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넌 누구냐 ( 창 48:8-22 ) 본문
제 48 장 ( Chapter 48, Genesis )
8.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가로되 이들은 누구냐
( 꽃이 아름다워도 해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셉이 아니었더면
9. 요셉이 그 아비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죽을 때까지 야곱은 손자들을 못알아볼 뻔 했다.
10.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 맞추고 그들을 안고
또한 요셉의 아들이 아니었더면
축복을 받지 못할 뻔도 했다.
17.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 아무리 깊은 데 있어도 해가 나면 꽃은 드러납니다.)
요셉이 아니면
므낫세는 그나마 마음 속에 짐까지 짊어지고 갈 뻔했다.
하나님의 뜻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자위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지만
요셉이 다시 수정하려는 시도 - 아 ~~ 아버지 - 가 그나마 있었고
그 후에
야곱의 부차적 설명이 있었기에
축복에서 조차 왕따 당하는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야곱은..
눈이 보이지도 않는 불편한 야곱.
죽음이 눈 앞에 있는 야곱
세상의 낙이라고는 없는 야곱
그렇지만
그의 마음이 읽혀진다.
힘들고 외롭고 무엇보다 아무 것도 할 능력이 없을 그이지만
그렇게 힘들지 않아 보인다.
아들이 살아 돌아오고
그 자식이 생각지도 못했을 손주들을 데리고 옴에
그는 기쁘다.
기쁠 조건이 없음에도 기쁨은
남겨 놓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가뭄을 피하는 현실적 타개책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이리 융성한 장래가 보이는 듯 해서 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간적 예상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다시 죽음을 향한 무료한 진득함, 외로움에 몸부림 치는 것이
147세 나이의 노인에게는 당연한 일이나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자가
손을 어긋나게 두 자손을 축복할 수 있는 능력에서 보인다.
그것은
그의 영적인 눈이 우리의 그것과 다름을 쉽게 알수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수없는 연단을 받고 나서 이루어진 이긴 자의 경지.
카톨릭 성인들의 경우도 이적을 보이는 것을 본다.
그것이 성인의 조건 중 하나라 한다 .
야곱의 영혼 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의 장래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온 연단을 다 마치고
주님의 뜻과 하나가 되는 자의 영은
무료함 , 답답함... 은 있을 수가 없다.
이 땅에 있어
육신의 껍질은 쓰고 있으되
천국의 삶을 살고 있는 자의 그것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조건은 결코 행 불행의 근거가 될수가 없다.
오직 얼마나 주님을 믿고
동행하는가와
주님의 허락하신 시간의 길이가 결정할 뿐이다.
첫 서두에
그 야곱이
" 이 들이 누구냐" 묻는 장면이 눈에 걸린다.
( 주님, 당신이 제 이름을 불러 주셔야 전 온전해집니다. )
그리고는
아들 요셉이 설명하고서야
그의 이 영적 심안이 확 펼쳐지는 것을 본다.
축복의 대 물림이 이어지는 것도 본다.
이들이 누구냐는 그 물음이
마치 나보고
주님께서
"너는 누구냐?"라 묻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덜컥한다.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고픈 자로서
그 분의 말씀대로
내 주위를
주님의 향기로
뒤 덮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전혀다.
멀었다 .
내 주위는
냉랭함과 다툼이 잦다.
가끔은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어떤 때는
온 몸에 힘을 빼고 눈알만 굴릴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듯
무기력 해진다.
누구가 알까?
이럴 때는 참 죄송스럽다.
요셉님 처럼
옆에서 날 보중하시고 중보하시는 성령께서 계심이 참 다행임을 안다.
그래도,
그럼에도
'나 같은 것이'하며
깊은 좌절에 들어가지 않음도
그나마 열심을 보인 시간의 댓가 인 듯 스스로 조금 위안이 되기는 한다.
기도
주님
아시지요?
주님
제가 누군지 아시지요?
주님
정말 아시지요?
에브라임과 므나임처럼
절 중보하시는 성령께서 계시기에
주여 절 알아 보시겠지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저
알아보시고
축복하실 것이시지요?
므낫세 처럼
제 마음
두근 두근 합니다.
속도 상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지요.
축복을 알고
그 축복이 나에게 과분함을 알면서도
비교하려고 하는 마음이
가끔은
괜히 생겨요.
주님.
참으로
주님 앞에 한 것 하나도 없으면서요.
그냥
어긋맞겨 올려진 손은 아닌가
속이 상하려고 해요.
아니요.
실은요.
저 알아보실 거란 생각은 있어도
혹시
하는 어리석은 느낌이 아직은 좀
스물 거린답니다.
오늘
'너는 누구냐'
물으실 것만 같아서
참 두근 거립니다.
주여.
절 용서하시고
주님 뜻대로 절 인도하소서 .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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