -의 장란이 아닌가?
이제
주님은 생명임을 느낀다.
나를 그토록 오랫동안 괴롭히는 내 터부는
이제 이 생명의 하나님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난 삶이 더욱 자유로와 질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것이 당연하다.
베드로 전서 1:3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하셨다.
생명의 능력으로 날 신기하게도 바꾸실 것이다.
예수님을 그냥 앎으로 그리 될 것이다.
내 인생.
어쩌면 많이 살아온 생이다.
내 인생 모든 원리가 성경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져 감을
요즈음의 난 느끼고 있다.
인정한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계시고 진리다.
틀림없다.
주님 만이 진리고 길이고 생명이다.
그러기에
난,
지금도 가끔은 날 어렵게 하는 이 생명에 속하지 않는 현상들을
주님 앞에 더욱 내려 놓으려 한다.
그래서 더욱 가슴 뛰며 기다리려 한다.
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주님이 그러시지 않는가?
무엇이든지...
내게 ..
내 이름으로 ..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할렐루야.
주님.
난
생명안에서 거하길 원합니다.
아침에 오니
생명으로 터져 가기 시작하는
동토의 시간들이 느껴집니다.
길거리의 목련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개나리는 어찌 그리 아름답게 하늘을 수놓고 있는 지요.
며칠 전 부터 피기 시작하는 벗꽃은
이제 조그만 한그루의 나무를 온통 꽃으로 채우고
날 반기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기의 하루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하늘의 구름은 어찌 그리 부드럽고
하늘 색은 어찌 그리 맑은 지요.
코끝에 들어오는 바람은 매연과 상관없는
향기로운 그 무엇인가를 담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이제 생명의 잔치를 시작하려 합니다.
제 영혼도 그렇습니다.
아직도 어두운 부분이 있지만
주님의 생명이 날 그득 채우려 하시고 계심을 느낍니다.
이전까지 덜 그랬던 모든 것들이
말씀 앞에서 터져나가고 있습니다.
곧
주님이 원하시는 그 신비한 생명의 능력으로
날 꽉 채우리라 압니다.
그때쯤,
전 주님 앞에 온전히 절 바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생명의 주여.
당신을 사랑하여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격하면서 기도합니다.
아멘
적용
1. 어두움의 감정과 그 속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들추어 보리라.
부끄러움은 왜일까?
화 남은 무슨 생각으로 그럴까?
왜 난 이리 힘들어 할까?
....
그리고 주님의 생명에 맞지 않음을 확실히 인식하리라.
2. 주님은 생명이다.
생명은 아름답고 경이롭다.
아무리 이쁘게 만든 조화도 풀의 꽃과 비교하여도 아름답질 않다.
이유는 풀의 꽃은 주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아름답다.
3. 생명을 귀히 여기리라.
아..
낙태를 안하도록 이끌어 내신 주님의 손길이 얼마나 놀라우신가?
우리 병원은 기독교 병원이다.
더욱 환우 분들에게 충실하리라.
한분 전도의말씀을 전했다.
주님은 생명이시다.
생명의 말씀을 전한다.
난 그들에게 길을 알려 주는 것이다.
4. 어두운 감정들이 올라올 때마다 생명의 주님을 묵상하리라.
화 안내는 것이 아니다.
화낼 상황에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주님이 내 대신 막아 주시고 생명의 산소를 공급하시는 것이다.
주여. 내 대신 싸우시고 내 대신 막으소서.
주여 방패와 손 방패로 막으소서.
5. 놀라운 주님의 기쁨을 알리자.
블로그를 더 열심히 주님의 환희로 채우리라.
찬양을 더 뜨겁게 하고
사진을 더 풍요롭고 영감있게 찍으리라.
트럼펫을 더 열심히 배워서 주님을 깊이 노래하리라.
주님 도우소서.
6. 근심이여 사라지라.
주님을 믿나이다.
도마처럼, 빌립처럼 되지 않아도 결국은 믿으리라.
생명 앞에 스러져 가는 어두움이여.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놀라운 평안( 요14:25-31 ) (0) | 2009.03.26 |
---|---|
주님의 사랑에 취하여 (요14:15-24 ) (0) | 2009.03.25 |
주님 앞의 작은 자 (요13:31-38 ) (0) | 2009.03.23 |
선택과 유다와 강호순(요 13:21-30) (0) | 2009.03.22 |
아들아 널 끝까지 사랑하리(요13:1-20 ) (0) | 2009.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