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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남아 있는 근심[창26:34-27: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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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남아 있는 근심[창26:34-27:14]

주하인 2020. 2. 10. 08:10



26장
35.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살면서 '근심'이 없는 자가 있을까?

가족 간에라고 갈등이 없는가?

가려지고 숨겨져서 그렇지 마음 고생은 가족끼리 내에서

가장 크고 힘들지 않을까?

 이삭과 리브가.

사람의 성품 중에서 가장 '예수님'을 많이 닮았을 것으로 회자되는

'이삭' 과

그녀,

소설 속의 여주인공처럼

밀밭을 스치는 바람결에 머리결을 흩날리며

석양의 황금색을 등지고 낙타에서 뛰어내리며

밀밭 광야 저편 끝에 어렴 풋이 보이는

운명의 남편 '젊은 이삭'을 만나려 온

리브가 사이에서도

살다보니 '근심'거리가 있지 않던가?

'에서'의 일탈......ㅠ.ㅠ;




27장
4.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그것 뿐인가?

그들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이삭'과 '에서'가 짝짝꿍이 되어

'축복'을 그들끼리만 논하고



10.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과

또 하나로 짝이 되어 '축복'을 뺏어올 궁리를 한다 .

옛말에 '물어 안아픈 손가락'이 있냐는 말과는

전혀 다르게 '편애'를 하고 있다 .

 물론,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우선으로 하고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지만

'축복'을 향한 가족들 간의 암투가 치열한 것이

과연

이들이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고 축복하시는 '가족이 맞는가

의심될 정도로 무서운 암투가 그 안에 횡행하고

저 어머니가 내 어머니라면 (아........주여.......ㅜ.ㅜ;;;)

저 아버지가 내 아버지라면 (그나마 시대, 장자.. 고려하면 야곱은 덜 실망스러울 수 있다 ..욕심만 빼면.. )

그 암투를 아는 에서의 실망이 얼마나 심했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편애하는 아들과 왕따 당하는 자의 그러함.

어쩌면 어려서부터의 그러함을 빌미로

사춘기에 삐져나간 ^^;; 에서가

부모의 '근심'거리가 될 행동을 하지 않았을 까 싶어

한편으로 이해가 되기는 한다. (아.. .형... ㅠ.ㅠ;;)

뭐.. 그를 통해 '야곱'이

성경을 이어가게 하고 예수님의 족보에 서 있게 됨은

하나님의 뜻......이란 명제아래

더 깊은 생각을 하게는 하지만 말이다


'근심'이란 단어를 보면서

어쩌면 이리도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가족,

축복의 가족, 예언의 가족으로 대표되고 있는

이삭과 리브가......가족 안에

이리도

너무나 친숙한

한편, '모자라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이게 어쩌면 잘못일 수 있다... 혐오)' 사람들이

'축복'의 계열에 서 있게 되었는가 의심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행이라 느껴지는 것은

너무도 익숙한 그들의 '인간적인 단점'들이

하나님의 축복에

그리 큰 방해가 되지 않음을 알게 되면서

다시 한번

그래도 살아갈 '힘'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들도 그런데

과연 내가 나를

그리도 자책할 이유가 있을까?

 

 다시 살아내라면 살아갈 자신조차 없어질

비정한 '인간관계' 속의

동물농장 보다 추악한 그 악한 마음들의 얽힘,

원하든 원치 않든 얼키고 설키는 답답하고 두려운 인생,

자신들이 미련하고 한계가 너무 뚜렷한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면서

서로 서로를 향하여 궤계(ㅠ.ㅠ;;) 를 꾸미는 이 무지한 인간들.

사랑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수 없는

이 사랑한다고 외치는 '지옥도 속의 영혼'들.

그 안의

그들과 하등 차이점을 발견할 수도 없는

추악한 나......ㅠ.ㅠ;; ............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지 않았으면

정말

단 한톨의 보아줄 구석없을 만큼

미련하고 추악한 것이

인생이다.

사단의 날뛰는 장소들이 이 세상이며

그 안에 휘둘리는 야생의 야수와 짐승 들이 우리네 인생이란 것이

'주 앞에서 미련하고 우매무지 하기가 짐승' 같다고 표현한

시편 구절의 (맞나..?  ^^;;) 고백이

내 고백이고

나름 자신의 '죄'에 고민하는 기독교인들의 그것일 듯하다.

 그러한 우리를

그래도 사랑의 눈으로 보시고

긍휼히 여기시어

그토록 수없이 많은 기회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도 안되니

말라기 서 이후 400여년의 침묵 이후

대 결단을 내리시고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시고

당신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직접 내려오셔서

어린양의 제물과 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시며

우리 죄를

다 가져가시어

도무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우리에게

새 기회.

새로운 생명의 기회를 허락하심이 아니겠던가?
아...

이 사랑.

이 끝이 없으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의 은혜로 말미암아

또 ......나...

또 우리는

그래도 살아서 숨쉴 틈을 얻게 된 것이다.

주여................


 어머니 생신이라

고향에 다녀왔다.

참으로 오랜시간 고백했지만

너무도 많은 묶임과 혼돈과 .............뭐........그런 곳.

아버지 , 작년 우리 큰 아들 결혼식 날, 바로 그때 '장지'로 향하시던

돌아가실 때까지도

마지막까지..^^;; ....

혼란을 주시길 멈추지 않으시던 (사랑은 많으시던 분임은 이젠 고백할 수 있다.. 방법 차이지..)..

어머니.. 잘 버티신다.

그를 보면서도 다행이란 마음과 혼돈이 같이 공존하는 눈으로

(애와 증, 사랑과 미움.......사랑과 전쟁... 뭐... 드라마제목인가...)

그 분을 뵙고는 올라왔다.

 하나님안에서 많은 연단과 시간을 통하여

나름 깨끗하고 정제된 나름의 변화는 있지만

오늘 '근심'이란 단어로

한마디로 응축된 표현이

그러한 인간 관계와 내 내면으로 향하는

모든 갈등들이

또 다시 드러나게 하신다.


 그렇다.

어디고 갈등이 없을까?

살아가면서

그 어느 누구도 완벽한 평강과

온전한 관계 속에서 거하다 갈.. (있다면 망상이리라.. ) 수 있으랴.

 저리.. 축복에 가장 가까운 이삭 가정에도 그랬는데......

그들은 그래도 수치심을 많이 느끼지 않고 산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부분..........

그 내적인 어려움,

외적인 힘듦..........

그것...........

더 이상

주님 안에서는

부끄러움이나 수치......라기 보다는

어쩌면 당연한 인생의 연단 과정 중의 하나이며

이제 .....

무거움과 어려움과 아픔, 상처.......라는 어두운 무거움보다는

당연한 장해물로

주님 안에서 내려 놓아야 할

기도거리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게

말씀을 보면서

다시금 드는 느낌이다.


 고향에 나름 개발된 '예당저수지'의 출렁다리를 들렸다가

올라오는 차 안에서 둘째가 그런다. (젊지만 특별한 ..많은 연단을 거친... ^^;;;)

"아버지..  요새는 고민이요...

 죄를 지어도 어느때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려 하는게

 고민이 되어요....."(특별하지요? .. 가족간의 대화라기는 좀..수준이.ㅎ.ㅎ 자주 이리는 아님다.ㅎ)"

그래서 그랬다.

"죄책감이 회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넘.. 그로 인한 아픔이 내 회개의 기준으로 삼으려 하다보면

 자책으로 묶인다.

 그는 또 다른 멍에다.

 그러기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하고는

 내려 놓음이 중요하다 ..

 증상 유무와 상관없이 기도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


  근심.

나.. 근심이 많았던 자.

모든 인생의 그러함,

가까운 자들과 의 무거운 묶임...

모든 것을 내 육신으로 받고

내 마음으로 받아

분이 많고

노가 잦았던 자.

다행이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어

수고하고 무거운 짐.. .많이 걷어 내게 되고

말씀으로 인도받고

은혜로 떠 받침 받아

이제...엄~~청 가볍고 자유로와 졌지만

아직도 근근히 남아

내 가슴을 얼얼하게 만드는 것들.....

완전히 드러나지 않아 아직도 내 삶과 생각의 흐름을 걸리게 만드는 것들..

그 정체.

그것을 '근심'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그 근심의 무게를

이젠

크게 더 근심하지 않는 방법을 많이 터득하고 있다.

주님. .. 말씀이

매사에 , 하루마다..

레마로 , 대화로 걸어오신다.


 오늘은 그 근심은

인생을 살아가며

더 이상 완전히 털어낼려는 노력이나 관심은

그리 큰 의미가 없음을 말씀하시는 듯하다.



 주님.

살아갈 동안

근심이 없는 사람

그 어디에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주여.

근심은

모든 인간 관계의 갈등.. 수없이 많은 일로 그리 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스스로의 안으로 내재 시켜

자책으로 변환 시키지 말라시는 듯합니다.


주여.

근심을 하는 것을 '의로운 부담'으로 받는 것과

죄짓고도  근심이 없는 것을 태만으로 착각하는 것,

그리고 그러함으로 근심함을

더 추구하는 것을 병적으로 보는 것과의 한계를

이 일상에서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주님을 인식하고 사는 하루가 되는 한

난 그래도

우린 그래도

단점많고 근심이 역시 똑같이 있는

이삭과 리브가의 그러함 처럼

주님은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실 것임을 믿어

조금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오늘 하루 살아도 될 것만 같습니다.


주여.

그 혼돈...

모두 주님께 맡기오니

근심과 걱정,

믿음과 흔들림 사이의 구분.......

그 모든 것..

주님이 다 알아서 하소서.

그냥.. .

기도 시키시고

말씀을 더 깊이 바라보며

은혜 만으로

또 하루 살아가는 것을 바라시는 내 주님


그리 살다가

부르실 그날에 주님 앞에 다다르면

'의롭다' 하실 것을 믿고

근심이 또 사로 잡으려 하지만

괜한 내적 투사를 하지 않으려 내려 놓습니다.

주여.


홀로 하나이신 내 주님.

그래도 나를 통하여

조금이라도 선한 영향을

세상에 끼쳐지게 하소서.


내 주 예수 그리스도,

거룩하고 귀하신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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