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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앞에서(민 32:16-27 ) 본문

구약 QT

여호와 앞에서(민 32:16-27 )

주하인 2011. 6. 1. 12:29

제 32 장 ( Chapter 32, Numbers )  

비가 옵니다

날이 흐리니

보이는 것이 흐리네요

 

주님

그래도 전 제가

이제

아름다움을 압니다

 

주님 앞에 있기에

그러할 수 밖에 없음을

이제

조금씩 압니다

 

비 오라 하소서

더욱 청초해 보여

주님 앞에

다시금 영광으로 올려드리겠나이다

 

 

16.  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가로되 우리가 이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유아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18.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얻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주님 주시는 것 그대로 순종하고 받으면 최선이겠지만

'세상'에 살면서 어쩔 수 없는 붙들림이

그들, 나를 포함한 이 유약한 자들에게 '짐'이 되고 '족쇄'가 되어

도저히 주님의 뜻을 순전히 좇지 못한다면

주님 앞에 나가 온전히 아룀이 중요하다.

 

 온전히 아뢰기 위해서는

이들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원함'이 뚜렷해야 한다.

주님 앞에 있는대로 고하고 그 원함을 철저히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물론, '아뢸 대상'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너무도 감사하며 해야한다. 
  
  
 
20.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만일 이 일을 행하여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가서 싸우되
 싸우는 것도

'여호와 앞에서' 가서 싸운다.


 
21.  너희가 다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께서 그 원수를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고  
 요단을 넘어가는 것도

'여호와 앞에서' 건너간다.

 

그냥은 건너가지 않는다.

 '무장을 하고 ' 여호와 앞에서 건너간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싸우심을 본다.

 

 

22.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복종케 하시기까지 싸우면 여호와의 앞에서나 이스라엘의 앞에서나

      무죄히 돌아 오겠고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산업이 되리라마는 
 '복종하게 하시는 것'도 여호와 앞에서이다.

그렇게 싸워야 한다.

여호와 앞에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무사히 돌아옴도 '여호와 앞에서'다.

 

 그들이 그제야 그땅을 얻을 것임도

여호와 앞에서 얻게 된다.

 

 

 무엇을 해도 다 여호와 앞에서 다.

 

드는 의문이다.

 

여호와 앞에서 어떻게 건너가고

여호와 앞에서 어떻게 복종하고

여호와 앞에서 어떻게 무사히 돌아오고

여호와 앞에서 어떻게 우리의 산업이 되며

여호와 앞에서 어떻게 복종한다는 말인가?

 모든 일을 여호와 앞에서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던가?

매사에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라는 말씀이신 것은 아는데

즉, 코람데오 신앙을 말씀하시는 것도 아는데

그 하나님 앞에서 싸움, 건너감, 복종... 그리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나.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 앞에서 인가?

분명히 오늘 6월을 시작함을 여호와 앞에서 하길 바라심이 분명한데

무엇을 어찌 하라시던가?

 출근하는데 가로지르며 튀어나오는 차들이 겁이 없다.

괜히 일차선을 막아서며 병목현상을 만드는 차들이 있다.

차선을 바꾸는데 양보란것을 배워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

매사에 걸리는 것 뿐이다.

'하나님'이 쳐다보심을 인식하면

그때마다 울컥거리며 튀어나오려는 이 어리석음을 자제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아침에 그랬다.

'여호와 앞에서'를 저리 많이 읽고 나왔는데

저건 분명코 주님이 나에게 '주님을 의식'하고 살라는 말씀이 아니던가?

 죄송한 것은 사실이기에 얼른 멈추었지만

여지없이 다가오는 생각들이 있다.

' 믿는 자가 그래서 되겠는가?'

답답해지려 한다.

'생각' 조차 사로잡아 예수 그리스도께 가져가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했다.

내 앞에 계시니..

그거.. 

오래된 옛 소리들이다.

내 것이 아닌 '비판'의 흔적에 대하여 양심을 자극 받을 일 없다.

'이제는 그냥 주님 죄송해요..'하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여호와 앞에 선 자'다.

 

   또 의문이 있다.

' 여호와 앞에서' 있다면서 어찌 주님이 우리를 보고 계실까?

당연히지만 주님은 내가 움직이길 기다리신다.

내 '원함'을 뚜렷이 하고

주님을 인식하며

내 손으로 움직여 이겨내길 기다리신다.

그래서 경기를 참관하며 계속 응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쳐다보고 계시는 것이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르우벤 족속등의 하는 것을 보아도 뚜렷하지 않은가?

'원함'을 뚜렷이 하고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하나부터 열 까지 주님께 아뢰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앞에 계신 하나님이 '오케이 '하시면 그 분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아뢸 까?

 나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많음에도 아직도 눈치를 살피는 습관이

너무도 진해서 그리 깊게 아뢰지 못했다.

아뢰었다가 '안돼 !' 라는 불호령 떨어질 것만 같아서.. ㅜ.ㅜ;;

찌렁찌렁 울리는 아버지의...^^;

 

그러나 조금씩 내 앞에 

그 생활력강하셨던 아버지의 그 날카롭고 이그러진 왜곡의 사랑이 아니라

지금껏 이끌어주시고 어루만지시고 기다리시고

늘 내 앞에 계시는 '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인정이 되어서

내 어렵사리

수십년간 묵고 묵은 하고 싶었던

나도 모르게 권위 앞에 가기만 하면

주눅 들어 잃어 버리고 있던

내 강력한 원함을 주님께 내려 놓고

주님이 이땅에

나를 위하여

내 원함에 맞추셔서

내 원함

그것이 주님의 원하심과 틀림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나타내 보이시며

강력하게 임하셔서

응답 받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난 더욱 더 주님 앞을 기억해야 한다.

매사 모든 일이 주님 앞에서 하는 것임을 의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의식으로 인하여 내 아버지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적 받을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스럽게 따사롭게 바라보시는

나를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그 눈임을 깊이 받아 들여야 한다.

그래서 그 분이 인정하심이 좋아서

인정하심을 느끼는 내 영혼의 따사로움을 스스로 느낌이 좋아서

나쁜 짓 못하게

나쁜 생각 못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점심 때 내 원함을 조금 시행하려 '은행'에 나갔다.

아들이 전화가 왔다.

일을 보던 중이라서 급히 끊을 수 밖에 없는데

아들이 그런다.

'아버지 말년 수경을 달았어요.. '

나보다는 더 이 아이가 좋은 것이 그것이다.

아버지 앞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것.

사랑스러운 감성이다.

아마도 하나님 아버지도 나를 그리하길 원하실 것이다.  ^^*

아들 보고 내가 하나님의 원리를 깨닫는 경우가 많다.

참으로 하나님이 세상에 '선한 관계'를 허락하신 이유가 그것인것 같다.

주님 안에서 생각하면 어느 하나도 일방적인게 없다.

서로 '윈-윈'이다.

아이가 말을 이어간다.

'아버지.. 전에 가져간 책 다 풀어봤어요... '

참으로 기쁘다.

아이는 이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다.

근무로 어려운 시간들인데도 저리 했구나 생각하니

응답이신 것 같아 너무 감사하다.

창구의 여직원이 날 쳐다보고 가만히 기다리고 잇음이 인식이되었지만

내 코 끝이 찡함을 금할 길 없다.

'그래 아들아.

 난 그게 응답인거 같다.

네가 자랑스럽다.

이제 몇 분후에 전화하렴...'

 주님 앞에 서려는 의식 조금 만 가지고도

주님은 날 이리 여러가지로 행복하게 하시는 구나.

들어오는 점심시간의 하늘은 언제 아침에 그랬냐는 듯 맑기 그지없다.

 

여호와 앞의 내 영혼이

늘 이랬으면 좋겠다.

 

적용

1. 아직 나가야 할 길이 멀기는 하지만

 조금만 더 '하나님 앞'을 의식하는 하루가 되자.

 . 짜증에 약하다.

 . 내 비평에도 남의 비판에도 습관이 너무 깊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은 '의도적'인 노력을 해야 하지만

  비평과 비판은 순간적인게 '나'다.

  조금더 습관이 되어야 한다.

  '성령이여 도우소서.'

 주님으로 인하여 습관적으로 주님 인식하는 제가 되게 하소서.

 

2. 그래도 주님 앞이다.

  실패와 실수를 해도 주님 앞이란 사실은 변함없다.

  내 죄책감이 주님의 면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순간 튀어나오는 죄 다음의 양심을 가장하는 '죄책감' 말이다.

  이제 안속는다.

 주여.. 도우소서.

 

3. 성경세장 읽겠다.

 말씀은 살아있다.

 

4.  원함을 분명히 하자.

 원함은 주님이 원하심이 내 원함이 되어야 한다

 안될 때는 내 부족인지 주님이 원하심이 아니신지 혹여 상처 탓인지 구분할 기도를 하자.

 주여..   지혜를 주소서.

 

5. 원함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주님이 들어주신다.

 

6.  주님께 내 부족한 것 기도하자.

    새로운 술기 공부해도 될지 여쭈어 보자.

   그 전에 내 원함과 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돌이켜 보자 .

   주님 앞에서 죄가 아니면 고하자.

 

기도

주님.

귀하신 내 주님.

오늘... 르우벤 등을 통하여 생각케 하시는 것이 많습니다.

그들이 조금 어리석은 판단을 했지만

그래도 원함이 너무 뚜렷하고

주님의 뜻 을 크게 어기지 않는 한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님께 여쭈어 기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매일 '  '여호와 앞에서' 모든 일을 해나가고

'우리 앞에서 '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을 지켜 볼것을

다짐에 다짐시키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저.

정말 부족한 의지와 부족한 지력으로

마치 오늘 저들 르우벤등의 그 심성과 비슷한 상황임을 봅니다.

아니라 하지만 온전히 하늘나라의 상급을 위하여

전력 투구

세상의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사도'나 '제자'의 그것을 닮아갈 수 는 없는 듯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요.

그러함이 르우벤등의 결단을 보고

그들이 행하는 '세상적'이지만 조금은 '하나님 앞에서 ' 지혜로운 결단이

새삼 가슴에 옵니다.

저도 그리하길 원합니다.

제 습관적 , 자동발사되는 이 판단과 비판의 칼날에 불구하고

그리고 그 후에 따라오는 양심을 가장한 죄책감의 멍에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서 있는 제 상황은 하등 차이가 없음을

깊이 깊이 또 깊이 제 영혼에 받아 들이고 인식하길 원합니다.

주여.

절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성령으로 강하게 흐르시어

이제는 습관적이고 반사적인 주님 앞의식으로 채워지길 원합니다.

주님의 손잡고 가는 이 세상.

세상의 부족과 많음으로 인하여 일희 일비하지 않게 하게 만들어 주시고

주님 손 잡고 가는 이 인생길,

매사에 주님께 여쭈어 아뢰는 깊은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주여.

도우소서.

주여.

절 붙드소서.

주여.

제 앞에서 주님 역사하시는 기쁨의 주님을 뵙길 원합니다.

주여.

제 자식들 그리하시고

제 아내 그리하시고

제 가족 그리하시고

이 블로그의 모든 방문자 그리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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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또 다시 한 달이 밝아 왔습니다.
올 한해도 벌써 반이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지난 젊은 시절.
어른들이 세월이 쏜살 같다시던 탄식이
정말 이제는
남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

또 밝아온 한달을 어찌 보낼까 고민하며
매일 성경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역시.. 주님이십니다.
늘 '여호와 앞에서' 라 하시네요.

그렇습니다.
그 분 앞에 사는 마음으로 살려 노력해 보렵니다.
그 분 보시기에 조금은 더 겸허하게
그 분이 보시기에 조금은 더 남을 위하고
그 분이 보시기에 조금 더 전도의 말씀을 전하려 하고..

무슨 이익이 있을거냐고요?
놀라운 은혜가 있을 것을
믿는 우리들은 압니다.

마치 저 등나무 꽃에 방울 방울 맺힌 것이
'비'가 아니고
'이슬'같이 보이는
그 아름다움이
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만 주님의 앞을 인식하는 사실 만 가지고
제 아무것도 아닌 영혼을
온통 '아름다운' 이슬같은 느낌으로 바꾸시고
일상을 축복으로 이끌어 가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 뿐이 아니리라 압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이제 7개월 남은 올해.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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