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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를 마치고[대하34:1-13]

주하인 2013. 8. 27. 10:16

 


 

3. 아직도 어렸을 때 곧 왕위에 있은 지 팔 년에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제십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하여 그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 상들을 제거하여 버리매

 요시아 왕.

6살 부터 왕이 되어서 14살 째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만났다

그리고는 18세가 되어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고

산당들을 제거하기 시작할 때까지는

'아직도 어렸다"

 

그 어릴 때 그는 최선을 다해서

그가 만난 '다윗의 하나님',

그 ,' 요시아의 하나님' 을 위하여

정결화 작업을 철저히 시작했다.

그 작업을 그는 '개인적 하나님'을 만난 후 시작하여

 

 

8. 요시아가 왕위에 있은 지 열여덟째 해에 그 땅과 성전을 정결하게 하기를 마치고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려 하여 아살랴의 아들 사반과 시장 마아세야와 서기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를 보낸지라

' 마침내 '

24살이 되는 '열여덟' 해 째가 되어 정결하게 하기를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는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렇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그는

철저히 '내적 문제'에 집중하여

영적 산당, 누구는 '죄'라 생각하기도 힘든 부분까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조명 illumination'을 한 것이다.

'죄 ' 와 '속죄'에 대하여서다.

 '그 땅과 성전을 정결하게 하기를 마치고' 라 한다.

그것 . . 내적 정결화를 마쳤다는 이야기라기 보다는

내적 정결화에 대한 기본을 마쳤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마치고는 '성전'을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

성전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우리 영혼의 하나님 거하는 장소다.

그 깊은 '내적 ' 연단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결국, 시기적이고 시간적인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 이쁜 '요시아' 왕도

'하나님을 인격적', '개인적 하나님'으로  영접하기 시작하며

오랜 시간을 거쳐 영적 훈련을 거치며

'죄'가 어떤 것인지

어떤 부분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일상에서

(그렇다 .. 일상에서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부분에 대하여 깨달아 아는 것이

 진정 중요하다.

 그것, 율법의 역할 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율법의 기간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죄'가 무엇이고 '죄'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

그 기준을 배우게 된다.

그 어린 , 올바로 자라야 할 시간이 지나고 나서

마침내 '깊은 영적 '부분에 접하게 된다.

 

죄는 그리 간단하고 얕은 것이 아니다.

사단이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때로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두렵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 광명의 천사' 처럼 황홀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아주 뛰어난 분들도 때로는 '신사도 주의'의 위험성에 빠져 넘어지기도 하고

굉장한 , 전세계 최고의 인원에게 영향을 미쳤던 영적 지도자도

왜곡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마치고' 마침내 '영적 성전' 부분에 접근하는

요시아의 모습이 대견히 보이는 것은

그 '죄'의 외적 부분에 대하여 성실히도 훈련 받고

마침내 ' 내적 ' 부분에 깊이 연단을 받아 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의문이 또 들어간다.

그는 과연 수십년을 거쳐 '왜' 그런

머리 복잡하고 생각하기만 하면 가슴 뛰는

'죄' 부분에 그리도 집착을 하는가?

어찌 그리 오랫동안 유지하며 죄와 싸우는 과정을 지낼 수 있던가?

더구나 그는 '왕'이란 至高의 至尊의 자리에 있지 않던가?

다른 무엇이든 그를 유혹하고 쉽게 차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가...

단지 철학적인 사유에 의하면 그리 오래 유지할 수도 없을 것을

어찌 그리할 수 있단 말인가?... 다.

당연하지 않은가?

 

거기에는 ' 다윗의 하나님'을 만났다..는 데 답이 있다.

당연하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평강과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 기쁨은 그냥 감성적인 만족을 넘어서는

놀라운 부분이 있다.

영적인 '진정한 기쁨'이기 때문이다 .

그는 또 '선대'의 영광과 좌절을 보아왔고

그 중심에, '핵심'에

'하나님이 동행하셨던 가'가 있음을 확연히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럴 수 있었다.

 

이제 오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본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

거기에는 '외적' 부분과 '내적' 부분이 있다.

 

 외적인 부분..

선교의 성과,

전도의 성과,

예배의 참석 여부

새벽예배를 했느냐, 며칠간 얼마나... 여부.

헌금을 어떻게 했는가?

교제는 .. .. 등이다.

그것.. 아주 중요하다.

그를 통하여 신앙 인격의 틀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 가 아니다.

그 '형태적 신앙'이 완성된 후에는

반드시 ' 내적' 부분이 터치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 부분을 위하여 오셨다.

그 분의 말씀은 이율 배반적으로 들리는 부분이 너무 많다.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예배 드리라시는 분이

형제와 전토를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도 하셨다.

그 깊은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기고

그 분의 부활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느끼고

성령으로 매일 매일 보호 받는,

'다윗의 하나님의 체험' 을 한 후

깊은 동행을 하는 자들에야 가능한 이야기다.

 

 

점심 때 화요모임 팀끼리 식사를 했다 .

오랫만에 병원 근처를  조~금 벗어나

시장 통 안에 있는 '생선구이 집 ^^*'에 걸어가 앉았다.

날은 정말 '화창'하다 .

아침 저녁을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감안하여 아침에 오랫만에 자켓을 걸치고 나왔건만

날이 이처럼 더울 줄이야.

얼른 에어콘 앞에 앉아서 식사를 하며... (참~ 맛갈 스러운 집 ^^*)

좋은 이야기 하면서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P 원장님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도'  '예술' .. 쪽에 일가견이 있으신지라

그쪽에 많이 열려 있는 분이다.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신 분임에도..

"그러면서 '유교'가문의 누구 께서 평생 ' 敬' 한자를 묵상함으로

 '도'의 경지에 이르렀고..

 불교의 누구는 ........에 이르렀다.

 그러기에 자신은 집에서 걸레질을 할 때... 깨닫는 마음으로.." 한다. '

난.. 그분의 그 멋스러움이 좋다.

 

하지만, 난 경계하는 부분이 있다.

나도 공감한다.

예수그리스도의 기독교도 '하나님의 '도'를 추구한다.

도.. 길.. 은 비교적 일치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 보인다.

그래서 아주 아주 아주 많은 기독교 사람들이

' 불교 고승'에게서 '선'을 듣기도

유교 강좌를 듣기도 한다.

 

나.

그것......할 수 도 있고

그 방법론에 대하여는 절대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아야할 것이 있다.

 

인간은 ' 원죄적 '존재이다.

그들은 그것을 알기에 '道'란 이름으로 '禪'이란 이름으로 '몸부림'을 치고 또 친다.

죄가 그들의 비교적 깨어나려는 영혼을 건드리기에 그렇다.

그러기에 오늘 '어린 요시야' 시기에는

'그들의 도'나 하나님의 진리에 의한 도나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외적으로 그들은 몸부림치면 도달할 만큼의

신앙의 외적 모습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원죄'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벗어날 수 있는 부분이다 .

'예수 보혈'만이 기본이고

성령의 매일 도움이 당연히도 있어야 하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부활의 틀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다.

진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그렇다.

성경에 나왔기에 그렇다.

그것을 부인하고 세상을 향해 비슷한 도를 찾아나서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다.

 

 또, 세상의 도를 추구하는 자들과 같이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즉, 불교.. 유교... 진리가 아닌 그럼직한 도의 방편에 따르지 말아야 할 이유 말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에게 '베드로'가 질책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 베드로는 성장한 자다.

그러기에 그에게 '우상의 제물'따위는 아무런 '해'가 될 수는 없으나

'믿음 연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할 위험이다.

 

세상의 방송을 보면

인터넷에서도 보면

수도 없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대 타협을 외치며 가벼히 그들과 한자리에 한다.

그것..

그 자신은 감당할 만하지만

세상의 덜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을 수도없이 지옥의 백성으로 가게 하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장하지 못한 시간은 '율법'에 훈련 받아야 하지만

그곳에 자유로운 자가 되어도

우리 '영혼의 성전'을 자꾸만 말씀으로 들여다 보며

세상에 맞추어야 한다.

타인을 위하여 조심하기도 해야 한다.

 

 

나.

오늘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따라

자칫 흔들릴 뻔 했던 그 멋스런 모태 기독교인, 예술적 의사에게 ^^;;

그분의 개인적 신앙의 깊이에 의하여 흔들리 뻔 했다.

단..난 그 자리에서 단호히 하나님의 성령을 주장했고

그게 잠시 자리를 머쓱하게 해서

그 부분은 회개한다. ^^;;ㅎㅎ

 

그렇지만,

난 하나님 말씀의 살아계심을 아는 자다.

세상 사람들이 '원리주의자' 라 손가락질 하는 그런 굳은 심지를 가지고

'사랑없이 ' 내 주장만 하지는 않는 자 같다.

이제 하나님은 나에게 '영적 성전'을 더욱 정비하라시는 듯하다.

그게 옳다... 라고 도장 찍으신다.

그래서 또 감사하다.

 

주님.

내 귀한 주님.

요시아의 어린 믿음의 시간 만큼

외적으로 정리되었는 것 같지도 않지만

하나님은 이런 나 같은 방법으로도

거꾸로 정리해 들어가시는 분이시기도 함을 믿고

또 그렇게 왔어도

저런 요시아님의 모습 같은 정통적 성장의 방법이 '통상적'이고 옳음도 알고 있습니다.

주여.

이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은

'주하인아 이제 서서히 어릴 때를 마치는 시기아니겠는가.. ' 하고 깨닫게 하시는 듯하나이다.

요새 다가오는 연단의 변화가

동일한 자극이지만 다른 반응으로 제가 느끼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습니다.

주님.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이제 온전히 내 부족한 모습조차

말씀으로 인하여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세상의 어이없는 것들조차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시기에 긍휼하게 여길 수 있는

그런 자로 훈련 시키는 줄 믿습니다.

조금 더 그 말씀대로 의 나로 변화하는 훈련이 되면

주님 .. 원하시는 대로

세상의 어떠한 자리라도 가서

자유스럽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이렇게 나에게 역사하시고

난. ..이렇게 이루었으니

당신들도 그 온전한 하나님...

오직 원죄의 경계를 뚫고 올라설 유일한 기회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의 보혈과 그 분의 십자가의 사랑과

그 분의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의 도장으로 말미암아

'도'를 이루어 갈 것을

세상의 그래도 '죄'를 알고 깨려 노력하는 자들에게

그래서 그것을 멋으로라도

예술이라는이름이로라도 달래려 노력하는

헛된 노력의 그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르칠 수 있는 자 되게 하소서.

그게 ..

제 훈련시키신 '찬양'이 도구가 되어도 좋고

사진이나 시나

말씀앞에선 표현에 임하시는 '성령'의 이끄심이어도 좋습니다.

저를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좀더 깊이 연단을 이루어나가는 제가 되게 하소서.

주님.

큰 도구가 되게 하소서.

아직은 아니지만..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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