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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볼때마다( 잠7:1-10 ) 본문

구약 QT

손가락 볼때마다( 잠7:1-10 )

주하인 2007. 7. 14. 08:35

제 7 장 ( Chapter 7, Proverbs )
1.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2.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3.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7.  어리석은 자 중에, 소년 중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8.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9.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하나님은

아버지 같으신 분이시다.

그게 '내 아들아'가 계속 나온다.

 

 하나님은 지혜의 보고 이시다.

명철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시는 분이시다.

저물 때 , 아무도 안보는 듯 안심하는 것 까지 그 분은 다 알고 계시다.

 

 하나님은 안타까워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락하시고

단지 지도 만하고 계신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특별히

지혜를 사모해야 한다.

명철을 마음에 담아야 한다.

음란의 죄를 멀리 해야 한다.

주님이  저러신 분이심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말씀하신다고 지켜지는가?

얼마나 어려울 지

그 분은 오늘의 비유에서 이리 절묘히 말씀하시고 계신다.

 ( 손가락을 이리 꼭 물고 다녀도 잊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

 

 손가락에 매라

 

마음 판에 새겨라

 

 주님의 말씀이 점차로 고리타분한 옛 세대들의 소리처럼 들리는 세대입니다.

스스로도 주님의 말씀의 필요성과 당위성은 알지만

그 말씀을 지켜내기가 참으로 힘든 시간 들의 연속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 분께서 부활하셨음도 알고 있어도

천국이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어도

매일 같이 은혜로 우리를 안아 주실 때 평강의 기쁨으로 전율하는 체험을 하기에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아는 우리 조차도

실제로 그 좋고 귀중하고 은혜로운 진리가

어찌 지켜지지를 않고 있는가?

거의 조금도.........................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손가락에 매라고 까지 하신다.

마음 판에 새기라고 까지 하신다.

 

 손가락에 매면

눈 앞에 손가락이 나타날 때 마다라도

주님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어둘 때, 뉘�할 때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고

골목길을 스며드는 청년의 모습이

마치 현대의 우리들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지는 않은가?

 모를 것이라고 가슴 두근 거리며  죄책감을 가지고 호기심에 시작하던 것이

 서서히 둔감해던 것이

이제는 당연한 듯 세태화가 되어가고

그러다 보면 주님의 말씀이나 주님의 감찰이나 천국이나 십자가나 명령이나 훈계나 ..

그 어떤 것도 가슴에는 들어오지를 않게 된다.

 이게 비단 음란이나 섹스에 해당하는 이야기 일까?

주님의 원하시는 모든 선한 부분에서 다 그렇다.

머리는 알지만

마음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점차로 세상과 사람들은 하나님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그런 세태에서 주님을 믿는 것 자체가 점차로 힘이 들어져 가고 있는 세상이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다는 것은 기적처럼 바뀌어 가고 있다.

이 어려운 세대에서

주님을 놓치지 않고 사모하는 자들을

성경에서는 '남은 자'라 한다.

남은 자로 남기 위해

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 분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일상에서 단 하나라도 적용하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한다.

그게

이 어려운 세대에 남은 우리들의 해야할 당면 과제이다.

 

 

적용

 

1. 성경 다섯 장 읽겠다.

 

2. 회개 하겠다.

 

3. 현상을 말씀에 맞추겠다.

 . 현실

 . 주님 뜻

 . 말씀

 

4. 주님은 늘 보고 계심을 명심한다.

 

5. 손가락 볼 때마다 주님 생각한다 !

 

6. 오늘 저녁 아버지 학교에서의  부부 찬양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불신 아버지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르도록 한다.

 그것을 위해 주님께 잠시 기도하겠다.

 찬양을 통해 주님을 영접하도록...

 

7. 일상의 삶과 영성을 조화롭게 할 지혜를 주시길 기도한다.

 

8. 주님께 맡기고 내려놓는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내 오래된 문제,

 삶의 문제.........

 

 

기도

 

주여

묵상이 어렵습니다.

너무 교훈적인 이야기라서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머리와 영혼이 성장을 못해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주여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곧이 곧대로 준행할 수 있도록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대로

손가락을 볼 때마다라도 주님 생각토록 노력하겠습니다.

그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어리석지만 최선의 결심인 듯해서요.

주여

지혜를 주세요.

일상의 삶과 영성과의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해주세요

주여

내 추리와 비슷하게 눈앞에서 현상이 나타나도

주여 그게 주의 뜻 안에서 날 위해 계획된 문제임을 확실히 인식하도록 도우세요.

그 단면으로 걱정하지 않게 하시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주님의 뜻,

그 뜻을 바라보길 훈련시키시길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볼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

오늘은 부디

비교를 내려놓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비교 보다는

주님의 원하심을 비교적 잘 배울 수 있는 하루이길 원합니다.

짧은 인생이고 눈깜짝할 하루지만

이 하루에서 주님의 뜻을 길게 배울 수 있는 하루이길 소원합니다.

모든 사람들

다 주님 안에서 주님 뜻을 알 수있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부디 세태가 주님이 아니면

구원이 없고

주님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음을 아는 세대가 될 수 있기를 오늘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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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찬양을 통하여 붙드실 자 있으시면 붙드소서.. 제발 ~^^*) 

 

  

 

 올 연초

 

 

외부 손님들과

환자 분들이 많이 모이신 가운데

전인치유에서 Solo로

'오 신실하신 주'를 부른 적 있습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하며 진행되는 찬양이지요.

 다음날 

퇴원하시는 환자 분 한 분께서

날 면담하시겠다고 딸을 보낸 적이 있답니다.

그때 굉장히 바빳던 때라 수술을 들어가서 뵙지 못했지만

간호사의 전언(傳言)에 의하면

은혜를 굉장히 많이 받은 불신자인데 퇴원하기 전에 얼굴이라도 볼 수 있겠나는 이야기였다.

 속으로 '이구 날 꼭 보고 가지..ㅎㅎ'하는

칭찬 받고 싶은 생각이 슬그머니 올라 오던 그 분이었다.

 

 바로 며칠 전

내원하신 분이 그 이야기를 하신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분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 분이 자신이시란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병원에 신장이 안좋아서 내과에 입원하기 얼마전 부터

아시는 교수 한분이 한달 내내 교회에 다니자고 끌고 다니시던 걸 피해다니다가

병원에 입원하여 주치의 선생님이

마침 전인치유 이야기를 하시며

들러 보실 것을 권유하셔서

마지 못해 

퇴원 하루 전날 참여 했다고 한다.

 우연히 내려온 샘누리 홀에서 들은 내 찬양은

그 분에게 너무도 깊은 전율을 - 본인의 이야깁니다. ㅎㅎ-  주었다 한다.

 

 그래서 퇴원한 후 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이제는 새벽기도까지 나가는 열성 교인이 되었다고

얼굴이 밝아지면서 말씀하신다.

 

할렐루야

 

그날이 목요일

바로 2일 전 전인치유 있는 날이었다.

요새이 무기력한 마음에서 서서히 빠져는 나오고 있지만

벌써 준비했어야할 악보를 손도 대지 못하고 있던 차이다.

전인치유의 무대에 설 힘을

하나님이 또 한번 회복시키고

영적 무기력을 치유하시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늘

아버지 학교에서

불신자 아버지들을 대상으로 열린 아버지 학교를 3주째 진행하게 되어 있다.

거기에 우리 부부가 두엣으로 노래를 해달라고 - 찬양 1곡, 일반 곡 1곡-

초청을 받았다.

 

 오늘도 혹시 우리 부부의 찬양을 듣고

전율을 일으킬

그 누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참가할 요량이다.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다.

찬양은 영을 살린다.

찬양은 슬프지 않은데 눈물을 쉽게 만들어 내는 유일한 감성자극 도구이다.

찬양은 기적을 만든다.

찬양은 전도의 도구이다.

 

돌아보면

난 내가 그런 무대에 서려고도

찬양을 인도하는 인도자의 상상도 해보지 않았지만

어찌 어찌하여 지금의 모습을 하게되었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찬양 사역자'니 하는 말이 너무도 어색하게 들려서

나의 이 비젼없는 삶의 모습이 부끄럽기 그지 없다.

지금도..

 

그러기에

목요일,

일요일,

가끔 있는 아버지 학교 행사의 토요일에 서는 무대가

부담이 되고

이거 내가 서도 되는 거야..라는 내적인 부대낌을 꼭 겪는다.

 

큰 소명의식  없는 봉사는

자주 난관에 봉착하고

난관에 봉착할 때 마다 어려움을 느끼지만

주님은 그걸 무릎쓰고 찬양하기 위해 설 때마다

많은 은혜로 보호하고 다독거려 주신다.

그래도

요 한달 동안 겪는 내적인 무기력함이 있을 경우

마치 엘리야가 겪은 그 진한 무기력 때 인도하시고 먹이시던 그 하나님처럼

꼽추 교수이신 백교수님의 간증 입술을 통하여,

2일 전의 그 분의 입술을 통하여

다시금 먹이시고 힘을 주시는 듯하다.

 

 할렐루야

오늘도 주님이 무엇인가 준비되신 역사를 보이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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