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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라비 (요11:17-2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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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라비 (요11:17-27)

주하인 2009. 3. 13. 12:24

제 11 장 ( Chapter 11, John )

 

 

 

 네 꽃들이 다시 피어나리라

                                                     

 

 

 

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참 좋은 마르다.

엉뚱한 마리아.

 

 마르다는 친절하고 사려깊다.

마리아는 감성적이고 어리다.

 

 이상은 보편적 관점에서 판단한 이야기다.

 

 하지만, 조금 깊게 들어가 보면

마르다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마중 나갔을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웃었을까?

울었을까?

 나사로 죽은 감정을 그녀는 어찌 표현하고 있었을까?

감정보다는 생각이 앞서는 것 같지는 않는가?

마리아는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고..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맞다.

주님의 능력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데 까지다.

참, 생각이 깊기도 하다.

그 와중에 저기까지 배려할 그녀의 냉철함이 부럽기도 하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제라도 무엇이든지..

조건에는 '나사로의 부활'은 배제 되어 있다.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주님은 배제하지 않으신다 .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네 오라비의 마르다 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마리아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녀는

틀림없이 신앙적인 대답을 한다.

'마지막 날, 부활'

틀림없이 정답이다.

그러나, 어딘지 묘하게 빠진 구석이 있어 보인다.

주님 예수님을

자신의 틀 안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배우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정도만..

 단, 그 분이 하나님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임은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분이 살 것이라고 하면 사는게 아닌가?

 

마르다의 모습을 보며

저 모습이 나의 모습과 많이 다른가 보고 있다.

신앙인인 척 하면서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오라비의 죽음 가운데서도

저리도 냉철할 수 있는

깊은 긍휼함의 부족함,

주님의 뜻을 다 아는 듯 하면서도

주님의 기본 능력 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

 

마르다는 분명 배울 바가 많다.

그녀에게는 쉽게 공감하기 힘든 냉랭하기까지 한

냉철함이 서늘하게 한다.  

 그런 그녀에게 '오라비'는 어떤 의미인가?

긍휼함이 아닐까?

 마리아의 살아나야할 오라비는 누군가?

그를 통하여 만나볼 주님의 기적이다.

 

나에게 '살아날 오라비'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나와 같이 살고 있으면서

갑자기 없어지는 그 오라비는 누구인가?

마르다의 '긍휼한 마음'일 수 있기도 하고

마리의 '믿음'의 증거 이기도 하다.

 

주님

오늘 하루 도우소서.

저에게 오라비를 깨닫게 하소서.

그리고 '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체험케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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