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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불 장작 불[요18:12-27] 본문

신약 QT

성령 불 장작 불[요18:12-27]

주하인 2013. 3. 25. 09:40

 


 

18.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25.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날씨 만 추울까?

마음은 더 춥겠지?

그러니 불 곁으로 가는 것은 당연하나

그 불로 추위가 가셨을까?

 

 베드로 왜 저러고 있을까?

아예 도망을 가면 훨씬 더 솔직할 것을

그러지도 못하고 아닌 척하며 불 곁으로 다가가 예수님을 지켜보면서도

누가 물어보면 부르르한다.

'나는 아니라 ~!'

 

이 심사가 이해가 된다.

예수님을 좇지도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하는 신세.

 

불이 의미하는 상징성은

어둠 속의 유혹 인 것 같다.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을 좇아야 하나

온통 어두움 뿐인 듯하고

그나마 그 어두움에 조금 , 잠시, 일시적으로 온기를 주는 '불'이 주는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다가간다.

그러나, 그 불 곁에는 예수님을 잡아들인 일행들이 있어

맘 놓고 불에 다가가 쉬지도 못하는 신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불나방처럼 다가서야 하는 ........

그러는 그에게 불 곁의 사람들은 호의적이지 않다.

'너 , 그 제자중의 한명이지?'

순간적으로 찌르자 깜짝 놀라며 '부인'한다.

 

 불은 '유혹'이다.

한편으로 적극적으로 달려간 자들에게는 그냥 따뜻함이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 보는 자들에게는 '갈등의 유혹'이다.

불은 '세상'을 암시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면 '예수님의 고난'을 같이 겪어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없고

믿음이 확고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같이 질 만한 성장이 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혼돈'의 시간 같은 데

그 어둠 속에 마치 몸을 녹일 듯 위로하는 듯

불이 피어날 때 얼마나 유혹적일까?

베드로는 그런 마음에서 불곁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 위험을 알면서도..

 

 나... 어떤가?

어떤 일.......머리 복잡한 일이 생기면

아직도 허겁허겁하며 '친구'나 도와줄 사람들을 먼저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이 아닌 줄 나도 알고 누구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왜 그런가?

그냥 그 타오르는 장작불의 흔들림이 유혹적이기에 그렇다.

그런 허겁거림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하면

마음의 평화는 사라지고 안정을 잃기 시작한다.

친구 만나 대화를 할 때는 조금 따스해지는 것 같다가도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더 무겁다.

그도 나도 결국 가야할 길의 마지막 지점을 향해 가는 자들이고

답이 없음은 서로들 잘 알지 않는가?

결국 하나님 앞으로 가야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혼란 스러울 때는 기도한다는 생각이 왜 이리 부담이 오는지..

아마 베드로의 눈이 그랬을 것이다.

불곁으로 향해 있으면서도 울듯한 눈으로 예수님을 흘낏 흘낏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양가 감정.

그는 분명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눈치 챈자로서

아직도 세상의 따스함에 육신을 녹이는 재미를 놓지 못한 자다.

미성숙한 믿음을 가진 자란 이야기다.

 

 세상의 불 빛을 그리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이 꽉 그를 사로 잡아야 한다.

은혜의 감동이 너무 커서 그 이외의 어떤 것도 그의 기쁨이 되지 못해야 한다.

세상의 기쁨과 하나님을 동시에 믿을 수 없다.

잘 되는 것 같아도 때가 되어 '선택'을 강요받을 때가 올 것이다.

계시록의 666표를 받을 때 말고도

개인적 종말적 상황이나

성장하기 위한 도약의 계기에 분명코

어둠 속 불빛과 예수님 사이에 결단을 요구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아니.. 그것 아니라도 매사에 우리는 신앙과 불신앙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럴 때 '성령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있지 않고는

베드로의 어이없는 예수님 부인함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속성들을 다 이해하고 경험하고 가셨다.

그 분은 이러한 베드로의 '갈등'이 폭죽터지듯하는 상황 까지

다 고려하고 하고 계셨다.

그리하고 인간들의 그 유약함을 이해하고 그 어이없는 약함과

그를 통한 배교의 위험등을 다 이해하셨다.

그래서 그 분이 직접 십자가를 지시게 되신 것이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신 것이시다.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시다.

그 분은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관념 속의 우리와 격리되어 계신 분이 아니심을

이러한 철저한 인간 심리까지 알고

결국 나중에 베드로를 성령의 사람으로 이끄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오늘..

나의 흔들림을 그 분은 보고 계시는 듯 하다.

몇가지 고민들이 날 사로잡으려 한다.

사순절 시작과 더불어 조금 커진 '외로움'의 문제를 직접 들여다 보게 하시고

진료적 문제로 생기는 약간의 머리 복잡함,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그러한 혼란시 과도히 크게 생각하려고 하는

나의 습관적 어두운 프로그램 등을 바라보게 한다.

그 갈등은

마치 베드로가 어둠 속에서 불가를 향해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예수님을 버리지 못하고

터질듯한 복잡한 머리로 조금조금 빨려들어가듯 다가가는

혼란의 모습을 통하여

비슷한 '동병상련'적 느낌을 받게 하신다.

 

 불을 쬔다.

불을 쬐지 말자.

불을 나도 모르게 쬐더라도 예수님을 잊지 말자.

어쩔 수 없는 나의 모습을 주님은 알고 계시고 안타까움으로 보고 계신다.

그래서 마음을 정리하자.

예수님 만을 바라보자.

내.. 어찌 할 수 없어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살 수 밖에 없고

주님 부르실 때까지 세상에 살 수 밖에 없어

불 가에는 있지만

눈은 예수님만 더욱 고정시키자.

 위해하려는 소리들,

잘못된 습관의 프로그램들이 날 흔들려 할 때에도

눈을 예수님께 떼지 말고 대답도 하지 말자.

 

어제

주일.

계속된 작은 걱정들로, 아침이 무거웠는데

말씀을 묵상하며 '주일'을 주님만으로 집중하려 애썼다.

예배의 자리 앉으니

가슴이 따뜻한게 명치 주위로 나른 한 기쁨이 몰려온다.

등에 쓰다듬듯 안전감이 .. 그렇다 .. 안온한 안전감이 밀려온다.

예배 드림이 통쾌하다는 것은 '자주 '느낀다.

그런 기쁨이 날 예수님을 더욱 사모하게 만드는 유혹이다.

하루 종일 마음이 편안하다.

이 편안함.

이것이야 말로 곧 꺼지고야 말 흔들리는

어둠 속의 장작불과는 차이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

그런 하나님의 불 사랑을 기억하고 잊지 않아

세상의 유혹적 단기적 조건성 불빛에 흔들리지 말자.

설령 근처에 있어 따스함을 느끼면 그것으로 족하자.

그리고는 더욱 마음을 주님께 고정하자.

말씀을 더욱 깊이 붙들고

기도로 주님 앞에 늘 나가자.

오늘 그리하자.

 

 

주님.

제 고민 아시지요?

제 약간의 흔들림을 아시지요?

제 오래된 외로울 듯한 마음을 아시지요?

그 원인에 대하여 다 아시지요?

그럼에도 예수님의 주시는 안식이 너무 좋아

주님을 떠나지 못하면서도

믿음이 아직 일천하여

세상의 장작불의 온기를 과감히 떠나지 못하고 불로 몰려드는

저의 어리석음도 아시지요?

주여.

저를 붙드시사 오직 진리이신 예수님 만을 고정하게 하시고

제 가진 모든 생각과 고민들

주님께 다 의뢰하고 맡기게 하소서.

그래서 세상의 불빛을 과감히 멀리하게 하시면 더욱 좋겠사오나

제 본성이 아직 그럴 만큼 성장하지 못했으면

저를 스스로 너그럽게 보게 하소서.

주님.

지금은 부족하나 매일매일 성장하게 하소서.

주님 말씀대로 그리하게 하소서..

이제 곧 있으실 부활과 성령의 강한 임재를 기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을 허락하소서.

주님 뵐 그날까지 웃고 살 확신을 주소서.

추위 덜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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