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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고센의 해후(창46:29-47: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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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고센의 해후(창46:29-47:12)

주하인 2007. 6. 15. 19:53

제 46 장

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29.  아비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 목을 어긋맞겨 안고 얼마 동안 울매  
30.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34.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고센 땅이 가뭄 피난처지만 아름 다웠던 모양입니다.  )

 

 


 야곱이  애굽에 갔다.

애굽에 갔지만 고센에 머물 의지를 표명했다.

살아있는 아들을 볼 정신없음이 보여야 함에도 고센 땅으로 자기를 인도하게 하는 냉철한 지력을 보인다.

고센은 무슨 의미일까?

아랫 구절에 나오지만

그땅은 목축하기에 그지 없이 좋은 땅인 게 분명하다.

 

 야곱은 130의 노인 나이에

자식을 보러 가는 중에도

그의 현실적 감각은 식지 않는 냉철한 리더의 모습을 보인다.

 

 그의 자식 해후는 감격적이다.

수천년을 격하고

다시금 살아 있는 성경의 감격이 그대로 전해온다.

 목을 어긋 맞겨 자식을 안았다.

NIV에는 

As soon as Joseph appeared before him, he threw his arms around his father and wept for a long time( 요셉이 그 아버지가 나타나자 마자  두 팔로 그의 아버지를 껴안고 오랫동안 울었다)...라고 되어 있다.

 마치 이산가족 상봉하는 몇 년전의 TV 프로그램을 보는 듯

"네가 살아 있는 것을 보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한다.

어떤 해석이 옳은지 몰라도

두 사람은 부둥켜 안고

꺼이 꺼이 목놓아 울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제 47 장 ( Chapter 47, Genesis ) 

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 풍운아의 인생도 항상 살얼음 판입니다. ^^*)

 

 

  드라마 같은

풍운아의 삶을 사는 야곱과 요셉 , 그리고 두 사람과 그 가족들이지만

그들의 행보는 늘 조심스럽다.

마치

조금이라도 아차하는 날에는

그들의 삶은 이방의 노예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다 .

실제로 바로 전의 글에

펌해온 글에서도 알 수 있지만 야곱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전락했다지 않은가?

그리고 400년.

 요셉은 총리이지만

왕의 전권에 의해 파리같은 목숨이 될 수도 있는 자이다.

야곱이 라반에게 그랬듯이

그의 삶도 그리 마음 녹녹한 상태가 아니다.

 

 늘 내가

아무 생각없이

군고구마 구워 놓고

무협지 갖다가 펼쳐놓고

아무 생각없이 두러누워

시원한 에어콘 아래에서 몇날 며칠을 뒹굴거려도

아무런 내 삶에 흐트러짐이 없을

보장 받은 완전한 게으름을 만끽해보았으면 하는 것이 꿈인 것 처럼

그런 바램과는 반대로

늘 살얼음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인 듯 싶다.

 

요셉은

고센 땅에 식구들을 거하게 하는 이유가 있는 듯 싶다.

아버지가 원하기도 하지만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목축을 유지하기 위하여 적절한 땅일 뿐더러

대 가족의 이방인이 섞여서 애굽 족속과 살기엔 위태함을 알기에

그런 삶을 선택한 것일 것이다.

그러기에 그러한 위태함 속에서

그는 다섯 형제만을 선택한 것이고

아버지 야곱의 능수 능란한 대인관계를 기대할 뿐더러

미리 잘 약조된 대화를 연습한 후

바로를 찾아간다.

 

야곱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서의 잘 훈련된 영성이 충만한 감각적 언어구사로서

바로를 감동시킨다.

"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나그네 길.

내 나그네길

세월이...

일백 삼십년..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찌르는 인생의 회한을 느끼게 하며

또 그 삶에 대한 표현이 나그네 길임을 말하는 그의 표현 화술과

거기에 '내' 나그네 길이란 표현을 더함으로

듣는 순간 '찌르르'하는 마음이 들어

눈을 들어 그의 입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면서 '~~~ 이다." 라는 말로 단 문장으로 짧게 말을 마쳐서

힘이 있는 느낌이 들게 하며

곧 이어

' 내 연세, 즉 나이가 얼마 못된다'면서 겸손한 표현으로 하고

그 겸손함이 '그의 조상의 세월'에 갔다가 비유함으로

더 겸손한 느낌과 더불어 조상을 존경하는 마음과 더불어

족보있는 자신의 가정사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비춘다.

 그러나 , 바로 조금 전에 명기 했듯이

그의 삶의 버거웠던 행로가

풍운아적인 행로가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는 한 말에 함축이 됨으로써

바로로 하여금

동정심과 더불어 측은 지심을 불러 있으켰으며

요셉의 인물됨이 그 아버지로 부터 나왔음을 단번에 알아차리게 하는

좋은 말이었음을 단박에 알게 하여

그로 하여금 교류를 나누고 싶은

심사를 가져오게 했을 것이다.

 역시 아래의 펌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이러한 요셉과 야곱 일가의 행사는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사실이며

또한 바로가 이스라엘 쪽에서

쳐들어온 셈족이라는 얘기를 보아서

그게 검증된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마치 바둑을 두시는 것처럼

수백 수 앞을 내다보시며

하나하나 준비한 게 놀랍다는 생각을 금할 길 없다.

야곱 일행이 고센에 머물기 위해서는

바로의 동족 의식이 있어야

요셉이 총리가 되는 것이며

야곱을 정감있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로가....

대단하신 하나님 !

 각설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오랜 시간

아마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으리라.

그리고 나서는

바로는

야곱에게 축복을 받게 되었다.

희한 하게도..

아마도 그게 그 당시의 풍습이었을 줄은 전혀 신학적 상식이 없어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신하지만 존경할 만한 인품의 요셉과

그의 아버지의 노회한 풍모와 언변,

거기에 알게 모르게 바로를 압도하는

강한 영적 에네르기가 그로하여금

바로인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게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장면 장면의 모습은

가뭄 속에서 구사 일생으로 살아나오는

이스라엘 민족과 야곱인 이스라엘 일가의 모습을

하나하나 그려내면서 그들의 삶이 그대로 느껴지게 한다.

 그러면서  그 버거운 삶속에서도

절대로 하나님을 놓치지 않아

피를 나눈 자들만 70명이 모두

정말 하나도 빠짐없이 애굽에서 새로운 삶,

그것도 고센이라는

신천지의 삶을 살아나가게 되는

가뭄 속의 피할 길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아들이 오늘 군대에 복귀했다.

약4개월 만의 만남이고

그 사이에 그 아이가 보여준 희망적였던 모습에 비하여

단 5일 휴가 기간의 풀어짐은

속이 다시 답답해지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러면서

작은 아들에 대한 마음의 정리 문제가 겹치면서

이상하게도

예전과는 다른 부분에서 내 마음이 혼란 스러워 지려 했다.

그럼에도

상황 상황 정확하게 우리 주님은 날 이끌어 가신다.

가뭄 같은 내 상황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픈 내 마음과

아들 사랑이라는 세속의 사랑과의 중간에서

어떤 모습을 취해야

구원받은 자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인가를 생각해볼 여지 조차 주지 않고

휘몰아 치는 옛 성질의 드러남을

주님은 정확히 묵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만히 가만히

야곱의 움직임을 보니

그의

인생을 달관하고

이제 주님께서 그리도 기뻐하셔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다시금 부를 만한 자격이 있을 만큼

그는 풍운아의 삶에서

잘 연단된 믿음을

자식들과의 갈등 속에서 조율해가는 모습을 보인다.

특별히

고센이라 대표되는

이 세상의 삶에서

그것조차

냉철한 지성으로

죽었다 다시 돌아온 자식의 열렬할 사랑 사이에

균형잡힌 모습으로 감싸 안는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감정도

주님 앞에서 아름답게 조율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많이 답답했다.

그러면서

아침 이후의 묵상에서

지금 새벽인 16일 초두까지 아무 진행을 할 수가 없었지만

교회 가면서

갔다가

오면서

내 속에는 천지 차이의 변화를 겪었다.

역시

주님은 날 굉장히 사랑하신다.

주님은 엄청난 기쁨이다.

주님은 내 희망이다.

아무 것도 변한 것도 없지만

주님을 만나고 오면 엄청나게 변한다.

변할 것이다.

그것이 한번 두번 쌓이면서

내 삶의 완전한 판단 기준이 되는 날

난 내 자식과 주님과

현실과 믿음과

외견과 내실이

크게 다르지 않고 큰 변화가 없고 전혀 흔들림 없이

주님 앞에서 옳다는 인정을 받을 것 같다.

 

아들 들어갔다.

그녀석

앞으로는 괜찮을 것이다.

성경의 인물들이 그리 엉터리지만

주님에 의하여 붙잡힌 자들은 그 엉터리를 그냥 가만히 받아 들였다.

그리고는 이겨냈다.

승리했다.

그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주님 안에서 승자로 삼았다.

야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나도 내 아들들이 엉터리 같지만

주님으로 인하여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무 생각없이

긍정적으로 ..

그 아이들은 결국 성공할 것이다.

주님 안에서

모두

고센지방으로 잘 데려만 가면 말이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다.

 

 

 

기도

 

주여

정말 감사합니다.

상황은 변화가 없어도

고센 지방이 눈에 보입니다.

주여

당신 덕분입니다.

애들..

다 데리고 무사히 가뭄을 피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그때가 되면요.

 

주여 .

사랑하게 하소서.

이제는

내가 중심이 아니고

아이들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일이 주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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