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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당당함[대하35:1-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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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당당함[대하35:1-19]

주하인 2013. 8. 29. 10:16

 

 


2. 왕이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직분을 맡기고 격려하여 여호와의 전에서 직무를 수행하게 하고

 겨우 스무살 넘은 왕이 이리 옳은 일을 한다.

제사장들은.....유다백성은.....훨씬 연륜과 나이가 많았지만

저 어린 왕이 '직무를 수행하게 하고... ' 라는 표현처럼

 

3. 또 여호와 앞에 구별되어서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에게 이르되 거룩한 궤를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전 가운데 두고 다시는 너희 어깨에 메지 말고 마땅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이 백성 이스라엘을 섬길 것이라

자연스러운 , 올바른 리딩을 하는 게 보인다.

아니다.

그를 넘어서는 '세세한 지시'다.

나이와 경륜을 넘어서,

즉 상식적 차원을 넘어서는 당당함.

 

 무엇이 그 어린 그에게

그런 옳은 당당함을 허락했을까?

 

 

 

6.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너희 형제들을 위하여 준비하되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전하신 말씀을 따라 행할지니라

 당연히도 '말씀'이다.

어제 묵상을 보면 요시아 왕은 성전 안에서 발견된 '말씀'을 보자마자

'옷을 찢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감동'을 표현한다.

그의 말씀 앞에 서는 자로서의 격한 감동.

그것은 '인격적 하나님'을 만난 후 내외적 연단을 겪어가면서도

무엇인가 모를 안타까움에 안절부절 못하던 그에게

하나님이 하나하나 말씀으로 지도해주시는

'대화의 하나님' 이 그에게 찾아오셨음을 그의 영혼이 직감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

 겨우 피상적으로 , 요식적으로 , 당연히도 해왔던 신앙 의식 속의 하나님 만을 아는 자들에게는

어쩌면 이상한 일로 비칠 수 있겠다.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모른다.

그들은 '감동'의 하나님, 인격적 하나님,

그 하나님이 말씀으로 주신 그 말씀이

마치 '살아계신 아버지라는 표현을 이해 불가하다.

 요시아 왕은 늘 곁에 계심을 알지만 ' 어찌 표현할 길이 없다가

드디어는 그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내시고

이러하여라 저러하여라 하나하나 말을 거시고 가르치시고

위로해주시는 그런 '확연함'으로 하나님을 받게 된 것이다.

드디어..

그러니 그, 요시아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으나

그 지혜롭고 영명한 눈에 '진실'을 꿰뚫어 보아

'하나님을 동행하는 왕'의 행복을 알고 있던 차

하지만 나이와 연륜과 모사와 세상의 원리..... 그가 감당하여 내기는 벅찬 역할 속에서

그는 18년 이상을 서서히 '하나님 안에서 연단과정'을 거쳐

숙성되고 성화의 길을 가면서

드디어는 '뚜렷한 말씀' 지표를 지니게 된 감동을

오늘 외적인 힘, 당당함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행복했을 것인가?

  그에 따라 세상은

그의 말로 '정리'되어가기 시작하였다.

 불법과 불신과 부정과 혼돈, 자기만 옳음..........

마치 지금 세상,

이것도 저것도 다 옳아 아무것도 옳은 것이 없는 이 세상과 너무도 비슷히 닮아 있는

그 세상에

그는 '연단된 영혼'을 가지고 '말씀'으로 당당히 리딩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자연 스럽고 힘이 있어 보이는가?

그렇다.

하나님을 옳게 받아 들이고 동행하려는

감동의 신앙인들은 세상을 바꾼다.

그토록 강한 것 같은 '조류'를 하나님 쪽으로 쉽게 돌린다.

느헤미야가 그랬다.

다니엘은 또 안그랬는가?

사도 바울은?...

 

 

19.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지 열여덟째 해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유월절을 지켰다.

어쩌면 '요식행위' 에 빠지는 것 같은 표현일 수도 있었다 .

아니다.

그는 신앙과 삶이 하나였다 .

정리되지 않은 자유는 결국 방임과 방만으로 빠진다 .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은 '열심'은 '율법'에 빠진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 자기 우상.

요시아의 '유월절을 지킴'은 "드디어....." 지키기 시작되었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 싶다.

감동의 유월절 지킴.

 

예배가 즐겁다.

예배가 감동이다.

예배 시간이 기다려진다. ..

이 말이 이해가 가는 사람들에게는

요시아의 당당함과 말씀을 감동함과 유월절 지킴에 대한 '공감'이 있을 것이다.

그는 ' 하나님의 특별하신 관심' 대상이 맞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 블로그에서 그리도 주장하는

 '선택받은 소수'

 '좁은 문을 가는 자들.'

 부디 모든 사람들이 같은 공감을 누리길 원한다.

 

특별히 오늘 나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옳은 당당함'이다.

사뭇 흔들리던 '삶'을 살아왔다.

따라서 마음이 그리..정결치는 못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비가 많이도 내린다.

'콩레이'올 조짐이던가?

그래서인가 유비무환 (有비無患- 비오면 환자 없다. ^^;;) 이다.

말씀을 묵상할 기회가 아침부터 있었지만

이리저리 인터넷 서핑하고 뉴스를 들추고

한참을 헤멘 다음에야 말씀 앞에 앉았다.

어제는 너무 바쁘고 그 핑계로 잠시 보고 올리지 못했지만 오늘은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은 내 하나님 앞에 정성되지 못한 부분에 대하여

조금은 부담감 주시는 거 같으신 느낌이다.

그러나, 집중하려는 데 방해하는 느낌들이 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현실의 문제들.

사뭇 차분함으로 눌려있던 것들이

또 한번 꼬리를 슬금 거리며 불안으로 다가오려 한다.

 그것.

내 의도와는 아무 상관없이

가슴 한구석을 뻐근하게 느끼게 하고

입주위 근육이 긴장하는 듯하게 하고

알게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게 한다.

 가만히 속을 들여다 보았다.

내 속을 휘젓는 소리들이 있다.

' 그러다가... 너... '

 

그것들도 '말'이다.

언어다.

오래된 나쁜 언어들.

아마도 아버지 , 어머니, 형, 세상 살면서 겪었던 나와 맞지 않던 사람들... 의 소리들.

그것들이 내 영혼에 얽히고 섥혀서

나 나름의 어떤 강한 언어로 '주문'을 걸어 놓은..

'나는 안돼, ... '

그래서 얼마전에 불현듯 깨달은 게 있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이렇게 힘이 없음은

내 믿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어쩌면 '다른 말'을 너무 강하게 믿는 탓이 아니던가?

 

맞다.

난 믿음의 능력은 있다.

어쩌면 강하다.

그 믿음의 대상이 '오래된 잘못된 말' 을 습관적으로 믿었을 뿐.

 

잠시 묵상하면서

단순화 시키기로 했다.

연습해온대로 '난 하나님의 말씀 만을 믿는다' 하고 선택하고

도우시기를 기도했다.

잠시..

성경 보면 ' 부족한 믿음마져 도우소서.' 하고 백부장이 고백한다.

그래서, 주님이 도우시길 믿겠다 고백한다.

그리고는 말씀 구절을 연상했다.

그러니 마음이 평정을 되 찾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우편에 계시고

나에게 말씀 거실 것을 ' 기억하고

큐티를 들여다 보니

훨씬 쉽게 눈에 들어오고

늘 그러시듯 주시고싶어하시는 말씀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렇다.

난. . 과거의 말을 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로 선택한 것이다 .

다행히도 난 하나님의 말씀의 살아계심을 아는자다.

말씀은 하나님이심을 감동으로 아멘하는 자다.

 

오늘 요시아 왕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고

세상의 일도 추진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나.

아직 걱정하고 불안할 일이 있으나

그냥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말씀에서 '말씀'으로 인도받는 자의 당당함,

그 옳은 당당함을 말씀하시니

그리하리라.

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리리라.

 

주님.

오늘 말씀도 힘이 들고

특히 마음이 괜히 뒤숭숭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정결화 됨을 경험햇습니다.

그게... 요시아왕의 그 모습과 어찌 그리 일치하는지요?

역대하,

이전에 묵상이 잘안되던 부분 중의 한부분인데

꽤 흥미있게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흥미있음은 나의 일상과 절묘히도 들어맞는 것을 보아 그러합니다.

주님.

매일매일 매사를 다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시지만

나의 이 미력한 지혜는

그 사실을 자주 잊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이렇게 내가 살아있구나 주하인아.. 하시듯

하루하루 인도하심이 그렇습니다 .

오늘은 옳은 당당함과 세상의 삶의 힘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주여.

제 속에서 오래된 말들이

또 안될 것 같은, 나랑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음을 얘기해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만을 믿게 하소서.

그래서 잘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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