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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자[창27:30-4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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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자[창27:30-40]

주하인 2020. 2. 12. 08:36




33.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삭이 

아들 에서의 이야기를 듣고

떨었다. 

그것도 '심히 크게'다.

심히 크게 떨음은 왜인가?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야곱에 대한 '분노'일까

아니면 

두려움 탓일까?


 속았다 해서 심히 크게 떨지는 않을 것으로 보아

'분노'로만 그랬다보기는 힘들다.

(아니진 않을 것이다. .. 복잡한 인간의 심성에.. ) 

 그렇다면

'두려움' 으로 떨었을 가능성이 많은데

그 두려움의 대상이 누구.. 무엇인가가 포인트다. 

 일단

그냥 떨었다하면 어쩌면 포악한 아들 에서를 두려워해서 일수 있고 

자신의 실책에 대하여 깨달은 후  '자책'도 있을 수 있지만

'심히 크게 ' 라는 표현에서 보듯

과한 그의 두려움은 

아들 에서를 그동안 편애 해 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를 그리 두려워한다 생각하는 것은 

개연성이 적다 .


 그렇다면

나름의 분노나 어쩌면 자책과 더불어 

더 크게 그러한 내면을 차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큰 두려움 탓일 것인 바

당연히도 그 두려움의 대상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 맞을 것이며

하나님께 왜 '두려워 하는 가'.. 가 오늘 마주할 부분인 듯 싶다 .

레마.


 하나님을 두려워 함.

하나님의 크신 원칙은 '장자'를 통한 '축복의 계승'인 바

그를 어기게 됨 아니던가?

그런데 이러한 속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칙을 어기게 된 것은

그의 미련함이든

야곱의 어이없는 죄이던

그를 잘못가리킨 자신의 교육 탓이든

그에게는 

진정하게 두려워하여야 할 것임을 

순간 깨달아

'심히 크게' 두려워 한 것이다. 


그렇다면 두려움이 어떠한 두려움인가?
공포, 불안.........등으로 표현되는

깨끗지 못한 대상으로 인한 (사단, 병의 허상.............) 부정적 뉘앙스의 

악한 두려움이 있는 가 하면

'경외'로 표현되는

근접하기 어려울 만큼 큰 대상에 대한 

무거운 두려움(긍정적이니 깨끗함이니 표현하기 조차 어려운.. .) 이 있을것이다. 

 

 나는 경외를 이리 느끼고는 한다. 

아.. 

영적으로 아직 '하나님을 경외함'을 어떻게 표현해내기 어려워서 말이다..^^;

일단, 캐나다의 록키 산 속에 들어가니

처음엔 너무 아름답고 고요한 게 좋더니

하루가 가기 전에 

두렵고 무섭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너무도 거대하게 짓눌러 오는 외로운 두려움.

 영화를 보면 

한없이 이어지는 '우주 공간'의 빈 느낌.......이 두렵다.

 유투브를 통하여 알아낸 

별, 태양계, 은하수, 성간 거리, 은하계와 은하계의 거리. 우주의 끝..........

그리고 그 단위(광년, 십광년을 수조 배..........)를 보며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가슴이 턱 막히는 느낌으로 너무도 무섭고 두려워졌다. 

그러함을 말씀으로 지으시고 

그 우주를 이제는 '다중우주'로 만드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

'두려움'이 상상도 못할 위압.......생각이 미치지도 못할 거대함.......

그 앞에서의 

그 분이 싫어하실 죄를 지은 자의 

상상도 못할 두려움.

그게........

이삭을 

그리도 심히 , 

그리도 심히 크게 떨게 할 이유가 아니었을까?

 문제는

나는

과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짓는 다면

저리 심하게 크게 떨 수 있을까?

그 만큼 깨어 있을 수 있을까?
마치 일본 사람들이 '방사능'이 너무 뚜렷하고

그들이 역사에 지은 죄들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무섭고 두려워 

그냥 눌르고 눌러서 집단 망각으로 부정하고 사는 

국민 정신병 같이 사는 것처럼

너무도 크신 하나님 앞에 

내 죄를 마주 함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냥 잊어 버리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보면 

믿음 마져 ......

어느새 슬그머니 약해져 (경외의 비틀린 두려움, 병, 사단의 유혹)

대충대충 습관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경외와 공포와 자책과 망각.............을 

어찌 대할까?

믿음의 과정 중

특히 이 정도면 되었다 .. 마무리 할 때다 싶을 그 때에 

불현듯 다가오는

강렬한 죄의 결과를 마주하게 될 때 

(특별히 가까운 가족들 이나 주변에 의하여 ..)

나는 

우리는 

어찌 해야 하는가?


이삭.

눈이 멀었고 노쇠하여 힘이 다 빠졌으나

순간 스스로를 다시 바로 잡는다.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옳은가?'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일단 죄를 지었으나 

더 죄를 짓지 않기 위한 결단을 내린다. 

그 결과로 

에서에게 이리 얘기한다 .

'축복은 

반드시 

야곱이 받게 될 것이다' 

반드시.. 라 했다. 

에서를 두려워 했더라면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함이 훨씬 커서 

지신의 수치를 숨기려 했더라면

야곱이 미워서 분노가 더 커졌더라면

그는 그리 말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


그의 뇌리 속에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의 뜻에 

그래도 가장 가까운 

차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결단을 했던 것이다 .


그게 옳다. 

사랑하는 에서를 위하여

말꼬리를 흐리거나

다른 위안의 말을 생각해 냈더라면

말이 꼬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흐려졌을 것이다. 


그렇다. 

그래야 한다. 

잘못.

누구나 할 수 있다 .

원죄가 있었던 인간 아니던가?

문제는 

두려움을 두려워서

피하거나 숨기거나 왜곡 시키면

죄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두려움의 실체, 

그 두려움이 더럽고 추악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고 

하나님, 

너무도 거대하신 분에 대한 경외의 발로라 생각되면

하나님의 뜻대로 

결단해야 한다 .

그게 비록,

가족의 파괴나

목숨이 위험한 한이 되더라도 말이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주님.

오늘은 두려움에 대하여 묵상하였습니다. 


두려움은 

병적인 두려움, 

사단의 이유인 어두운 두려움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표현의 

도저히 어쩌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선한 두려움, 옳은 두려움

그래서 그로 인하여

옳은 방향으로 나갈 수 밖에 없을 두려움으로 나뉘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주여.

어떤 형태이던 

두려움은 

그 자체가 너무도 힘듭니다. 

두려움은 

무조건 두렵습니다. 

피하고만 싶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통하여

또다른 선한 결과를 가져옴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지금까지의 제 삶이 그랬습니다 .


주여.

주를 만났기에 

제 더럽고 어지럽고 썩어갈 두려움조차

이제는 제 여기까지의 

인생의 지팡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여.

주님의 뜻.. 말입니다. 

주 님 안에서 옳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주님의 결국은 '선'임을 

주님이 미리 축복하신 그 축복의 결과가 

오늘 제게 느껴지고 이해되게 되어갑니다. 

주여.


두려워 할 것은 두려워 하되

그 두려워 할 대상이 

오직 하나님이심 만을 잊지 않게 하시어

두려워 하되 

그 두려움의 시간에 무조건 주님 안으로 

주님 뜻으로 더 욱 다가가는 계기가 되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더 기도하게 하시고 

결국 승리하는 결과를 목도하는 

저희, 

제가 되게 하소서.


주여.

제 인생의 장해물.

잘 아시는 내 주님.

오늘.. 

그 조차 

심히 떨고는 

반드시 돌이키고 되집고 돌아가야할 

옳은 계기로 

오히려 기뻐하게 하소서.

내주여.


거룩하신 내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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