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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앞에서[왕상22:41-5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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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앞에서[왕상22:41-53]

주하인 2017. 6. 30. 10:19

 


43.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그는 왕으로서 할 일을 열심히 했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가능하면 모든 왕으로서 할 행정을 충실히 행했다.


그것을

주님은 '여호와 앞에서 ' 라는 표현으로

정직히 행한 왕... 이라 이름 붙히였다.

'정직한 왕'이라 하지 않으시고..

'정직히 행한 왕'이라 하신거에 집중이 된다.


그는 일상에서 자기의 일을 열심히 행했는데

주께서는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했다고 하셧다.

그리고는 '정직'과



51.유다의 여호사밧 왕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52.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악'을 행함으로 구분하셧다.


아하시야도 자신의 왕으로서의 일을 열심히 행했다.

그런데 그게 '여호와 앞에서' 행한 일이라 신다.

성전을 무너뜨리고 대놓고 '나와... 한번.. ' 하면서 주님께 대든 것도 아닌..

그의 왕으로서의 행동을 했을 뿐인데

'여호와 앞에서 '행한 일이 되었다.

'악한 행동'을 여호와 앞에서...


 생각할 부분들이 있다.

일단. .. '여호와 앞에서'라는 이름이 붙을 자격이 있는가다.

'불신자', '주님'을 아예 모르는 자들에게는 그런 이름을 붙히지 않는다.

그들은 '버린 자' 들이다.

죄송하지만..

그들과 어울려 살지만 무시 보다는 불쌍히 여겨야 될 부분들이기도 하다.  "

 주여.. 여호와 앞에 서지 못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러야 할 당위성 조차 알지 못하는 저들을

무시하거나 마음속에서 제하기 보다는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


 다음으로 '여호와 앞에 선다'는 의미다.

전적으로 매시간 매초를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하는 분들..

목회자나 수도자, 선교사, 헌신을 서약한 성도들은 일상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히려 그들은 여호와 앞에 서지 못하는 것이 힘든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 조차. 특히 현대에는

목회자의 이름을 빌은 사업가나 하나님의 이름을 빌은 나름의 자아 성취로

매시간 매초를 하나님과 세상의 일을 반분...하여 사는 자들도 많음이 안타깝기도 하다.

 그보다... 그러한 구분하기 비교적 쉬운 분들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리같은 '인생의 평범함'을 유지하는 자들.

'왕'도 마찬가지다.

왕은 왕의 일상이 있고

상인은 상인의 , 교사는 교사의.. 나같이 '의사'는 의사의 일상이 잇다 .

아.. 의사로서 상인으로서 ... 아버지로서 엄마로서.. 또 다른 일상도..

수도 없이 매사에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앞'에 설 조건들이 많은데

그러함에도 '기도'하고 '신앙행위'를 하는 그 시간들을 뺀 나머지 시간은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는'게 아니란 이야기던가?

 이것...

오늘 묵상의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내가 일상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서다'


 르보크라시는 교사이자 선교사이신 분의

일상에서 주님을 잊지 않기 위한 영적 노력으로 궁극에는 '단 10초 이상 주님을 잊어 본 적이 없다'는

고백을 하신 것 같이 우리는 일상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

'코람데오' 하나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다.

어떤 것이던가?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하루를 기도로 열며 어떤 행동을 하던간에 주님이 기뻐하실 것인지..잊지 않으려는 노력...그를 통해 인격이 변화하고 결국 영혼이 성화되어 가는 것이며

과정에서 주께서 손잡은 자녀 ..먹을 것 입을 것 챙기듯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시고

우리의 방향을 잡아주시어 성공하는 삶(세상 기준)도 되게 하시고

아픔을 여며주시기도 달래시기도 하시는 것을

내 영혼이 , 우리 영혼이 알아깨달아가며

점차로 삶의 지엽적이고 편파적인 문제들이 더 이상 의미가 커지지 아니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으로 바뀌어 가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살의 그럼직한 정의가 아닐까?

 그러기에 '여호사밧'은 왕으로서 하는 모든 행사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했지만

'아하시야'는 전혀 생각지 않고 맘대로 결정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도 기도는 햇을지 모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되뇌어가며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행사에 그 분의 눈치를 살피는 행사는 없었던 듯하다.


 또 생각해야 할 것은 악함과 선함에 대하여서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 '선하다', '악하다', 선한 왕이다. ..악한 왕이다...구분을 하지 않으셨다 .

한사람을 그의 행동 몇으로 정죄해 버리는 것...

선과 악으로 2 분 해버리는 것..

머리를 덜 쓰고 에너지 소모하지 않으며 세상을 편하게 사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것.. 오랜 역기능 가정의 소산들이다.

당하는 자들은 괜히 '악한 자'되고 원치 않고 착한 자 취급 받는 것.. ..불쾌할 수 있다 .

갈등의 소지고 '죄'다.

 주님 께서 조차 '악하다 선하다' 보다는

'악한 행동을 했고' '선한 행동'을 했다.

행했다... 라 하시고 계시다.

 이 행동들이 쌓이고 그의 영혼에 습관으로 기억되어지면

그건.. 인격이 된다. .. 물론..

그러나 행동 하나 만 보고 판단하는 '우'를 범치 말라시는 것 같다.

특별히 '믿는 자'들...

함부로 '비신앙적' 행동을 하는 분들에 대하여 차갑게 정죄하고

'마귀'니 '이단'이니...옳으니 그르니 하며 분파가 형성되는 게

오래된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다.

이 모든 것.. 사단의 흔적들이라 생각하고

미숙한 인격의 소산들임을 알수잇으며

너무 빨리 성장한 '못살던' 나라의 아픔 탓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이 '원죄적' 결점들을 들여다 보도록 이렇게 말씀으로

매사에 '현미경'처럼 보여 주시고 계시다.


 오늘 레마는 내게 무엇일까?

난 오늘도 주님 앞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슬리는 분을 뵈어도 그의 행동 만을 보자는 것이다.

내 속의 투사일지 모르고 그것은 오히려 또 나를 손가락질 하는 것이니

그런 행동에 대하여 '용인'하고 품고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시니 그리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렵지만 힘을 내 기억하고 살리라.

오늘 하루만이라도 .. 더..


주님.

귀하신 내 주님이시여.

'주님의 은혜'가운데 또 붙들고 살 레마를 깨달았습니다.

주여.

힘을 주소서.

우선 주님 앞에  서지 못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순간순간 제 자아가 제 판단자의 척도로 서려 하는 것 막아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모든 '격정'과 ' 함부로 '하려는 생각의 습관들을 맡기오니

십자가 예수 보혈로 씻어주시고

말씀만을 붙들고 살 지혜로 절 채우소서.

성령으로 그리하소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가져감으로

제 모든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시고

주님 성령의 은헤가운데 누리는 평강과 감사의 기조가 흔들리지 않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내 주여.

행동 만을 보게 하시고

인간을 정죄치 못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올바른 행동인지 기준이 튼튼하게 하소서.

내 자신에 대하여서도 돌이켜 내 부족한 행위를 스스로 긍휼히 여기도록 하소서.

그리하셔서 그 여유로움이 타인의 부족한 행동에 대하여 밉게 보이지 않도록 하소서.

제 시선을 고치소서.

그렇게 고치소서.

 또한 '옳고 그름'은 온전히 판단케 하시사 행동은 용서하되

죄와 그 뒤에 원인이 되는 세상의 권세 잡은 자를 미워하게 하소서.

내 주 예수여.

간절히도 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거룩하신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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