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썩는 자 무덤에서 나올 자( 요11:28-44 ) 본문
제 11 장 ( Chapter 11, John )
어제
정말 단 비가 내리네요.
주님의 눈물 같아요.
얼마전 까지
빨갛게 열매를 맺어
풍성한 가을을 자랑하던
이
이름 모를 나무 열매에
빗방울이
마치
눈물처럼
정말
주님의 눈물처럼
맺혀 보여요.
멀리
제 다니는 병원이 보이네요.
바라기는
주님이 눈물이
온 세상을 덮고
우리의 소원을 덮으셨으면
하는 아침입니다.
조금은 춥지만
상큼한 아침이었어요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지 말만 - 아.. 자기...말만.ㅎ- 하고 돌아서는 게
어쩌면 누구랑 그리 비슷한가?
나.
바꿀 일이다.
좀 여유롭고, 천천히, 겸손하게
남들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그녀는 마리아를 불러낸다.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마리아는 늦게 나왔지만 '급히' 나오는 게 언니와 다르다.
아마도 처음엔 정신이 없어서 - 나사로 죽음에 상심이 커서 일 듯..- 안나왔지만
마르다의 정리된 호출에 '급히'일어선다.
그녀의 마음이 읽혀진다.
나사로에 대한 사랑.
예수님에 대한 의지, 믿음.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들어오셔도 될 것을 그 자리에 계시는 예수님.
그러면서 마리아도 불러주시는 예수님.
그 분 하나님의
늘 변함없으시고
개인적이시고
'그저 계시는' 모습이
늘 죄덩어리고 자책덩어리던 주 모의 심성에
감사하고 정겨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주님 만나고 십수년.
주님은 그렇다.
공의와 해야 한다는 , 그래야만 사랑받는 차거운 하나님의 이미지와는 먼,
정겹고 가깝고 늘 변하지 않으시는
다정스러운 하나님.
생각하면 눈물 날것 같은
본질의 어머니의 그리움 같은
그런 사랑을 지니신 '나의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시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리아도 마르다와 똑같은 말을 한다.
'주께서...................아니하였겠나이다'
누구나 사람은 똑같다.
살아서 유한적 육신 속에 갇혀 사는
미련한 인간의 실체.
하지만, 마르다와 다른 마리아의 행동이 있다.
주님 발 앞에 엎드렸다.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리곤, 울었다.
얼마나 슬피 울었는지
주님의 심령이 통분히 여기시고 ( NIV에서는 deeply moved in spirit and troubled 영혼이 깊숙이 움직이시다) 민망하시다고 나온다.
이렇듯 마리아는 깊이 울었다.
우는게 중요하다.
울어도 피상적이 아니고 깊이 울어야 한다.
울기 위해서는 '공감'과 '불쌍히 여김'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아기처럼 여려야 한다.
순수해야 한다.
맑아야 한다.
그리고는 적극적으로 남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게, 주님을 움직이는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난,
내 설움이 아니고
내 상처 탓이 아니고
내 연민 탓이 아니고
진심으로 남을 위해서 울 수 있는가?
어제 근처 금요 성령 찬양예배에 나갔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시키신다.
목사님의 강한 목소리가 심령을 파고 들며
눈물이 쏟아진다.
슬프지도 않았는데...
요즈음 가끔 그렇다.
나도 남을 위해서 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함이
나로 하여금 마음을 조금은 더 선하게 만든다.
나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스스로 선한 생각을 가지게 됨이
주님을 만나서 가지게 된 또다른 축복이다.
이제 '주님이 그런 나를 보고 같이 , 그리고 기뻐서 눈물을 흘리실 수 있기'를
조심스레이 기다려 본다.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주님의 사랑 받는 자,
주님의 구원받고 칭찬까지만 받은 자.
그 차이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차이다.
그게 주님의 눈물의 차이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빈틈이 없다.
세상적으로 똘똘이다.
그렇다 .
4일 지나면 썩는 것이 당연하고
주님을 위하는 마음도 충실하여서 주님을 막아선다.
어찌보면 그럴 듯하고 좋다.
하지만, 썩는 자는 동생이다.
그러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려야 하지 않는가?
왜 그녀 마르다는 바쁘기만 하고 '진실'이 없는가?
맞 딸로서 가져야할 '의무'감 만 가득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녀의 성장과정이 힘들었음이 짐작이 간다.
그녀는 상처 덩어리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녀는 '어른 같은 어린 가장'으로 컸을 것이다.
마음은 지옥일 것이다.
그럼 ,
이런 사람이 이 세상에는 없는가?
돌아보면
주위에 , 나를 포함하여
정말 이해하지 못할 만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신앙인 중에서 거침없이 '악인'보다 더욱 '악'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음을 본다.
속이 역할 때가 많다.
세상 불신자들은 그냥 솔직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은 거룩하고 훌륭한 신자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속이 뒤틀린다.
나도 남에게는 그럴 수 가 있다.
모두 '마르다 신앙'일 수 있다.
모두 열심이고 칭찬 받을 신앙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도 모를 깊은 죄 속에 있다.
마리아가 옳다 .
그녀는 눈물이 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새벽에 - 오늘은 자다가 깨는 바람에 잠이 안와서 새벽에.ㅎ-묵상을 하던 중
여기 읽다가 '큰 소리'로 외치시는 주님이 상상이 되면서
살짝 놀랐다.
외치시는 것 같아서..
'주하인아. 나오라"
나오라...하시는 소리를 크게 듣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나오라'는 이 말씀이 문제다.
어디서 나오는가?
나사로 처럼 지금 내가 있는 동굴.
내 무덤.
내 무덤이 어딘가?
무엇이 무덤인가?
주님을 만나고 '생명'가운데서 살기를 그처럼 원하심에도
아직 죽음의 정서를 가지고 사는 게
과연 난 없는가?
주님이 주시고 싶어하시는 생명과 경건의 능력 안에 들어가지 못한
무덤같은 '상처'의 흔적은 무엇인가?
날 늘 따라다니는 결점은 무엇인가?
그게 무덤에서 나오는 길 아닌가?
무덤에서 '나오라. 주하인아.. ' 라고 큰 소리를 듣는 하루가 되길 원한다.
난
그 말씀으로 나오는 기적이 있길 원한다.
그것이 세밀한 기적의 체험으로 다시 쌓이길 원한다.
지금껏 인도하시듯 점차로 발전하는 하루가 되길 원한다.
그 발전의 한 획이 오늘이 되길 원한다.
주님이 역사하시는 큰 소리를 듣길 원한다.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이제 묶고 있던 죄악의 끈들이 벗겨지길 원한다.
내 삶을 동굴로서 만들었던
그 칙칙하고 답답한 죄악의 끈들,
상처의 흔적들
삶의 어쩔 수 없는 묶임들이 끊어지길 원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푸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다.
다니게 허락하는 것도 내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죽은 시체가 움직이고 걸어다니기 위해서는
주님의 기적이 필요하다.
주님의 기적은 주님이 책임지신다.
그냥 난, 내가 해야될 분량이 있다는 것이다.
풀어놓는 결심.
풀어 놓은 노력
걸어다닐 의지.
걸어다닐 수 있다는 믿음.
거기에 '마리아 같은 눈물'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이 여기시는 움직임만 가미되면
완성이다.
나오라 하실 때 나가자.
끈을 끊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자
주님이 '나오라'하시는 강한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하자.
그러한 영적 민감성을 지니자.
그러기 위해 순수해지자.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을 내려 놓고
헛된 판단과 부정적 논리를 버리자.
주님이 하라시면 하는 단순함을 가지자.
그리곤, 기다리자.
오늘 주님이 날 부르실 것이다.
가서 눈물로서 주님 앞에 무릎꿇자.
그러고 나면 이제 .....해결될 것이다.
적용
1. 성경 일곱장 읽겠다.
2. 아버지 학교에서 최선을 다한다.
긍휼한 마음을 회복하는 기회다.
중보하는 기회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회복하자.
3. 주님의 소리를 듣길 원한다.
저녁까지 기다린다.
묵상하고 기도하자.
'쾅'하니 내 뇌리를 때리는 주님의 소리를 기다린다.
4. 남의 말을 경청하자.
마르다 처럼 할 말 만 하고 돌아 나오지 말자.
기도
주님
마리아와 마르다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누구도 옳다고 하기 어려운 신앙의 모본을 보이지만
마르다의 허전한 부분을 보았습니다.
어찌보면 그도 상처가 많은 사람인지라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감정이 메말라 있어서 인지 모릅니다.
그러함이 주님의 사랑을 덜 받는 이유가 아닌가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마르다의 그 아픔이 불쌍합니다.
저의 옛 가슴 속을 들여다 보는 듯 합니다.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그녀의 삶이 옳게 나간다는 잘못된 확신이 더욱 깊이 자리 잡을 까 봐 그렇습니다.
주여.
그러한 지구상의 모든 당신의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그들의 가슴이 '
주님의 영으로 녹아나길 원합니다.
주님의 오신다는 소리에 버선발로 뛰어나가 무릎꿇고 울기만 할 수 있는
그러한 깊은 가슴을 주소서.
그 대상이 '나사로'같은 타인이든,
자신의 깊은 상처의 영혼이든
눈물로서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주님의 눈물로서 해결받는 자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주여.
가슴이 아픕니다.
마리아로 그렇고
마르다로 그렇습니다.
저로 그렇고
저의 해결 받는 지혜가 감사해서도 그렇습니다.
이제
더욱 간절히 빌것은
믿음을 더욱 주소서.
하라면 하는 자 디게 하소서.
생각하고 재는 자 되지 않게 하소서.
풀어내는 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눈물의 뜨거움을 기대하며 그냥 풀어가는 자 되게 하소서.
주여.
빕니다.
빕니다.
긍휼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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