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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모두에게[대하32:20-33] 본문

구약 QT

어려운 모두에게[대하32:20-33]

주하인 2013. 8. 26. 00:04

 

 

20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21.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지휘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낯이 뜨거워 그의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의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22.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주민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손과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

    하여 내사 사면으로 보호하시매

23.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또 보물을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린지

    라 이 후부터 히스기야가 모든 나라의 눈에 존귀하게 되었더라

 히스기야가 그 충성을 보였어도 '고난'은 왔다.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시련.

 

 하나님의 자녀들로 '고난'은 반드시 거쳐가야할 도구이다.

고난은 '하나님의 뜻'으로 만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

 

 고난, 시련,어려움... 은 '축복'의 도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냥 축복만 주시지 않으신다.

주시기도 하지만 그것은 '복' 이 아니시다.

방치시다.

하나님의 원리는 '고난'을 이긴 후의 축복이다.

사면으로 보호하시고

모든 나라의 눈에 존귀하게 하시는 도구로 '고난'을 주시기도 하신다.

그렇게 이해가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세상의 사랑하시는 모든 자에게는 '고난'을 허락하신다.

고난은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허락하시는 '필수 불가결한 하나님의 원리'이신 듯하다.

고난이 없으면 사랑하시지 않으시는 자일 수도 있다.

또, 고난은 '복', 그것도 큰 축복의 전제이기도 하다.

 

그것을 알면 '이유없어 보이는 고난'에 대하여

훨씬 큰 포용력이 생겨날 수 있다.

당연한 것이지만 현실에서 충성을 다한

스스로 이해하기 힘든 고난은 '실족'의 의혹들이 승하게 하는

이유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24.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

 고난은 ' 하나님의 역사'를 보이시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히스기야는 산헤립 사건 이후에

또 병들어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그때 그는 그 유명한 기도를 하지않았던가?

'나의 잘했던 행동을 보시고... ' 하며 울부짖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이적을 보는 체험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고난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이시는 도구다.

그의 기도처럼... 정말 하나님과 긴밀한 동행을 했고

나름 믿음안에서 '의인'의 행동을 했다는

하나님 안에서의 단단한 기쁨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고난은 오히려 '병'자체보다

믿음을 흔드는 가장 큰 위험일 수도 있다.

 이럴 때의 고난은 ' 기도'를 통하여 더욱 하나님께 다가가는

깊은 믿음의 성장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

 

고난은 '믿음'을 성장시키는 정금, 제련의 불이다.

어린 믿음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25.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26.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고난은 ' 교만'을 꺾는 도구이시기도 하다.

징벌의 방법이시기도 하며,

그 징벌을 성장을 전제로 한 사랑의 매라는 것이다.

'광막한 광야.. 불뱀과 전갈의 쏘는 듯한 고난은.. 시험하시고 낮추사 마침내 복을 주려 하심' 이라 하셨다.

그렇다.

환란이나 고난은 '교만'을 꺽으사

마침내 인격이 겸손해진 영혼이 되게 하시는 도구 이다.

교만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영혼의 병이다.

문둥병.

영혼의 문둥병은 '영생'을 막는 질병이다.

세상의 복은 먼저 주면 반드시 교만해지는 것을

솔로몬에게서도 , 사울에게서도, 심지어는 그 대단한 히스기야에게서도 보지 않는가?

영혼이 정결하고 겸손하지 못한 자들에게 허락되는 복은

교만의 도구이며

반드시 실족할 '독'이다.

 

 고난은 '교만'을 꺾는 하나님의 징벌이시자

겸손을 위한 하나님의 눈물 겨운 우리를 사랑하신 결단이시다.

 

 

27.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지극한지라 이에 은금과 보석과 향품과 방패와 온갖 보배로운 그릇들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28.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산물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온갖 짐승의 외양간을 세우며 양 떼의

    우리를 갖추며

29.양 떼와 많은 소 떼를 위하여 성읍들을 세웠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음이며

 

 고난을 제대로 견뎌낸 자,

고난을 이겨낸 모든 자들, 그것을 하나님 안에서 이겨낸 자들은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는 구절이 있다.

계속 묘사하는 구절이지만 신명기 8장에서 '마침내 복'을 주신다..신다.

고난을 '하나님'앞에서 이겨내는 것을 '연단'이라 표현한다.

연단은 영혼이 성화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선교자로서든,

의사로든

아버지로든

남편이로든

친구로든

사업가로든.... 그 어떤 모습으로든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된 고난은 무조건 건너야 한다.

현재의 우리의 모습은 그냥 그 '연단'.

그 모습대로 받아야 할 고난을 연단으로 이겨내야할 위치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명령이니 중요하지만

선교지에서 연단은 그 선교사 영혼의 정결함에 귀한 점수를 더해줄 뿐,

교만해도 된다는 '도장'이 아니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많은 전도를 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것은 절대로 '영생'을 누릴 자가 '교만'하게 그대로 천국에 와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고난을 몸소 몸으로 보이시며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 셨다.

물론, 듣는 소수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시다.

십자가는 '구원 '받은 징표'일 뿐...

나머지는 부활신앙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매일 매일 있는 자리에서

받을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이겨내야 하는 게

우리의 받은 명령이다.

그게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게 하신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마땅한 우리의 의무다.

 

세상의 복.

그것은 '이 모든 것을 이루면 부어주실 약속'의 일환이다.

 

 

 

 

믿는 자,

기도하는 자로서

힘이 드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현상'이 변화가 눈에 띄게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어가고

육신의 약해짐과

사회적 환경의 덩달아 시들어감은

심리적 초조함을 불러온다.

거기에 .. 벌써 끝나서 한걸음 떨어져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환란'이 밀려오면

그것을 '이 좁은 머리'로 감당하기가 힘들다.

 

나름 시간이 지나면서

매일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감동으로 살면서

'히스기야의 충성을 다한 후'의 그느낌으로 있는데,

산헤립 같은 대단한 고통이 밀려오니..

새삼 '연단의 원리'와 '영생'의 개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우주적의미와 부활,

그리고 그 것을 누리게 하시기 위한 '성령'의 보혜사적 의미,

또한,

이 인생을 허락하신 뜻이

하나님이 나의 연단을 통한 하나하나의 변화를

더불어 기뻐하시며 동행하시는 과정이고

그 결과로 난 천국의 귀한 자리를 보장 받았고

이 땅의 복도 마침내 주어질 것을

확실히 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씩

영혼 깊숙이서 뒤집히는 듯한

대 혼란이 예상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다.

 

그럴때..

잠시 힘들었지만

그때그때 잡아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부분이 있었다.

감정적으로 기쁘고 들떠야 할일이 업음에도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영혼의 고요한 감동이

잔잔히 나를 잡아가는 것이다.

어쩌면...히스기야님은

그 어려운 혼란의 시간들과

외적으로나 병으로 인한 개인적인 혼란의 시간동안이지만

그가 그리 흔들리지 않고 얼른 돌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에서

다시 깊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 , 그와 하나님 사이에서 만 알 수 있었던

영적인 든든함,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깊은 감동 탓이 아니었을까?

감동보다는 감동을 기억하고

그 감동이 잔잔히 그 영혼의 깊은 곳에서 움틀거리는 용트림..같은..

 

 히스기야의 그 옛적 의로왔던 일을 기억하시라는 기도의 내용이 감동스러운 것은

금요성령집회의 시편 77편 10절 이후의

사자의 그르렁거리는 읖조림 같은 '묵상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보이셨던 기적의 세미한 순간들을 기도속에서 되뇌임'이 중요하시다는

목사님의 설교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며

그것은 내 고백과도 어찌 그리 통하는 지

시기적으로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인생의 허락된 고통이지만

그 안에서 오랫동안 잠겨 있을 때 다가올 '혼란'의 시간동안

말씀으로

은혜로

깨달음으로

설교로

하나하나 잡아가시는 그 시기적 절묘함이

매일 매일 놀라고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날 붙들고 계시다.

고난은 이처럼 필연이기에 그냥 다들 그렇게 허락되는 것임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깨어질 교만 부분이 있는 지 어서어서 돌아보아야 한다.

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금 조절해야 겠다.

그리고는 '기대'하여야 한다.

이제 곧.. 축복이 크게 오리라.

어서 빨리 나를 더 정결하게 해야 할 것 만 같다.

 

 

주여.

오늘 주일.

말씀 붙들고 잘 이겨나갔습니다.

그냥 자려 했지만

잠시의 묵상 기도 중에

깨달아졌던 고난에대한 부분을

적어놓아야 겠다는 생각이 밀려와서

이 늦은 시간에 한시간을 남겨놓고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주여.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들이 밀려올 때

흔들리지 않게

깨달아지는 것을 깊이 기억나게 하소서.

누구나 사랑받을 자들은 '고난'이 허락됨을 잊지 않게 하소서.

끝없이 발전만 하는 것은 오히려 저주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주여.

변함없는 어려움들,

이제 곧 주님이 다 바꾸실 줄 믿습니다.

어서 어서 제 안에서 남아 용트림하려는

교만과 아집과 포악의 기운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재우소서.

십자가 앞에 가져오니 보혈로 태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부활하게 하소서.

저에게 성령으로 검을 채우사 말씀대로만 휘두르게 하시사

그 정결하지 못하게 하는 어려움들 태우소서.

성령의 불로 태우시고

하나님 앞에 직고하시면 당신의 사랑으로 태우소서.

하나님 .

복을 기대합니다.

제 가정에게도 융성한 복,

하나님이 예비하셨던 축복도 마침내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오니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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