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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은혜 (사6:1 - 6:13) 본문

구약 QT

오직 은혜 (사6:1 - 6:13)

주하인 2012. 8. 13. 02:53

(사6:1 - 6:13)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

   하였고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웃시야 왕은 아랫 쪽에 명기한 것 처럼

 '16세 때 등극'해서 전성시대를 갈구하며 52년을 왕위에 있던

'인기 짱'의 왕이 었다.

 그는 말년에 ' 왜곡된' 왕이 었음이 문제다.

 

그 왕이 죽던 해에........라 나온다.

어쩌면 눈에 보이는 인간을 우상시 하고 싶어하던 차

그가 죽으면서 깊은 마음의 애탄이 있을 차,

하나님 성전에서

옷자락이 주님 보좌로 부터.....흘러내려....

성전에 '가득' 찬 환상을 보았다 한다.

이것......

중국 무술 영화의  여주인공 옷이 

길게 너울너울 늘어나는 장면이 연상된다.

물론 그 보다야 훨씬 황홀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

상상할 수 없는 감동으로 온 성전을 가득채우겠지만..

 

무엇이던가?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 실망하고

모든 것이 상실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오히려 '깊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라는 이야기 같다.

' 성전에 하나님의 보좌로 부터

 옷자락이 너울 너울 내려와  가득채우는.. '

옷자락으로 대변되는

성령의 생명력 넘실거리는 은혜의 물결이

내 영혼의 성전에 쏟아져 내려와

하나님의 그 우주를 아우르는 에너지로

영혼이 전율한다면.........

 

 지난 주 수요일.

전인치유 예배.

전인치유는 '병원에 입원하신 환우'들을 모시고

치유예배...드리는 우리 병원 만의 특화된 예배다.

전인적인 치유, 통합적 치유, 통전적인 치유를 목표로

육신, 마음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한 영적 치유까지 도모하는 예배..

난...

늘 그렇듯..그리 쾌활할 상황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혜에 사로잡혀 있었다.

찬양 탓인가?

은혜에 사로잡히면 이해하지 못할 마음의 넓혀짐을 난 느낀다.

들들 들뜨는 기쁨이라기보다는

잔잔하게 , 든든하게 가슴을 채우는 '행복'함이

수십분...수시간 을 지속되는 현상이

점점 자주 나를 채운다.

이 '은혜'가 좋아 난 주님을 사모함을 멈출수 없다 .

 가만히 '찬양'을 따라 하면서 환우 분들을 쳐다 보았다.

 

이들의 아픔...

아픔을 낫기 위해 '주님'을 열렬히 찬송함과 기도함도 필요하다.

하지만, 낫기 위함 만이 목적이라면....... 

안아픈 분들은 '주님'이 필요 없을 지도 모르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당연하지 않던가?

절박한 것 매달림은 당연하지만

절박한 것 해결되고 나서는.......

하나님은 그 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을 요구하시기에

우리에게 '아픔'도 허락하셨고 매달리게도 하셨다... 가 정답이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그렇다면 그 본질은 무엇인가?

당연하지만 '죄'의 해방과

그로 인한 하나님 자녀로서의 천국시민 자격을 회복하는 게

우리에게 허락된 인생의 목적이 되겠지만

그렇다면 '아픔'과 '그 목적'과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그 아픈 분들에게

인생의 목적을 말하는 게 '그들의 심사'에 닿기나 할까?

그것......그리 얘기하는 것은 '심리적 왜곡을 가신 분'들아니던가?

.........

 

은혜다.

은혜의 회복이다.

하나님 보좌로 부터 내려오는

넘실거리는 '성령'의 생명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상황과 상관없는 '진정한 은혜'의 체험을 통하여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신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고통'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던가?

그 은혜를 통해서만 '진정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어쩌면 '고난'은 고난을 받는 분들에게는

그것보다 더한 짐이 없겠지만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동행하심을 진정으로 체험하면

고난은 더이상 의미가 없을 때가 오지 않을까?

 

 오늘 .

묵상의 '웃시야 왕이 죽던 때'는

존경하고 따르던 백성들의 희망이 꺽이는 때.....

고난의 때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보좌로 부터 '넘실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자연스레이 그 고난은 기쁨으로 변하게 된다.

 

나.

어쩌면 고난이 덜 고난스러워

저들만큼 큰 고난을 겪지 못해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만일 내가 저들처럼 '상실'을 예고된 보호자의 입장이나

내가 암 환자일 때도 그리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았다.

그러나......난 은혜 가운데 있었다.

그 은혜의 이유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이외에

그 시간에 외적으로 현실적으로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지속적인 은혜의 감동 가운데 있었다.

감각적 착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 은혜 속에서 난 나의 의문들을 돌아 보려 한다.

자신은 없지만 ,

아프겠지만

이 은혜가 그때는 더 강해지지 않을까 ...

더 주님이 가까이 크게 임하시지 않을까?

아픔 회복 후 세상의 오염을 사모할 생각조차 들지 않을 터이니

오히려 더 깊은 은혜 가운데

천국을 사모하지 않을까?

꼭......고난을 반기지는 않되

고난이 와도 그리 절망일 것만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오늘 묵상에서 다시한번 상기된다.

 


 

6.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

 난..

점차 희망에 쌓여간다.

소망이 소록소록 커짐을 조금씩 느낀다.

이유는.....

예전에는 가능치 않았을 '위의 고백'같은 고백이

나에게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고

내 본성으로 불가능할 일들이

하나님의 영이 임하셔서 도우시기만 하면

내 머리속에 깨달아지는 바 많이 생기고

마음에 부딪쳐 오던 갖은 반발들이 쉽게 물러가고

고치기 어려운 '수십년'의 '악한 행실'들.........

거친 말투.....

급한 표현.....들도 

깨달은 나의 결심과 선택에

하나님이 역사하셔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

' 숯불을 가지고 내 입을 지지'는 두려움이기도 했지만

실은 두려움과 안된다는 부정적인 오래된 편견일 뿐이지

하나님이 하신다면

천사들이 시행한다면

성령이 도우신다면

그냥 다리미로 지지듯 반듯하게 펴질 것이다....라는 것은

난 확실히 안다.

주님이 숯불로 입을 지지시는 것을 앎도

'은혜'다.

 

 

 

적용

 

1.  고난

. 참 많이도 겪었다.

금전도 ..

사고도......

마음고생도.....

비교도....

시간도.......

 

그래도 그 고난이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다.

앞으로의 고난........

없길 미리 기도해야지만,

온 지구적 고난, 민족적 고난.......

주님의 크신 뜻가운데 내 고난이 된다면......

과거의 어쩔 수 없는 반영....

누구나 올 수 있는 확률의 고난(암....)......이라면

그것..........정말 피하고는 싶지만

어쩔수 없다면 받아 들여야 하지 않는가?

 

2. 그래도 감사하다는 말은 '은혜'다.

 위의..웃시야의 아쉬움은

오직 은혜로만 혜쳐갈 수 있다.

그리 되길 기도하자.

은혜 받은 자 만이 고난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은혜는 고난을 감하고

고난은 은혜를 크게한다.

고난은 힘들고 두렵지만 때로는 유익이기도 하다.

그것은 '은혜'를 알고 체험한 자의 고백이다.

내 고백이다.

 

3.  기도하자.

 고난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해지되 어쩔 수 없으면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내적인 버퍼를 키워달라 기도하자.

그러함을 기쁨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

그 깨달음이 '은혜'다.

은혜는 영혼을 크게 확장시킨다.

영혼의 성전이 온통 하나님의 옷자락으로 채운다.

 

내 입술을 성전의 숯불로 지지시길 기도하자.

주님의 모든 것은 힘들것 같지만

크신 은혜를 주시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숯불이 입술에 닫는 두려움만 극복하자.

 

4. 성경 세장 읽겠다.

 

 

 

 

기도

 

주님.

지난 밤에 응급으로 수술 햇습니다.

피곤하려 했습니다.

눈을 뜨고 묵상 구절을 진행하는 것을 생각만 해도 피곤이 몰려오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자

제가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의 맑음으로 절 넘치게 하십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전혀......

생활의 반경이 좁아서

경험이 부족해서

나름의 제약으로

글 거리, 글감은 쓸 것도 없음에도

이처럼 10여년 가까이를 거의 매일 글을 쓰게 하심은

그 자체가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은혜.

주님의 성령의 은혜.

그 생명력으로가 아니시면

어찌 글이 나오겠습니까?

제 인생은 모두 주님의 역사하신

기적의 연속입니다.

전......압니다.

제 아내도 알고

절 아는 자들은 압니다.

제가 이렇게 행동할 것은.......누구도 예측할 수 없던

기적이지요.

주님.

자꾸만 잊어 버리려는 '은혜의 기억'을

오늘도 또 깨우쳐 주심을 감사합니다.

제 영혼의 성전에

하늘 보좌로 부터 하나님의 옷감이 넘실대는 것을

전 체험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더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 식구들 그리하소서.

믿는 모든 자들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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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시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성경 열왕기하 15장 1절에는 아사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 출신 어머니 여골리야와 아버지 아마샤 사이에서 태어나 16살에 재위에 올라 엘랏을 재건해 유다 왕국에 복귀시키고 하나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갓과 야브네, 아스돗의 성벽들을 무너뜨렸다.(역대하 26:6) 그리고 블레셋(팔레스타인) 지역에 아스돗 등 새 성읍들을 세웠다.
 
그리고 블레셋(팔레스타인)과 구르 바알의 아랍인들과도 싸워 승리했다. 또한 암몬인들은 그에게 조공을 바치고 명성은 이집트 국경까지 퍼져 세력이 확장되었다. 또한 예루살렘의 성벽에 탑들을 세우고 튼튼하게 하였고 평원과 평야에 가축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 광야에도 탑들을 세우고 저수 동굴을 많이 팠다.
 
산악 지방과 기름진 땅에는 농부들과 포도밭 일꾼들을 두었다. 그는 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웃시야는 정예 병력을 갖추어 서기관 여이엘과 행정관 마아세야가 사열한 수에 따라 부대가 편성되어 전투 병력은 하난야의 지휘 아래 두었다. 용사 가문의 우두머리는 2600명, 그들의 지휘 아래에 놓은 막강한 병력은 30만 7500명이었고 전군에 작은 방패와 창, 투구, 갑옷, 활, 팔맷돌들을 마련했다. 그리고 신무기까지 개발해 더욱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웃시야는 강해지면서 교만해져 패악을 저지르게 되었다. 하나님을 배신해 제사장만의 권한을 무시하고 분향 제단 위의 향을 피우려 성전에 들어갔고 그때 아사랴 제사장이 용감한 사람 80명과 함께 들어가 웃시야 왕을 막고 경고를 했다. 그러자 웃시야는 나병이 생겨 평생을 앓았고 별궁에 살았으며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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